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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vi Oct 18. 2024

나를 모르는 곳에서 나로 사는 일.

여행의 이유

고등학교 2학년때였던 것 같다.

가세가 기울고, 더 이상 우리를 지탱하는 울타리가 견고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언제부턴가 경제활동을 시작한 엄마는 작은 공부방에서, 초등학생 대상 학원으로 몸집을 키웠다가

학원이 망하게 되면서 공장에 입사하셨다.

그 이후 숨죽여 울던 엄마의 모습이 여전히 선명하다.

결혼하고 쭉 가정주부로 계셨던 터라, 공장의 빠른 일처리는 엄마에게 버거웠을것이다.

그 와중에도 점심 식대를 아껴보고자 집까지 걸어와 밥에 김치 하나를 두고 5분 만에 식사를 하고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던 엄마.

텃세와 멸시를 견디다 못해 이직을 택해야 했던 엄마에게 남은 선택은

처음 입사했던 곳에 비해 더 열악한 공장으로 가는 것 말고는 없었다.

지금처럼 정보가 다양하고, 그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자녀가 있던 것이 아니었기에

벼룩시장에 적힌 공고문에 밑줄을 쳐가며 일자리를 찾던 엄마에게는 최선의 선택이 사실은 최악의 선택이라는 것을 감별할 수 있는 능력과 여력이 없었다.

하루하루 지쳐가고 생기를 잃어가는 엄마를 보며 몹시도 사무치게 슬펐던 감정도 여전히 선명하다.


그런 부모님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고등학교 2학년 때 급식 아르바이트를 지원했다.

말이 급식 아르바이트지, 사실은 급식 배식을 돕고 급식비를 면제받는 일이었다.

당장의 500원이 없어 40분이 넘는 거리를 걸어 다녀야 했지만,

당시 여러 조건이 부합이 되지 않아 국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던 우리 집이었기에

이렇게라도 해서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대학에 진학하고서도 변하지 않았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장학금을 타는 것이 가장 큰 효도라는 것을 모른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하지 않은 장학금을 믿을 만큼 나 자신을 믿지 못했기에 늘 아르바이트를 했다.

방학 때 풀타임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은 필수였고, 학기 중에도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옵션이 아닌 필수였다.

마치 바지를 고르고, 사이즈를 고르려고 하니 모든 사이즈 옆에 +7000원이 붙는 결제창처럼

옵션인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 필수인. 그런.


그랬기 때문에 취업은 나에게 너무나도 간절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 깨달았다.

온 마음을 다 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이미 망처 버린 학벌이라던가,

이미 망처 버린 학점이라던가,

자기소개서를 쓰는 그 순간에도 멈추어서 감자튀김을 튀겨야 했던 것들.

한 치 앞도 보지 못하고 지금을 살아내느라 미래의 나를 조금씩 죽여오는 일들.


취업만큼은 잘해서, 최저임금발표에 기대는 아르바이트비보다

정식으로 높은 연봉, 그러니까 큰 월급을 받아 우리 집의 가세를 다시 세우고 싶었다.

우리의 이 6년이 헛된 시간은 아니더라, 버티고 버티니 해 뜰 날 오더라를

큰 소리로 말하며 우리 가족에게 희망을 외치고 싶었다.

큰 포부를 안고 사업을 시작 했으나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끝내 실패로 마지막을 장식한 아빠의.

그의 쌓여가는 무력감이 가족 모두를 지배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온 마음을 다해도 안 되는 것들이 있었다.


.

.

.

내가 원하던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졸업 후 취업은 했다.

큰 기쁨은 아니었지만 큰 다행인 일이었고, 이후로 우리 가족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그러면 나는 위안을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산 넘어 산이라고, 넘으면 또 다른 산이 있었고,

역경을 해결하면 뒤에는 또 다른 문제들이 고개를 세우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졸업 후 정식으로 일한게 1년쯤 되었나,

나는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나로 살아보고 싶어서.

가족과 직장이 없는 곳에서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

내가 꿈꾸던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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