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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쭌쭌이 Dec 29. 2020

헬로, 런던!

탈도 많았지만 그만큼 재미도 있었던 절친과의 런던 여행기

유럽 여행을 가게 되면 며칠에 한 번은 다른 도시로 이동하듯이, 그날도 나랑 내 친구에겐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날이었다. 사실 평소 여행 가는 일정과 조금 다르다고 해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 귀찮다는 듯 짐을 챙기고, 원래는 너무 늦게 일어나 먹을까 말까 한 호텔 조식도 먹고, 로비에 가서 키를 돌려주고 역까지 가기 위해 우버가 근처에 있나 찾아보고. 달라진 게 있다면 그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이 옆에서 봐도 그저 전형적인 여행객의 행동으로 생각할 그런 일과에 불과했다. 그래서 우리도 처음에는 크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우리를 포함해 다른 수많은 승객도 태운 유로스타는 부드럽게 파리를 떠나 런던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유로스타에 사람이 많은 만큼 제각각 이동하는 목적지와 그곳을 향한 이유도 다 다를 터였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만 들어본 런던을 구경해 보기 위해 유로스타를 탔고, 그만큼 우리는 어느 정도 이번 여행을 많이 기대하고 있는 편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런던 근처에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소재로 한 박물관이 있다고 해서 한 번 가 보고 싶었고, 친구는 게임 등을 통해 접한 런던의 고풍스러운 풍경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 했다. 유명한 세계 도시이기도 하니까 그것만으로도 갈 이유가 충분했다. 그런 생각들을 한 채 우리는 평온히 런던행 유로스타에 탑승했다.


문제는 우리가 런던에 도착하기도 전에 일어났다.


“야 쭌아 우리 런던 가는 김에 뮤지컬도 하나 보자.”


뮤지컬에도 관심이 있는 친구는 선뜻 이런 제안을 했다. 나도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런던에 가면 재미있고 유명한 뮤지컬을 많이 볼 수 있고, 계속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관광지만 돌아다니다 오면 너무 지루할 것이 뻔했다. 게다가 뮤지컬 티켓값은 조금 비싸긴 하지만, 한 번 보고 나면 또 그 이상의 표 값을 하는 것도 뮤지컬이다. 그래서 내가 흔쾌히 좋다고 말하자마자 친구는 서둘러 오페라의 유령 티켓 두 장을 결제했다. 드디어 영화로만 본 오페라의 유령을 실시간으로 대극장에서 보는구나. 그것도 전망이 좋은 자리에서. 친구만큼 벌써부터 뮤지컬을 볼 생각에 들뜬 나는 속으로 실실 웃고 있었다.


런던에서 유로스타가 도착하는 역인 세인트 판크라스 역 근처.


이런 생각을 하며 런던에 도착할 때까지 남은 시간 동안 잠깐 쉬려고 했다. 하지만 결제창에서 나온 친구 얼굴이 살짝 어두워 보였다. 무슨 일이지. 뭔가 오류가 났다. 친구는 내 머릿속 질문을 꿰뚫어 보았는지 뭐가 문제인지 대충 암시를 했다.


“우리 런던에서 벨기에 가는 날 언제야?”


“8월 XX일. 근데 왜?”


“…XX일 밤 뮤지컬 티켓 두 장을 예매한 거 같아.”


“…?”


나도 솔직히 친구가 처음 그 말을 했을 때는 믿을 수 없었다. 취소나 변경이 쉽게 안 될 텐데 어떡하지? 나는 말없이 친구를 지켜볼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해야 친구를 위로할 수 있을지도 몰랐고, 어떻게 해야 이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윽고 유로스타는 런던 세인트 판크라스 역에 도착했고, 우리는 계속 말없이 기차에서 내려 점심을 먹을 곳을 바쁘게 찾았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양이 다소 많은 햄버거를 먹으면서도 우리는 말을 거의 안 했다. 친구는 계속 해결책이 없나 검색을 했고, 나도 조금이나마 친구를 돕기 위해 뮤지컬 티켓 양도 글을 SNS에 올렸다.


