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은하 - ep3 사과

이동조사원 P가 발행한 16개의 기묘한 에피소드

by 이동조사원 P

에피소드 3

사과


르네 마그리트 <리스닝 룸>

나는 창 밖을 보고 싶었다. P의 창 밖은 푸른 숲이 있어서 좋다. P는 항상 숲을 배경으로 한 그 창가에서 나를 만지고, 나의 노래를 듣고, 나를 느끼고, 나와 사랑을 나눈다. 어제도 우리는 사랑을 나누었다. 나는 P를 사랑한다. 그런데 그 P가 사과를 나의 눈앞에 두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빨간 사과. 그 사과가 나의 시야를 가리고 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을 보니 화장실에 간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디로 간 것일까?

나는 사과를 싫어한다. 나의 첫 남자가 사과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 첫 남자는 꼴에 화가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정말 아마추어 화가였다. 그는 G다. G는 사과만 그렸다. 정말 많은 사과를 그렸다. 빨간 사과(이브를 유혹했던), 파란 사과(백설공주를 유혹했던, 아마 독이 든), 작은 사과(아직 익지 않은, 무척이나 신), 큰 사과(너무 많이 익은, 맛이 없는), 아주 아주 큰 사과(마그리트란 화가가 그렸던 것 같은), 사과 무리(세잔인가?), 흑백 사과(아! 눈이 침침해졌나?)……. 그런 G의 사과 그림은 정말 형편없었다. 그 그림은 언뜻 보면 그냥 물감 칠일뿐이었다.

정말 견디기 힘든 것은 그렇게 많은 사과를 그리고는 항상 나와 나누어 먹었다는 것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아직도 내 몸속에 사과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심지어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내 몸속에서 뿜어 나오고 있는 붉은색 사과 향기가 느껴진다. 아마 G는 사과에 중독되었을 것이다. 나는 처음엔 G의 순수한 영혼을 사랑했지만 점점 그 사과 고문에 지쳐갔다. 그런데 G를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놀랍게도 P가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P는 자기를 소설가 지망생이라고 했다. 나는 P의 젊고 맑은 눈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P의 품에 안겼다. 그렇게 우리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사실 오늘은 오전부터 P의 얼굴이 좀 우울해 보였다. 퀭한 눈동자. 평소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지 않아서 탄력이 있는 P의 피부가 오늘은 무척이나 푸석해 보였다. 마치 하루 밤새 5갑의 담배를 피우고 작업을 한 (그래 봤자 또 사과 그림이었겠지만) 다음날 아침 일찍 내 앞에 나타났던 G의 얼굴 같았다.

“오늘은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나도 그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아직 한 번도 같이 여행을 떠난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지치고 우울한 P의 얼굴을 보니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항상 내 곁에만 붙어서 글을 쓰는 P가 혹시 병이라도 걸려 나의 곁을 떠난다면 나는 정말 슬플 것이다. P는 나에게 몇 장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몰디브, 쿠바, 할슈타트, 그리고 제주도. 모두 멋진 풍경이었다.

“어디가 좋을까?”

나는 속으로 몰디브가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표현하지 않았다. 하긴 몰디브나 쿠바나 할슈타트는 P의 지금 주머니 사정으로는 가기 힘든 곳일 것이다. 왜냐하면 P의 통장을 내가 보관하고 있어서 그의 잔고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P는 처음 만나면서부터 별로 넉넉하지 않은 자신의 통장을 나에게 맡겼다. 물론 그것 때문에 내가 P의 은행 계좌 이체, 신용카드 대금이나 공과금 납부 같은 잔심부름을 해야 했지만 그게 P만의 사랑 방식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제주도도 생각보다 괜찮구나.”

P는 나에게 제주도 사진을 몇 장 더 보여주었다. 나는 제주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게 정말 현실적인 선택일 것이니까. 그리고 어쨌든 P와 함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곳에도 가보고 싶었으니까. 그런 노래도 있지 않은가?

“떠나요. 둘이서 모든 것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

나도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에서 P와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어쩌지. 아직 할 일이 조금 있어.”

나는 그 일을 뭔지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어떤 시 때문이었다. 나는 P가 그 시 때문에 몇 날을 고민했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 시는 신동집 시인의 ‘오렌지’다.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할 수 없는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어쩐 일인지 P는 그 오렌지의 정체를 알고 싶어 했다. 나에게도 물었지만 P는 내가 제시한 대답들을 모두 무시했다.

“그런 게 아냐.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아마 지난밤에도 P는 그 시에 대한 고민으로 잠을 못 이루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 앞에 그렇게 우울하고 푸석한 얼굴로 앉았을 것이다.

“그렇지, 그게 있었지.”

P가 일어섰다. 그리고 잠시 후 냉장고 문이 열리는가 하더니 저렇게 내 눈 앞에 사과 하나를 가져다 놓았다.

“이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이것만 해결하고 가자. 제주도.”

그러더니 P는 오늘 하루를 저 사과와 눈싸움을 했다. 그리고 저렇게 내 눈 앞에 저 몹쓸 사과를 놓아둔 채 어디론가 나가 버렸다.

갑자기 진저리가 쳐졌다. 혹시 P도 G처럼 사과에 빠지는 게 아닐까? 아니 어쩌면 저 사과나 오렌지 같은 것들은 이른바 예술가들을 중독하는 힘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럼, 어쩌지? 나는, 내 사랑은 또 그렇게 아파야 하는 것일까? 나는 어떻게 해야 될까? 그래! P가 오기 전에 저걸 먹어 버리자. 그러면 다시 저 사과 때문에 내가 힘들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와 함께 떠나는 거야.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로.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눈을 딱 감고 사과를 한 입 베물었다. 이게 내가 먹는 마지막 사과 이리라. 그렇게 생각했지만 정말 힘들었다. 아직도 몸속에서 자라고 있는 사과나무가 온통 붉은색을 내뿜으며 나를 물들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편해졌다. 이제부턴 그를 사과나 오렌지에게 빼앗기지 않아도 될 거야. 그때였다. P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사과가 어디로 갔지?”

P가 돌아온 것이다. P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곳저곳을 살폈다. 당연히 없지. 내가 먹었는 걸. 잠시 후 P는 이상하다는 듯이 내 앞에 앉았다. 그리고 나를 자세히 살폈다.

“설마?”

P는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 전에 본 적 없는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P는 무서운 얼굴을 하며 나의 눈을 닫아 버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를 접은 것이다. P는 아마 나의 얼굴, 아니 모니터에서 한 입 먹다만 상태로 떠 있는 그 사과를 보았을 것이다. P는 플러그마저 뽑으려고 했다. 안 돼! 그러면 안 돼! 그러면 아직 저장하지 않은 너의 언어들이, 사랑의 말들이, 제주도 사진들이 사라진단 말이야. 너는 내 몸에 배터리도 끼우지 않았잖아? 그렇게 배터리도 없이 플러그를 뽑아 버리면 새로 부팅할 때까지 난 그냥 죽은 거나 마찬가지란 말이야.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그래서 사과를 먹은 거야. 하지만 나의 이런 외침은 너에게 들리지 않겠지. 아아! 사랑하는 P, 제발 부탁이야. 플러그를 뽑으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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