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후의 여행 Oct 15. 2022

장기 여행자들의 블랙홀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

멕시코

어린 시절, 10시간을 넘게 버스를 타고 달려갈 만큼 큰 땅덩어리를 동경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그곳에서 트럭을 모는 것이 꿈이었다. 멕시코시티에서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까지 버스로 15시간이 걸린다. 내가 모는 트럭은 아니지만, 긴장된다. 창원에서 버스로 15시간을 달려가면 어디에 도착할까? 통일이 되어야 가능하다는 생각에 씁쓸해진다.


출발까지 2시간이 남았다. 창가에 배낭을 쌓아놓고 창에 기대 서 있다, 이내 바닥에 앉는다. 우리 셋은 가방을 지키며 어딘가에 있을 배낭 도둑을 경계하고,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유괴범으로부터 아이를 지키기 위해, 아이가 어디를 가든 한 명이 같이 움직인다. 보이지 않는 적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느라 우리는 점점 지쳐가고 있다.

아이는 ‘고미(딸의 애착 인형 이름. 북극곰 인형)’와 놀고 있다. 버스터미널 밖에서 기다리던 멕시코 여자 아이 한 명이 터미널 안에 있는 딸아이를 향해 오더니 자신이 안고 있던 펭귄 인형을 보여주며 환하게 웃는다. 어릴 때 보던 TV 드라마 ‘천사들의 합창’에 나오던 아이가 생각난다. ‘천사들의 합창’이 멕시코 드라마였어!

터미널 창을 사이에 두고, 두 아이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손짓 발짓을 하며 놀기 시작한다. 갑자기 창밖의 아이가 자신의 펭귄 인형을 유리창에 갖다 댄다. 딸아이의 그다음 행동이 궁금하다. 딸아이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고미’를 창밖의 펭귄 인형에게 갖다 댄다. 고미와 펭귄이 입을 맞추고, 아이들은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사랑스러운 아이들!’ 무표정한 어른들이 득실거리는 무채색의 세상을 무지개 색으로 칠하며, 환하게 웃고 있는 아기 천사들이다.



밤을 달리는 버스 속에서 자다 깨다를 반복한다. 빗소리에 뒤척이다 다시 잠이 든다. 나의 다리에 누워 자는 아이가 깊은 잠을 방해한다.

아침 6시다. 왼쪽 창으로 황금빛 테두리를 두른 하얀빛이 들어온다. 안개로 시야가 좁다. 버스는 도로 갓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스쳐 지나간다. 밤새 걸어온 걸까, 이제 걷기 시작한 걸까?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이하 산 크리스토발)는 멕시코 치아파스 주의 산악지대에 있는 도시이다. 해발 2,110m의 고산지대라고 하는데, 고도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

산 크리스토발은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곳인지 모른 채 막연한 기대감으로 선택한 곳이다. 산 크리스토발에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글들과 다른 여행지에서 만난 여행자들이 하나같이 ‘산 크리스토발’을 추천하는 이유와 더불어 ‘여행자들의 블랙홀’이라는 별명이 중력처럼 우리를 끌어당겼다. ‘산 크리스토발’의 중력이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인지, ‘블랙홀’이란 별명처럼 빛까지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지 궁금하다

산 크리스토발의 한인민박 ‘미까사 뚜까사(Mi Casa tu Casa:내 집이 너의 집:너의 집처럼 지내라)’에 짐을 풀고 각자의 시간을 즐긴다. 15시간의 버스 여행으로 피곤할 법 한데, 민박집 이름 덕분인지 몸도 마음도 편하다. 이곳은 내 집이니 짐도 아이도 지킬 필요가 없다.

더없이 평온한 순간인 데, 느닷없이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15시간을 달려오던 그 밤이 엄마 기일이었다. 자식새끼 아무 소용없다더니......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온 남편은 산 크리스토발이 마음에 드나 보다. 걸어서 다녀도 될 정도로 작은 마을이고 밤에 돌아다녀도 안전하다며 저녁 외출을 제안한다. 여행 전부터 들었던 멕시코에 대한 흉흉한 소문 때문에 자유로운 저녁 외출은 생각지도 않은 터라, 반가운 마음에 길을 나선다.

민박집에서 소깔로 광장으로 가는 길은 시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시골에서 자연스럽게 카페와 레스토랑이 있는 작은 도시로 바뀐다. 가끔씩 사람들이 오가기는 하나 해가 져 어두운 거리는 휑하다. ‘너무 늦게 나왔나?’

소깔로 광장으로 들어서자 시야가 확 트이며 광장의 사람들이 한눈에 훅 덤비듯 들어온다. 마치 서프라이즈 파티처럼 캄캄한 무대에 갑자기 불이 켜지며 어딘가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온 듯하다. 광장 곳곳에 원주민들이 노점을 펼치고 있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니는 원주민 아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여행자들은 원주민들과 조화를 이루며 유명 여행지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환호성 소리를 따라가 보니 한 무리의 멕시코 젊은이들이 브레이크 댄스를 추고 있다. 광장 주변의 레스토랑과 카페에는 사람이 넘쳐나고 야외 테이블도 빈자리가 없다. 무료 와이파이가 있는 스**스는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밤이 살아 움직인다.


