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번 연말과 연초를 한국에서 보내고 스페인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승무원과 언성을 높이는 일을 겪었다.
기내식을 먹은 후 양치를 하러 가려고 화장실로 이동 중 앞 쪽 화장실은 줄이 기니까 뒤쪽으로 가라는 안내를 받았고, 우리 구역 바로 뒤쪽은 화장실이 아니라 승무원들 정리 공간이라 그렇게 두 구역을 넘어 맨 뒤 쪽 화장실로 가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 좁은 복도에서 쓰레기를 수거하려 카트를 끌던 승무원과 마주쳤다.
나를 본 승무원은 다시 돌아가라는 말을 하길래 나는 그대로 돌아가 그 구역 맨 앞 줄에서 승무원이 볼 일을 보고 카트를 빼길 기다렸다.
그런데 그 승무원은 쓰레기 수거를 하다 말고 중간에 앉은 아기랑 놀아주기 시작했다. '잠깐이면 되겠지.' 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5분을 지났는데도 그 승무원은 자리를 뜰 생각이 없었고, 아기 부모랑도 오래 이야기하는 걸 보아 '지인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무튼, 자리를 뜰 생각이 없어 보이는 승무원을 보다가 아기와 놀아주고 승객과 수다를 떠느라 몸이 거의 좌석 쪽으로 붙은 바람에 카트를 살짝 밀면 내가 지나갈 수 있을 것 같길래 나는 다시 그녀에게 가서 잠깐 지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는 나를 공격적으로 쳐다보면서 다시 뒤로 가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결국 다시 후퇴했고, 승무원이 바로 카트를 빼서 오길래 화가 난 승무원을 두고 이렇게 가면 마음이 너무 불편할 것 같아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미안하다고, 오해라고, 아까 지나가려 했던 거 보지 않았냐고.
그랬더니 자기는 기다리는 줄 몰랐다는 말을 하는데 그녀의 목소리와 표정이 매우 공격적이라 나도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다. 그래서 똑같이 소리를 높여서 '앞에서 화장실 가려했더니 사람 많으니까 뒤로 가라길래 여기로 온 거라고, 나도 다른 대안이 없었다'라고 말하며 말다툼을 하게 된 거다.
그러자 그녀는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면서 '기내에 화장실이 6개나 있는데 왜 여기에 와서 그러냐'라고 말하는데 내 판단은 '아 여기까지. 내가 노력한다고 풀릴 오해가 아니었구나.'였다.
승무원 개인적으로 오늘 유난히 컨디션이 안 좋았는지, 내가 아시아인이라 선지, 내가 여자라서 인지, 그저 단지 오해인데 성격의 차이인 건지 이런 이유 따위도 생각할 겨를 없이 그녀의 비난조의 말투에 더 엮이지 말아야겠다는 우선순위가 확실해졌다.
그래서 나는 대화는 끝났다는 제스처와 얄미울 정도로 차분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Ok, Thank you."라고 말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나는 꽤나 다혈질이고 감정 기복이 심한 성격이다. 나를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그런가?' 싶을 수 있지만 어렸을 때 친언니랑 싸울 때마다 언니는 나에게 '왜 이렇게 애가 다혈질이냐, 이중인격자냐'라고 말해 나는 그런 성격을 억누르고 화가 없는 척, 화가 풀리는 데에는 일정 시간은 냉랭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관념 같은 게 생겼던 것 같다.
그렇게 살았던 내가 스페인에 와서 본 스페인 사람들은 어렸을 적의 나보다 더더욱 다혈질이었다. 하루에 길 가다가도 손을 올리며 고성으로 언쟁을 하는 사람은 꼭 보이고, 짝꿍 S도 부당한 일을 겪었을 땐 독침 같은 한 마디를 쏴야지만 그 자리를 뜰 때 자기 속이 편하다고 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들을 볼 때면 저렇게 화를 내면 얼마나 짜릿할까 싶어 도로 건너다가 운전매너 없는 사람과 마주치면 나도 한 번 시원하게 소리 지르면서 팔을 휘저어보고 싶다는 희한한 로망도 생겼을 정도다.
그렇게 점점 스페인 사람과 연애를 하고 해외생활이 길어지니 자연스레 나도 이제는 화를 낼 때는 불같이 내고, 와다다다 화가 난 이유를 다 말하고 나면 끝나버린 폭죽처럼 10초도 지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분위기를 회복시킨다.
글로만 읽으면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그 감정을 표현할 각자의 둘레가 일정하게 있고, 그 정도의 쏟아냄과 표출의 모습이 이해는 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그 모습 그대로 수용하는 느낌이랄까. 나는 스페인에서 겪는 이런 모습이 프랑스의 문화 똘레랑스, 즉 관용으로 보인다.
하지만 관용의 선을 넘는다? 자기의 감정을 표출하는 걸 넘어 상대를 비난하거나 그 감정의 해결을 상대에게 떠넘기는 언행을 하면 그 나쁜 기운에 엮이지 않도록 당장 Stop! 을 외쳐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스스로 감정을 회복할 능력이 없는 미숙함을 보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 정도의 선에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을 때 자리를 뜰 수 있는 나만의 표현법도 만들어야 하는 법,
그게 나에게는 차분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Okay, Thank you."라고 말하는 것이다.
승무원과 언쟁을 하고 화장실에서 분노의 양치질을 하면서 들었던 생각은 '내가 만약 화가 잔뜩 난 그녀가 카트를 비켜줬을 때 대꾸 없이 화장실로 갔으면 마음이 편했을까?'였다.
예전 같았으면 '굳이 얼굴 붉힐 일을 만들어 뭐 하나, 일이 더 커지느니 내가 참자.'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을 것 같다. 근데 그럴수록 내 속에 쌓이는 억울한 감정을 털어내는 데까지 꽤 오랜 시간과 노력이 걸린다는 걸 깨달았고, 특히 해외에 살기 시작하면서 내가 겪은 부당함을 표현하지 않으면 외국어에 대한 좌절감과 더불어 제2의 화살이 나에게 돌아온다는 묵직한 경험들을 하고 나니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다.
그녀가 나에게 비난조로 말했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언성을 높여야 했지만 그녀가 오해한 것이라면 풀고 싶었고, 그냥 그 정도의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내가 마음 불편해할 필요가 없구나.' 하고 마음이 가뿐해졌다. 게다가 한국어로도 모르는 사람과 싸운 적은 없는데 영어로 해내고 나니 '앞으로 여기서 부당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걱정과 두려움 하나를 떨치고 가는 기분이었달까.
그렇게 양치를 하고 돌아와 자리에 앉아 다음 기내식이 나올 때까지 약 8시간을 편안하게 통잠을 잤다!!!
비행기에서 이렇게 편하게 잠을 자본 건 난생처음인 듯...
나는 내 다혈질과 감정 기복이 마냥 문제점이고 고쳐야 한다고만 생각하고 살았는데, 갑자기 화가 날 때 그걸 표출하보고 각자의 선을 조정하다 보니, 다른 사람의 감정도 어디까지가 내가 노력할 수 있는 선인지가 명확해지는 것 같다.
그리고 사실 감정 기복이 심하다는 건 부정적 감정을 회복할 때는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신선한 아이디어도 얻으며 오히려 자신감 씨앗을 하나 심어주는 뿌듯한 경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