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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 민 DAW MIN Jan 31. 2023

 #21긴 머리의 어머니가 떠날 때

미얀마 호코 커피농장





2021년 2월 1일 미얀마에 또다시 쿠데타가 일어났다.


모든 공항은 폐쇄되었고 인터넷은 되다 안 되다를 반복하고 있고 중간중간 현지 직원들과 짧은 통화만 간신히 연결되었다.


고산마을 호코 농장의 직원들은 여전히 체리를 따고 있었다.


농장이 있는 곳은  깊은 미얀마 샨주의 시골 고산지대이지만 이곳은 NLD당을 열렬히 지지하는 편이며 초등학교 앞에 당사무실이 있어서 도 아웅산 수찌  여사도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는 지역이다. 


미얀마의 가정이나 가게 같은 곳을 방문해 보면 벽에는 도 아웅산 수찌 여사와 여사의 아버지인 아웅산 장군의 사진이 사진이 걸린 곳이 많다.


 군부가 모든 당사무실을 압수 수색하고 폐쇄한다고 했는데 마을 또한 술렁거릴 것이다.

이 와중에 농장 책임자인 저민의 어머니는 급하게 병원으로 실려왔다.


저민은 양곤의 4층 병실 창문에서 시위대의 동영상을 찍어 보내주었다. 

그리고 사경을 헤매고 계신 어머니의 동영상도 보내왔다. 


코로나에 병원 의사는 출근을 하지 않고 군부의 통제로 시내에 접근하려면 통행증을 받아야 하며 2명 이상 함께 다닐 수 없다고 한다. 저민은 울부짖고 있었다. 시위대도 울부짖고 있었다.


“”엄마 엄마”” 하고 부르는 저민의 목소리와 시위대의 목소리는 뒤섞여서 가슴이 찢어질 거 같았다.


휴대폰 영상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저민의 어머니를 보며 어린 시절 한국이 오버랩된다.


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되기 전 한국의 의료사정도 매우 열악했다.


아픈 사람들은 병원에 가보지 못하고 약국에서 처방도 없이 마이신 즉 항생제를 사서 먹고 약사들은 약을 조제해서 팔았다. 


약사들이 하얗고 얇은 정사각종이에  가루약이나 알약을 넣어서 사각의 귀퉁이를 접어 약국봉투에 넣어 약을 주었다. 


진단도 없이 먹는 약이 잘 들으면 그 약국은 성공을 하게 되고 약국은 점점 확장하게 된다.

 서울 종로 5가에는 전문 약국골목이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니 한국사람들이 얼마나 약에 의존하게 됐을지 자명한 일이다.


쉽게 고칠 수 있는 병도 키우고 키워서 손을 쓰지도 못할 정도로 악화되는 일은 허다했을 것이다.


미얀마는 예전의 한국과  비슷한 사정이다. 한 번은 직원이 이가 아프다고 해서 사무실에 혼자 있던 나는 따라가 봤다. 정부병원이었는데 창밖에서 보니 이를 치료하기 위한 주사기 핀셋 등이 들어있는 트레이를 이 진료실 저 진료실로 들고 다니는 남자가 있다.


 그런 물품이 부족해서 이 방에서 다 쓰면 저 방으로 날라다 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치료를 받아보지도 못하고 2월 7일 저민의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저민은 수화기 너머에서 하염없이 흐느낀다.

나도 전화기를 붙들고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얼마나 안타깝고 슬픈 죽음인지 너무 애통했다.


얼굴이 하얗고 예뻤던 저민의 어머니는 아주 미인형의 버마족이었다.

어느 날 내가 갔더니 귤을 사서 하나하나 떼어 접시에 담아내고 수줍게 보시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코로나로 병원 진료가 어려워지고 쿠데타로 도로는 폐쇄되고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를 떼메어 이 병원 저 병원 옮겨 다니며 저민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갔을 것이다.


한국에 있는 내게 문자로 어머니의 병세를 물어보면 나는 해줄 말이 없다. 내가 의사도 아닌데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나와 요한도 마음이  무겁고 아팠다.


디스크파열.

한국 같으면 수술로 금방 치료할 수 있는 병으로 돌아가시게 했다는 것이 자식인 저민의 입장에서는 죄인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가족들의 배웅을 받는 어머니의 모습은 편안해 보였다.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소녀같이 누워계신 저민의 어머니. 

생전에 입으시던 옷 그대로 화장장으로 모셔드린다. 


코로나로 인해 환자가 속출하면서 일일이 관을 쓰지 못하고 얇은 망사덮개로 시신을 덮고 화장장으로 향한다.


장남인 저민만이 고인을 따라 배웅한다.


생전에 병원에서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간신히 진통제만 맞던 어머니가 증세가 심해지셔서 너무 아프다고 하면 저민도 힘들어 참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그럼 죽어라 죽어 “”하고 소리쳤던 적도 있었노라, 저민은 울며 말했다.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저민은 자신이 어머니에게 쏟아낸 모진 말로 몹시 힘들어했다. 조금만 더 참을 걸 너무 후회가 된다고 한다.


그리고 몇 개월 후 저민은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 어머니를 위해 기도했다.

단기출가에 들어가는 미얀마 청년들의 모습


미얀마의 남자들은 10살 전후에 신쀼라는 출가의식을 행해야 한다. 그리고 평생을 살면서 몇 번씩 단기출가도 할 수 있고 부처의 가르침대로 승려가 되는 일은 그들에게 아주 자랑스러우며 축하할 일이다. 

석가모니의 아들이 출가를 하게 되는 데서 비롯된 의식으로 미얀마의 남자들은 신쀼를 통해 비로소 어른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는 의미도 담겨있다. 그리고 평생을 살면서 언제든지 단기출가를 할 수 있다. 


저민은 차라리 죽어버리라고 한 자신의 부끄러움과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머리를 깎았다.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편안한 모습으로 눈을 감은 저민의 어머니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아픔이 없는 곳에서 편히 계시다가 건강하고 행복한 모습으로 거듭 사시기를 나도 기도드린다. 

절로 들어간 저민과 출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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