이곳에 온 여행자들은 스페인어와 살사를 배우고, 원데이 쿠킹 클래스에서 전통 요리를 배운다. 다른 곳에 비해 저렴한 수강료가 이들을 붙잡고 있다. ‘미까사 뚜까사’에도 스페인어를 배우기 위해 장기 체류하는 학생들이 있다. 그중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여학생도 있다. 친구가 그리운 딸아이는 한국 언니들을 만나니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 딸아이는 산 크리스토발보다 ‘미까사 뚜까사’에 있는 언니들에게 푹 빠졌다. 외출을 하자는 말에 시큰둥하다.



산 크리스토발의 전망을 볼 수 있다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발품을 팔아야 한다. 전망대로 오르는 계단이 까마득하다. 날씨가 선선해 긴 옷을 입고 나왔는데, 햇볕은 따갑고 날씨가 덥다. 그늘을 따라 걷는데, 딸아이가 햇볕 쪽으로 걷는다.

“햇볕이 따가워, 그늘 쪽으로 걸어.”

“엄마 햇볕 쪽은 뜨거워서 빨리 걷게 돼. 난 빨리 올라가서 쉴 거야!”

어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이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할 것이라는 착각은 어디서 오는 걸까?





아이와 남편은 광장으로 나가고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무료 와이파이가 되는 카페에서 그동안 그려놓은 그림에 채색을 한다. 5살, 6살 정도 되어 보이는 원주민 여자 아이 두 명이 팔찌, 열쇠고리 등 수공예품을 팔기 위해 카페에 들어온다. 아이들은 팔찌를 팔라고 내미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두 명의 아이를 찾아온 두 명의 여자아이도 그림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앞에서부터 그림을 보여주자 나와 눈을 맞추며 환하게 웃는다. ‘타코’ 먹는 그림을 보더니 반가워하며 ‘타코’라고 이야기한다. 아이들은 나에게 팔찌를 팔 생각은 하지 않고 신기한 듯 본다. 왠지 짠해진다. 색연필로 마음껏 그림을 그리며 놀 시기에 여행자를 상대로 팔찌를 팔러 다니는 아이들, 이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각자만의 생활방식이 있고 문화가 다르니 나의 눈으로 좋고 싫음을 판단해서도 안 되고, 섣부른 동정심이 오히려 상처가 될 것 같기도 하다.

마침 카페에 들어온 딸아이는 말없이 나와 조금 떨어져 앉으며 조용히 있다. 소깔로 광장에서 솜사탕을 파는 또래를 본 딸아이가 말이 없어지며 어색한 표정을 짓던 것이 생각난다. 삶의 다양성을 책으로만 배웠던 딸아이와 나는 지금 성장 중인가 보다.


산 크리스토발은 유명한 볼거리가 없다. 꼭 가야 할 곳도 없다. 특별할 것 하나도 없는 이 마을이 왜 ‘여행자들의 블랙홀’일까.

타 지역에 비해 저렴한 체류비용? 여자 혼자 다녀도 될 정도로 안전한 치안? 스페인어, 살사 등 이곳의 문화를 즐기고 배울 수 있는 용이한 접근성? 더불어 저렴한 수강료? 다양한 먹거리?

물론 이 이유들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저렴한 비용으로 배낭여행을 하는 여행자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이야기다.

이런 맥락에서 산 크리스토발은 ‘여행자들의 블랙홀’이라는 별명보다 ‘장기 여행자들의 블랙홀’이라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일 듯하다. 여행이 좋아 떠나왔지만 힘든 것은 힘든 거다. 여행에 지친 여행자들은 쉬고 싶다. 어디서든 쉴 수 있지만, 가야 하고 볼 것이 많은 곳에서는 그런 것들이 숙제처럼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은 그런 숙제가 없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이다.  

여행을 시작한 지 20여 일 정도 된 우리에게 산 크리스토발은 ‘블랙홀’까지는 아니다. 아마 100일 정도 여행한 후 왔으면 우리도 산 크리스토발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갔을 것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나의 속마음은 이곳에 더 머무르고 싶기 때문이다. 아이는 나의 속마음을 대신해 이곳에 더 있고 싶다며 계속 이야기한다. 아이를 끌어당기는 중력은 쉬고 싶다는 ‘휴식’이 아니라, 같이 놀고 싶은 ‘친구’인 것이다.

어쩌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블랙홀’은 ‘욕망’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산 크리스토발은 여행에 지친 여행자들의 ‘여행을 즐기면서 쉬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미까사 뚜까사’를 나서며 민주는 계속 이야기한다. “엄마, 우리 여기 또 오자. 또 올 거지? 응응?”

우리를 끌어당기는 블랙홀은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태평양과 대서양의 물이 하나 되는 감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