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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글 Sep 29. 2020

<보건교사 안은영>

세상의 모든 안은영들에게

(스포일러)


<보건교사 안은영>은 하나의 우화다. 여기서 모든 요소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 상징들은 자연스럽게 내게 오늘날 내가 사는 사회를 떠올리게 했다. 사건이 일어나는 공간, 그리고 그 속에서 생활하는 이이 던지는 대사와 행동들은 내가 일상에서 마주치곤 하는 여러 순간들을 떠올리게 했다.



이 드라마에서 ‘학교’라는 공간은 여러 구체적인 상징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 스스로 목숨을 내던진 터에 세워진, 오늘날엔 여러 다툼과 사건사고가 일어나기도 하지만 겉으로는 공부도 잘하는 번듯한 학교. 이는 내가 현재 살아가는 ‘한국’라는 공간으로 읽힌다. 오늘날 한국에는 겉으로 번듯한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압지석으로 억압된 과거의 욕망들이 많다. 이 억압된 욕망들은 완전히 봉인될 순 없는 것이어서, 종종 감춰진 지하실에서 나와 사람들을 광기로 몰아가기도 한다.



출처: Netflix

고등학교 보건교사인 은영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그가 보는 젤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재된, 하지만 아무나 보지는 못하는 무의식적 욕망이다. 남들에겐 평화롭게 느껴지는 순간들도 어둡고 불편한 면을 예민하게 보고 느끼는 은영의 감각에는 괴기하게 인지될 뿐이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은영은 ‘귀신을 보는’, 유별난 사람이다.



한문교사 홍인표는 ‘특별하다.’ 할아버지가 세우신 학교를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면서도 할아버지의 과거에 갇혀있진 않다. 그는 혐오와 고통, 슬픔의 무의식을 상징하는 젤리를 직접 보지는 못하지만, 그것들을 보고 제거하려는 은영을 믿고 지지해준다. 그는 학교의 과거와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젤리의 존재를 무시하지도 않고, 그들에게서 영향을 받지도 않는, 올곧고 무해한 사람이다.



은영은 인표와 ‘손을 잡을’ 때 큰 힘을 얻는다. 이 ‘손잡음’은 젤리를 물리칠 때뿐 아니라, 지친 상태를 회복할 때도 효과적이다. 힘과 위안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이 행위는 ‘손을 잡는다’는 관용적 표현처럼 ‘함께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은영은 그를 믿어주는 사람과 함께할 때 더 강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출처: Netflix

극 중 등장하는 혜민, 강선, 정현은 모두 은영이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계기들이다. 혜민은 은영의 현재, 강선은 은영의 과거, 그리고 정현은 은영이 혹여나 같아질까 두려운 미래의 모습이다. 옴잡이 혜민은 수백, 수천 년간 자신에게 씌워져 있던 의무의 굴레를 고백한다. 평생 20대로 살아보고 싶은 평범한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의무에 자발적으로 묶여 사는 혜민을 통해 은영은 자신에게 씌워진 의무를 되돌아본다. 아무리 은영이 인표를 포함한 주변 인물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젤리 퇴치는 꼭 수행되어야 하는 온전한 은영 본인의 일이며, 남들처럼 살고 싶은 소망을 제한하는 벽과 같은 일이다. 은영은 혜민과 자신의 현재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느낀다.



혜민에 이어 등장한 강선은 은영에게 장난감 칼을 들고 젤리들과 싸우는 모습을 그려준, 은영 자기 자신이다. 은영의 내면에서 스스로를 스스로보다 더 강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은영 자신의 무의식이자 지금의 은영을 만들어준 내적 동기다. 은영은 강선을 통해 과거 자신에게 능동성과 의무감이 부여되던 순간을 되돌아본다.



정현은 오늘과 내일이, 엄마가 무엇인지도 구분되지 않는 텅 빈 존재다. 의미는 구분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내일과 오늘의 경계가 있기 때문에 오늘은 그 자체로 오늘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정현은 무엇인가. 자신도 자신을 구분할 수 없기에 의미가 부여될 수 없는, 매일 먹던 꼬깔콘을 먹으며 그저 그 자리에 있기만 하는 텅 빈 존재는 아닐까. 은영은 정현에게서 매일 똑같은 일을 하지만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세상의 기준으로는 구분될 수 없는 이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 나갔을 때의 미래의 자신을 보았을 수도 있다.



