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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나 Jul 11. 2022

조금은 이른 여름휴가 이야기 - 4

분황사와 경주박물관

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9시쯤 되었나. 게스트하우스에서 조식을 주니 8시 30분까지 먹으러 오라고 했는데 시간을 놓쳐 빈속으로 샤워를 하고 가벼운 옷을 입은 채 숙소를 나섰다. 자전거를 한 대 빌려 가장 먼저 근처에 있는 분황사로 향하는데, 아직 오전이지만 태양이 너무 뜨거워 살이 전부 탈 것 같은 날씨였다. 10여 년 전 경주에 방문했을 때가 자연스럽게 생각났는데, 그렇게 두렵지는 않았다. 이미 경주가 많이 더울 거라는 얘기를 듣고 만반의 준비를 했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에 카페가 하나 있어,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빈속이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을 샀다. 근처는 황룡사 터가 있어 멀리서 보면 허허벌판에 꽤 웃자란 풀과 들꽃만이 가득했다. 자전거를 근처에 세워두고 분황사에 도착했다. 입구에서부터 스님이 불경을 외우는 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교과서에서 그렇게 자주 봤던, 현존하는 신라의 석탑 중 가장 오래되었다는 모전석탑이 시야를 가득 채웠고 기단의 네 모서리에는 각각 두 마리의 물개상과 두 마리의 사자 상이 서있었다. 한때 의젓한 자태를 뽐냈을 이 석상들은 오랜 세월 같은 자리를 지키면서 일부가 떨어져 나가거나 닳아 사라져 있었고, 탑 역시도 상단부는 소실되어 3층까지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정교하고 위엄 있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낮은 탑이라 묵직한 안정감이 느껴졌고 얼굴이 닳아 형태를 분간하기 어려운 물개와 사자들에게는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초파일이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인지, 혹은 방문하는 관광객을 환영하기 위해서인지 탑 부근에는 화려한 색깔의 연등이 주륵 걸려있었다. 탑의 각 면을 살피기 위해 주변을 두어 바퀴 빙빙 돌면서, 고전소설과 설화가 생각나기도 했다. 예전에는 이렇게 탑을 돌면서 젊은 연인들이 자연스럽게 만나기도 했다던데. 늦은 밤, 초파일 즈음의 봄기운, 사찰의 정취를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분황사 구석 그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천천히 비우고, 다시 황룡사지를 지났다. 근처에 건물이 없을뿐더러, 멀리 있는 것들도 전부 2~3층 정도의 높이라 넓은 시야에 파란 하늘과 푸른 산세가 가득 찼다. 지나는 길 곳곳에는 문화재 발굴터가 있어 인부들이 땅을 파며 살피고 있었다. 이렇게나 문화재가 많은데 또 나올 게 있구나 싶기도 하고, 또 저 속에서 어떤 것이 나와 세상을 놀라게 할까 기대하며 괜히 발굴터의 사진을 찍었다.




다음 행선지인 경주박물관으로 자전거를 끌고 걸어가고 있었는데, 친구 M에게서 연락이 왔다. 요청인즉슨 본인의 회사에서 스페인어로 광고 영상을 제작했는데, 틀린 부분이 없는지 한번 봐줄 수 있겠냐는 거였다. 스페인어를 취미로 조금씩 공부하고는 있다만, 문법의 옳고 그름이 아닌 뉘앙스의 차이까지 알 수 있는 실력은 절대 아니었기 때문에 잠시 멈추어 서서 주저하고 있었다.


그때, 앞서 걸어가는 커플이 어딘가 익숙한 언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잠시 생각했다. ‘나에게 여행 중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건 불쾌한 경험이 될까? -  아니, 오히려 재밌을 것 같아!’ 답을 내림과 동시에 그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 말을 걸었다. “Perdón, ustedes habalan español?(실례지만, 당신들은 스페인어를 하시나요?)” 그들은 내쪽으로 다가오며 대답을 했다. “Sí, somos de España. (네, 우린 스페인에서 왔어요.)” 그다음부터는 엉망진창 스페인어 + 영어 + 한국어 + 만국 공통어인 바디랭귀지로 상황을 설명하고 문제의 광고 영상을 보여줬다. 그 커플은 어색한 표현을 짚어내며, 어떤 게 더 나은 표현일지도 같이 고민해줬다. 함께 번역 검수(?) 과정을 마친 뒤, 인사를 건넸다. “Muchas gracías, ¡me encanta España!(정말 고마워, 나 스페인 진짜 좋아해!)”


결과적으로 내 일은 아니었지만, 나로서도 원어민과 오랜만에 그것도 꽤 오랫동안 얘기해볼 수 있어 신이 났다. 나는 가끔 지금의 회사에서 일하는 경험이, 좋든 싫든 간에, 내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날도 그런 순간 중 하나였다. 해야 하는/하고 싶은 일이 있고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고민은 최대한 짧게 하고 생각한 바를 빠르게 실행으로 옮겨보는 게 더 얻는 게 많다. 물론 ‘얻은 게 더 많다'는 것은 지금까지 해온 짧은 경험에 한해서이고, 더 가진 게 많아지고 책임이 많은 자리를 갖게 되면 쉽지 않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박물관에서는 ‘경주'답게 참 많은 신라의 보물들을 관람할 수 있었으나,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얼굴무늬 수막새와 에밀레 종 체험관이었다. 수막새의 미소가 따뜻하고 정겨워서 보자마자 나도 피식 웃음이 났고, 이제 타종이 중단된 에밀레 종(성덕대왕신종)은 녹음된 음성으로나마 그 소리를 접해볼 수 있었다. 정말 에밀레-에밀레- 소리가 들리는지 유심히 귀를 기울였는데, 그보다는 길고 깊은 여음이 인상적이었다. 만물이 아직 잠에서 깨어나기 전 어두운 시간, 사찰에서부터 잔잔히 번져나갈 종의 소리, ‘절이 별처럼 많고 탑이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었'을 옛 경주를 상상해보면 왜 그것이 특히 더 아름답다고 하는지 잘 이해하게 된다.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러 들어간 카페에서는 사장님이 ‘여행할 때는 과일이 먹고 싶더라'며 각종 과일을 담아내어 주시고, 잠깐 탄 택시에서는 기사님이 ‘혼자 하는 여행이라니, 가장 부러운 여행’이라며 본인의 여행 철학을 얘기하는 도시. 일상 중에도 잠깐 고개를 돌려보면 천년이라는 시간이 지금의 나와 함께 머물러 있음을 깨닫게 되는 공간. 그렇게 위대했을 누군가의 무덤을 동산 삼아 산책을 하고 낮잠을 자고 책을 읽을 수 있는 곳.

늦지 않은 가을에 또 경주에 와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다시 자전거를 타고 세차게 달렸다. 나무에 붙어있는 초록 잎사귀들이 공기의 움직임에 따라 저들끼리 속삭이는 듯 부딪히는 듯 분주한 탓에, 달리는 길 위로 빛과 그늘이 번갈아가며 들었다. 초여름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넘어가고 있는 유월의 어느 날, 열심히 페달을 밟는 종아리 곁으로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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