하지만 런던 여행을 가면서 생긴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선은 런던에 도착한 날 점심을 먹고 배가 가스가 차오른 듯 아프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지나치게 뭔가 많이 먹은 게 문제가 됐는지, 아니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상태에서 기름진 햄버거를 먹은 게 문제가 됐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배가 지나치게 불편할 정도로 아팠다는 점이고, 그게 4박 5일의 런던 여행 내내 영향을 많이 줬다. 배가 아파서 고급스러운 애프터눈 티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고, 같이 식당을 갈 때도 배가 계속 찌를 듯이 아파서 친구가 맛있는 음식을 먹는 동안 나는 옆에서 구경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런던이라는 금강산에서 밥을 제대로 못 먹어서 결국 그것이 풍경 관람에도 영향을 많이 줬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행이 끝나갈 무렵 같이 갔던 친구는 중간에 지갑을 한 번 잃어버렸다. 타지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다고 생각한 우리들은 지갑을 찾느라 우왕좌왕했고, 온갖 부정적인 시나리오를 다 상상해 봤다. 중요한 신용카드 영원히 못 쓰게 되면 어떡해? 지갑 속에 들어 있을 수도 있는 신분증은? 지갑에 미리 다 넣어뒀던 현금은? 게다가 런던 여행을 하는 동안 비도 많이 쏟아져서 사진이 예쁘게 나온 게 많이 없었다. 런던을 떠나 다음 여행지인 벨기에 브뤼셀로 가려고 한 런던에서의 마지막 날에는 자신이 우리가 부른 우버 운전사라며 자기 차에 태우려고 하는 수상쩍은 사람도 만났고, 호텔에서도 늦게 나오고 교통체증도 있어서 세인트 판크라스 역에 너무 늦게 도착해서 우리가 원래 타기로 예정한 유로스타를 못 탔다.


우리가 런던을 갔을 때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 많았다. 


뮤지컬도 잘못 예약하고, 나도 배가 아팠고, 친구도 지갑을 잃어버리고. 설상가상으로 런던을 떠나려 한 날까지 수상해 보이는 사람도 만나고, 역에 늦게 도착해서 기차도 놓치다니. 이 사실들만 놓고 본다면 우리 머릿속에 런던이 안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는 게 정상일 터였다. 하지만 나는 몇 달 후 다시 혼자서 런던 여행을 갔고, 그때 여행을 같이 갔던 친구는 내가 다시 혼자서 여행을 갈 때는 같이 런던으로 못 가는 상황이어서 많이 부러워했다. 우린 대체 왜 런던에서 온갖 안 좋은 일만 겪었으면서 다시 런던으로 가고 싶어 했을까?


런던 여행을 가는 동안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부분의 문제는 금방 해결이 되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못 예매한 뮤지컬 표도 담당 직원에게 정중히 이메일을 보냈더니 수수료는 좀 들었지만 새로운 날짜로 다시 예약을 해 주었고, 친구가 잃어버렸던 지갑도 대영도서관에 다시 전화를 해 보니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우리를 역까지 태워 주겠다 하던 수상해 보이는 사람도 결국 안 따라가니까 별 일 없이 잘 지나갔고, 유로스타도 우리처럼 제시간에 못 와서 놓치는 사람들이 많은지 직원에게 우리 상황을 설명하니까 바로 벨기에로 가는 다름 표를 끊어 주셨다.


친구와 같이 봤던 오페라의 유령 개막 전 무대. 힘들게 재예약을 했던만큼 더 재미가 있었다!


이처럼 당장은 커 보이는 문제일지라도 사실은 간단히 해결되는 일이 우리 주변에는 많다. 무엇보다도 아무리 런던에서 안 좋은 일들이 많았다 하더라도 그 부정적인 기억들이 친구와 있었던 좋은 기억들까지 다 지워 버릴 수는 없다. 지금도 핸드폰 사진첩을 꺼내서 보면 친구와 함께 쌓아 올린 추억이 생생하다. 로알드 달 박물관을 가면서는 어렸을 때 읽은 책들을 떠올리면서 다시 한번 동심에 젖을 수 있었고, 약하게 추적거리는 비를 맞으며 런던의 유명한 공원들을 거닐 때는 런던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었다. 옥스퍼드 스트리트와 코벤트 가든 등의 유명한 쇼핑가를 둘러볼 때는 많이 쇼핑을 하지 않더라도 잠깐이나마 우리가 부자가 된듯한 환상에 빠질 수 있었다. 게다가 뮤지컬은 힘들게 재예매를 한 만큼 더 재미있게 관람을 할 수 있었고, 배우들의 연기에도 더 크게 몰입을 할 수 있었다.


지금도 내 폰을 가끔 들여다보면 핸드폰 AI가 ‘추억 속 사진’이라며 친구와 함께 런던에 가서 찍었던 사진들을 자동으로 띄워준다. 그 사진들을 보면 나는 무의식적으로 피식하고 한 번 웃는다. 사진들을 보면 얼렁뚱땅 해결되었던 사건사고들도 생각나지만, 결국에 기억이 미화되어서 즐거웠던 기억들이 더 많이 떠올라서 그런 것일까. 뭐가 되었든 친구와의 여행은 이제 좋은 추억이고, 그땐 안 좋았던 기억들은 지금은 삶의 활력소를 주는 웃음거리가 됐을 뿐이다. 오늘도 내 핸드폰은 위젯에 자동으로 런던 길거리 사진을 띄워주고, 그걸 보는 나는 그때 그 기억들을 되살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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