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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스피커 Jan 01. 2022

2022도 여전히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힘겨운 싸움을 하는 모든이에게

"힘겨운 싸움을 하는 모두에게 친절하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그저 바라보면 된다"                                             영화 원더(wonder) 중에서


2022.1.1. 아직 밤과 새벽이 서로 인사를 채 끝내지 못한 어둠의 시간이다. 나는 거실로 걸어 나와 내가 좋아하는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았다. 브런치의 작가의 서랍을 들여다보았다. 새해 첫날의 의식을 '글쓰기'로 정한 나는 거짓말쟁이가 되고 싶지 않아  이내 고요함 속에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작가의 서랍 속에는 쓰다가 만 글들이 쪼르르 나열되어있고 어떤 것은 제목만 있는 것도 있었다. 22년 첫날의 나는 지금 어떤 글로 나와 소통하고 세상과 말하고 싶은가. 나는 나의 마음속 서랍 하나를 끄응 끄집어 당겼다.


작년에 나는 '따뜻한 스피커'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강의 현장에서, sns에서, 브런치에서 그리고 '나만의 오디오, 나디오'의 오디오 작가가 되어서도 나의 정체성은 따뜻한 스피커였다.

따뜻한 스피커는 먼저 나의 가슴에 울림이 있는 진심의 말을 전하고 타인의 마음에도 감동을 주는 말을 하는 스피치 코치인 나의 페르소나다.

나의 이 두 번째 이름을 말하는 순간 나는 따뜻하고 친절하고 깊은 공감의 말을 건네는 유니버스의 또 다른 나처럼 살게 된다. 기분이 별로냐고? 불친절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내가 전하는 톡의 글들 메시지 그리고 했던 말들까지 언제나 다시 복기하며 돌아보게 된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말하지 않고 상대가 정말 듣기를 원하는 필요를 느끼는 말들을 세밀하게 찾아서 하게 된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진심으로 내가 돕고 싶어 하고 함께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진다. 삶의 한절, 메시지의 한 절로라도 말이다. 그러면 사탕발림 같은 이야기일 수밖에 없냐고? 그렇지 않다.


나는 따뜻한 스피커라는 페르소나로 살면서 언어 감수성 사회 감수성 그리고 관계의 감수성을 훈련하고 기르게 되었다. 얼마 전 신문기사에서 본 한 국어국문학 교수의 글이 생각난다.


'독의 언어를 약의 언어로 바꾸는, 언어 감수성 높여야 사회 진화'

누군가의 언어는 그의 자화상이고, 한 사회의 언어는 그 사회의 빛과 어둠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한 개인과 사회가 지닌 언어 감수성은 중요하다. 왜냐면 언어 감수성은 독의 언어를 약의 언어로 바꾸어서이고, 우리 사회의 수준이 높아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본질적으로 상대를 향한다. 내가 아니라 상대에게 어떻게 들릴까 가 중요하다. 인권. 성 인지 감수성처럼 이젠 언어 감수성에 주목해야 할 시대다.  경향신문 2021.12.29


초기에는 내가 나의 브랜드가 될 이름을 잘 정한 건지 이것이 나의 페르소나가 맞는지 가끔 근심이 되기도 했다.

'아 이름 따라 살면 살 되게 어렵겠구먼.'


 하지만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다~ 어울리는 사람이다라는 피드백들을 듣는 횟수가 늘고, 점점 그런 내가 나도 마음에 들기 시작하면서  '따뜻한 스피커'로 사는것에 진심이 되어갔다.

내가 말을 하면 얼었던 분위기도 녹고, 어색했던 사이도 친밀해지며 평범하기 그지없는 식당에 앉아있어도 5성급 호텔식당에 함께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그런 존재 말이다.


물론 만난다. 간혹 그렇게 도저히 할 수 없게하는 어려운 상대를. (종종 아니 자주 그것은 가족이며 가장 친한 이들이 거기에 속한다) 그럴 때 나는 나의 한계를 다시 들여다보고 인정하면서 바로 나에게 따뜻해지기위해 방향을 역으로 바꾼다. 본질은 같다. 타인이 아니라 나에게 더 친절하게 군다는 말인것이다.

"그럴 수 있어. 모두에게 친절할 수는 없어.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에게까지 친절하면 안 돼. 그때는 거리를 두어서 너를 숨 쉬게 해. 카페 창가에 앉아서 공부하다가 가끔 내려다보는 거리를 보듯 하면서 시간을 좀 벌도록 해. 잘하고 있는 거야"


나는 사람의 선의를 믿는다. 언어는 습관이라 어릴 적부터 자기도 모르게 뵌 대로 툭툭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저의가 늘 의심스러운 사람을 만나지만 그래도 믿는다. 본심의 선의를.

믿음은 힘이 세다.믿음대로 사람들은 반응해주는 존재였다.


친절하다. 따뜻하다. 나는 이런 단어들에 열광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나의 결핍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나는 자식을 사랑하지만 무례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 감성이 여렸던 나는 내방 문을 함부로 열듯이 나의 마음을 벌컥벌컥 마음대로 헤집고 찬물을 끼얹는 모진 말들을 하는 부모님이 힘들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자녀에게 안 그래야지. 물어봐야지. 마음이 어떤지 물어봐야지. 그리고 힘들었겠다고 말해줘야지.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에게 지금의 마음이 어떤지 물어봐주고 그 사람의 마음의 자리에서 들어주는 것이 공감이다. 아는가? 동의가 안된다고 공감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항상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마음. 그것이 내가 가지고 싶고 훈련하고 싶은 마음이다. 귀찮고 힘들게 왜 그렇게 하냐고.  그것은 바로 내가 그런 대접을 받고 싶어서가 아닐까. 내가 백사람쯤에게 그러면 한 사람쯤은 내게도 진심으로 공감해주오래가는 사람 한명쯤은 나오겠지 라는 가련한 또는 지극한 마음. 물론 그것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익히 여러 번의 실패를 통해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말이다.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 연민과 기대는 습성이 있는 예전의 나로 사는 것보다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을 페르소나로 만들고 치열하게 살아오고 있는 지금의 내가 일단 행복해졌기 때문이다. 내가 성숙해졌다. 강을 하나 건너 쉴만한 물가로 인도받은 느낌이 든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진심을 다하고 친절하게 대하면서 결국 나를 돌봐왔던 것이다.   


만약 옳음과 친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친절을 택하라!
누구나 살면서 한 번은 기립박수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세상을 극복하니까.


원서로도 영화로도 유명한 원더(wonder)에 나오는 말이다. 나는 올 한 해도 여전히 친절함을 선택할 것이다. 나는 사람의 선의와 양심을 믿는다. 알수없는 상황에서 그 이유를 생각해야 할 때 가장 좋은 쪽을 선택할 것이다. 그것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각자의 인생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모두에게 친절할 충분한 이유이다.




오디오작가 따뜻한스피커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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