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이 되어 좋았던 것 중 하나는 내가 읽고 싶은 분야의 책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는 거였다.
수능을 준비하고 학업 때문에 읽었던 지루한 고전, 현대 소설과 지식과 정보 습득을 위한 비문학 지문이 아닌 사람 사는 이야기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소설보다는 에세이, 그리고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터뷰 같은 책들을 좋아했다.
20살 도서관이던 카페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런 책을 읽으며 흥미를 느끼면서도 조금 아쉬웠던 부분이라면, 아… 내용은 정말 좋은데... 필사를 해도, 아무리 마음에 꾹꾹 눌러 담고 싶어도 이건 남의 이야기라는 거였다.
책의 내용을 머리로 입력하는 것보다 정말 온전히 체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나는 20대 초중반에는 좋았던 책 부분을 매번 사진 찍어두고
친구가 힘든 일이 있거나 위로가 필요할 때면
곰곰이 듣고 생각하다가도 위로가 되는 책 내용을 보내주곤 했다.
왜냐면? 나한텐 그런 상황에서 야말로 글로 적혀진 이 아름다운 내용을 체득할 기회니까!
그런데 이건 정말 자기만족인 건지
내가 보낸 책 내용에 응답하는 친구는 없었다.
몇 번 반복되는 현상에 이러한 위로 방식은
내 관점에서만 고집한 위로 법이었을 뿐, 상대에겐 와닿지 않은 글일 수도 있구나
싶어서 이런 방식은 스스로 과했다고 인정하고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다.
요즘 찬찬히 읽고 있는 책이 있다.
짝꿍이 회사 도서관에서 6월에 빌려온 책인데, 짝꿍은 여름에 휴가지에서 다 읽었고
나도 관심 있는 분야라 천천히 읽고 있다.
지금까지 중반까지 읽었는데 앞부분 흥미롭게 읽다가
4챕터쯤부터 잘 안 읽히기 시작해서 살짝 거리를 두었는데 토요일에 또다시 찬찬히 읽다 보니 너무너무 좋은 거다!
요즘 내 기준에 좋은 책이란 내가 경험한 것들을 책을 통해 돌아보고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책이다.
20살 초반엔 '나도 이 책의 내용을 체득하고 싶다...!' 였다면
지금은 책을 읽으며 이런 부분 저런 부분을 내 경험에 빗대어보고 대입해 보고
그렇게 읽다 보면 책의 내용이 저절로 소화되는 기분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챕터 별로 읽을 때마다 잠시 멈춰서 내 현재 마음가짐도 돌아보고
지금 막혀있다고 느꼈던 부분을 건들기도 하고, 그래서 막힌 부분에서 나아갈 방향도 생각해 보게 하는 등
정리되는 것들이 많아서 곱씹으면서 생각 기록을 하고 싶어지게 하는 책이다.
책을 읽으며 깨달은 바가 많아 뿌듯하고 활기찬 하루를 보내고
저녁이 되어 출장 간 짝꿍과 통화를 했다.
출장지에서의 업무가 꽤 고단했는지
짝꿍은 울상이 되어 힘들었던 고충을 토로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실망과 더불어
마지막이 될 다음날 어떤 태도로 마무리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들.
외롭고 고독한 날을 보낸 것에 공감되기도 하고 짠하기도 해서
그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준 후 짝꿍도 나에게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물었다.
나는 당연히 책 이야기를 꺼냈고, 짝꿍도 마침 최근에 읽은 책이라
우리는 공통된 관심사로 책 이야기를, 책을 통한 우리 각자의 이야기를 마음껏 나눴다.
"그 부분 기억나? Joy라는 챕터였는데, 비유가 너무 웃기더라.
한 여자가 호랑이에 쫓기다가 절벽에 다다랐는데 절벽 아래에도 호랑이가, 옆에도 호랑이가 있더래.
그런데 절벽을 붙잡고 있던 절체절명의 순간 코앞에 딸기 열매가 있었다는 거야.
그래서 그 딸기를 먹는 순간, 딸기가 너무 맛있어서 딸기 맛에만 온전히 빠져 즐거워했다는 그 비유,
그게 우리네 인생이라는 거지."
라고 말하는 나를 보며 빈틈없이 리액션 하며 기억난다고 말하는 짝꿍과
딸기를 먹는 장면을 설명하니 진짜 찰떡같은 비유라며 같이 우하하 웃으며
짝꿍은 기분이 꽤 풀린듯했다.
"그러니 내일 마지막 날이니까 그 호랑이들 사이에서 딸기가 어디 있나... 잘 찾아봐!"라고 말하니
짝꿍은 책 내용을 공유해 줘서 고맙다며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짝꿍과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 나한텐 맛있는 딸기를 음미하는 순간이었다.
언제나 책의 내용을 내 경험을 통해 체득하고 싶었던 나,
그리고 그런 순간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던 소망,
그리고 자기 경험에 빗대어 받아주며 감상을 공유하는 사람.
잘 보이고 싶고 사랑받고 싶지만 그 이면에는 거절에 대한 두려움으로 딱딱해진 방어막 너머
숨겨놓은 연약한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신뢰가 연인의 필요조건이라면,
나에게만 보이는 그 사람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방식은 커플마다 천차만별일 것이다.
나랑 짝꿍은 내적 성장과 성숙이라는 공통된 관심사를 바탕으로
서로를 보듬어주는 방식으로써
비슷한 부류의 책과 취미를 공유하며
거기서 깨달은 바와 느낀 바에 대해 대화하며 즐거움이 통한다.
오늘 즐거운 통화를 마치고
나에겐 이런 종류의 뿌듯함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서로를 운명이라고 느낀 강력한 충분조건이 아니었나...
생각하며 우리만의 유니크함을 돌아보다보니
어느새 내 주변은 호랑이밭이 아닌 딸기밭이 된 것마냥 달콤한 잠에 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