결국 은영은 과거에 부여된 자신의 의지 자체인 강선이 공중으로 산산이 흩어져 사라지는 것은 막지 못한다. 아니, 안타까워하면서도 실은 스스로 놓아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날 밤 이후 은영은 남들과 같은,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이는 일종의 방어기제로도 읽힌다. 소위 말하는 번아웃이다.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한 과도한 책임감, 그리고 혜민과 정현으로 본 자신 존재에 대한 허무함과 불안감이 은영 스스로 의지를 놓아버리는 일로 이어진 것이다. 번아웃된 은영이 손을 놓은 학교는 다시 욕망에 지배당하기 시작한다. 누군가 불편함을 보고 지적해주지 않는 사회에서 동성애와 장애는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출처: Netflix

사실 불편한 일은 보지 않으면 그만이다. 무시해버리면 편하게, 남들처럼 살 수 있을 터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불편함을 무시하는 것보다 누군가가 홀로 그 불편함과 싸우는 일을 그저 지켜만 보는 일이 더 어렵다. 은영이 그렇다. 학생들이 아파하는 모습을 뉴스로 확인한 은영은 결국 인표와 다시 ‘손을 잡고’, 학교를 무너뜨리기로 한다. 학교에서 중요한 건 학교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은영이 스스로 압지석을 여는 장면은 은영 안의 의지가 과거에 부여된 강선의 모습이 아닌, 온전한 자신의 모습으로 되살아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정현과 같은 경계가 흐린 모습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마주한 의지의 경계가 지어진 모습이다. 강선을 넘어섬으로 은영은 비로소 온전한 자신이 된다. 이는 오디세이아 같은 ‘고난을 이겨내고 결국엔 온전한 자신을 찾는’ 귀향 서사의 과정으로도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엔 약간의 변주가 가해지는데, 이는 “피할 수 없으면 당해야지”로 상징되는 부정적인 긍정, 수동적인 능동이다.



은영의 내면뿐 아니라, 압지석을 여는 행위 자체도 상징성이 크다. 모든 사회적 문제의 해결은 그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인종 차별, 성 차별 등과 같은 문제에서 차별의 존재와 그에 따른 권력 관계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은영과 인표는 지금껏 억눌려 왔던 욕망을 배출함으로써, 있는 것을 ‘있다’고 선언한다. 학교 지하 깊은 곳에 엄연히 존재했지만 지금껏 없는 것으로 취급됐던 불편함은 억제에서 풀려나 학교를 상당 부분 무너뜨린다. 이 무너짐은 ‘피해’라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인표는 이를 학교가 재건될 수 있는 기회로 본다. 이미 서 있는 걸 다시 세울 수 없듯이, 무언가를 다시 세우려면 어느 정도의 무너짐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출처: Netflix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엔 혐오, 고통, 슬픔이 만연하다. 이는 끊임없이 재생산돼, 결코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어 보인다. 이를 이용해 원하는 것을 취하려는 종교(안전한 행복)와 기업(일광소독)의 수작은 머리를 더 아프게 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피할 수 없으면 당해야지. 그렇다고 있는 것을 못 본 채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다치지 않고, ‘유쾌하게,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당하면, 조금은 덜 아플 것이다. 은영의 옆에는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힘을 주는 인표가 있고, 작지만 큰 꿈을 위해 용기를 내는 자신과 비슷한 혜민이 있다. 덕분에 은영은 피할 수 없어 당하지만 무너지지는 않는다.



이 드라마는 한국이라는 학교 속 안은영들에게 주는 위로이자 응원이 아닐까 싶다. 막연히 잘 될 거라는 무책임한 긍정보다 약간의 내려놓음이 더 위로가 되는, 어디 하나 믿을 곳 없지만 그 속에서 ‘살아감’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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