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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MPRE May 26. 2023

[에세이] 불멸주의

"성인들은 보통 죽음에 관한 생각을 멈추고 일상적인 걱정거리로 주의를 돌린다. 연구에 따르면, 죽음을 떠올린 뒤에는 성인들 역시 '걱정은 그만하고 행복하자'는 생각에 집중하려고 한다. 음식이나 사치품에 관심을돌리는 것은 죽음에 관한 생각에 대응하는 매우 흔한 방법이다. '점심먹고 쇼핑하러 가자!'

때로 어린아이들은 영원히 어린이로 머무르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죽는 사람은 노인들뿐이야. 난 늙지 않았어. 언제까지나 어린이일 수 있다면 난 죽지 않을 거야.'"

 - 셸던 솔로몬 외, 《슬픈 불멸주의자》


 "일상적인 죽음을 향한 존재는 빠져 있는 존재로서 일종의 부단한 죽음 앞에서의 도피이다. 종말을 향한 존재는 바꾸어 해석하고 비본래적으로 이해하며 덮어 감추는 종말 앞에서의 회피라는 양태를 가지고 있다.

 각기 자신의 고유한 현존재는 현사실적으로 언제나 이미 죽고 있다는, 다시 말해서 그의 종말을 향한 존재 안에 있다는 이 현사실을, 현존재는 죽음을 일상적으로 남들에게나 일어나는 사망의 경우로 바꿈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은폐한다."

 -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하이데거 같은 사상가의 실존주의적 성찰은 대체로 유사한 흐름을 보인다.

1) 인간은 필연적으로 죽는다.

2) 그렇지만 자신의 죽음을 그대로 직시하면 무력함과 무의미함, 불안이나 좌절감을 느낀다.

3) 이런 부정적 감정을 벗어나기 위해 세속적인 향락과 즐거움, 바쁜 일과와 사람들 틈새로 도피한다.

4) 그렇지만 그런 삶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자신의 죽음을 직시하고 그 속에서 본래적 삶을 위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현대 실험심리학 연구가 이러한 실존주의적 성찰을 검증해주는 상황이 흥미롭다. 《슬픈 불멸주의자》에 나와 있는 연구를 보면, 죽음의 개념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는 나이만 되어도 어린 아이들은 누구나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고 공포와 무력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기분을 재빨리 떨쳐내기 위해 가벼운 놀이나 딴 생각으로 도피하려고 한다. 이것은 성인이 되어서도 아주 달라지지 않는데, 우리가 열심히 살고 사람들과 섞이고 대중문화를 향유하고 하는 것들도 어쩌면 일정 부분은 이런 도피의 연장일지 모른다. 키르케고르와 하이데거는 바로 이 부분을 일찍이 정확하게 성찰했고, 죽음 앞에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제안한다.


 실존주의가 서구 세계에서 종교의 위상이 추락할 무렵에 발흥한 것도 당연한 노릇이다. 종교는 '죽음 이후의 삶'을 끊임없이 이야기해왔고, 어떤 형태로든 인간의 불멸을 약속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상징적 불멸의 가능성이 '죽음 앞에서의 불안'이라는 인간의 본래적이고 필연적인 감정을 상당수 누그러뜨려 주었다. 그렇기에 종교와 사후세계라는 약속이 신뢰를 잃을 수록 실존주의적 고뇌는 더욱 강해진다.


 그렇지만 실존주의 철학 자체는 대안적인 해결책을 직접적으로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그저 자신의 죽음을 직시하고 그 속에서 주체적으로 결단할 용기를 가져라고 권고할 뿐이다. 때로는 키르케고르처럼 종교에 대한 신앙의 가치를 쇄신하고, 다시 한 번 종교에 귀의할 것을 권고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이 주제에 대해 마땅한 답이 없었기 때문에 이 후 철학의 주류 사조에서 의미있게 다루어지지 못했다. 영어권의 분석철학은 실존주의와 같은 개인체험 기반의 서술 방식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유럽철학의 이후 사조는 하이데거의 실존과 죽음에 대한 연구보다는 그의 근대성에 대한 비판에 더 자극을 받았다. 그 방향으로 계속 내달려서, 정량적이고 보편주의적인 근대 경험과학과 행정 제도에 도전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이것이 대륙철학의 한 경향으로 굳어지면서 종종 경험과학의 가치와 역할을 왜곡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예컨대 포스트모더니즘과 사회구성주의는 경험과학적 연구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면서 상대화하고 해체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반면 신유물론으로 라벨링된 학자들은 경험과학에 대한 물신주의적 기대를 보이면서 소극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실수를 우회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런 비판들은 원조격인 하이데거 또한 피할 수 없는 비판이다. 그렇지만 그의 발상이 후대 경험과학 연구를 통해 어느 정도 증명이 되고, 또 보완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슬픈 불멸주의자》를 보면, 어쩌면 하이데거가 멈춘 지점 이후의 논의들이 될만한 후보가 두 가지 보인다. 죽음을 앞두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지이되, 종교가 아닌 것. 상징적인 불멸성을 되찾을 수 있는 것.


 하나는 자손을 낳아 자신의 유전자를 대대손손 물려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기여하면서, 그 공동체의 결속감과 문화를 후세대에 영구적으로 물려주는 것이다. 첫번째 것은 어쩌면 누구나 직관적으로 이해할 법한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두번째 것은 꽤 흥미롭다. 공동체와 전통 문화, 유대감, 친족과의 친밀감에 대한 갈망은 단순히 나이들거나 외로운 사람들의 집착이 아니라 실존적 불안을 극복하려는 몸짓인 것이다.


 하이데거가 이런 대답에 긍정적으로 반응했을 것 같지 않지만, 사실 그의 후기 사상도 어느 정도 이런 정서가 보인다. 전통적이고 친자연적인 농촌 공동체에서 존재의 진리를 찾고자 했던 보수적인 복고주의의 형태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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