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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키비스트J Apr 20. 2024

일상과 아카이브

기록자와 아키비스트 1편

아카이브, 아키비스트, 불과 10년 전만 해도 '그게 뭐야?'란 질문이 먼저 떠올랐지만, 이제는 생소한 단어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전시에서는 아카이브 자료를 더해 작품이 갖는 배경과 맥락, 작가가 살아온 삶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페라가모, 샤넬, 루이뷔통과 같이 헤리티지가 오래 쌓인 브랜드는 자기 아카이브에서 재해석한 클래식 컬렉션을 매년 새로운 콘셉트로 내놓고 있습니다.


비단 명품 브랜드만의 일은 아닙니다. 지역과 마을마다 작은 아카이브가 만들어진 곳들이 많습니다. 이런 아카이브는 동네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발굴하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자료를 기증받고, 정리해서 저장해 두는 일을 많이 합니다. 문화예술가들도 작품에 얽힌 아카이브를 함께 구축할 때가 있습니다. 오래된 모티프를 바탕으로 작품활동을 하면서, 아카이브를 함께 정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카이브가 우리 사회와 일상 속 곳곳에 발견된다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아카이브는 우리의 흔적을 흩어지지 않게 잘 모아 정리해 두고 누군가가 볼 수 있도록 개방해 주는 공간입니다. 정보가 그 어느 시대보다 더 많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요즘, 맥락을 가진 기록들이 많아진다는 건 흩어진 데이터가 지식으로, 그리고 지혜로 이어지는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의지와 기획의도만 있다면 접근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된다는 말입니다.


출처: Language Log. 맥락이 없는 정보는 음모론이 되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기록하기'와 '아카이브'를 헷갈려하기도 합니다. 내 일러스트 그림파일을 폴더에 날짜별로 저장해 놓으면 '아카이브' 한 걸까요? '저장'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왜 우리는 아카이브 했다고 할까요? 여러 물건을 한 곳에 모으면 아카이브라고 할 수 있을까요? 컬렉션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모음이라는 단어는 영어가 아니라 촌스러울까요?


좀 궁금합니다. 아카이브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먼저, 아카이브라는 용어가 뭔지부터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카이브 원칙과 실천(Archives - Principles and Practices)에서는 역사적 가치 혹은 장기 보존의 가치를 지닌 기록이나 문서, 이를 수행하는 조직, 또는 이런 기록이나 문서를 보관하는 장소나 시설을 의미하는 경우라고 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아카이브는 1) 어떤 가치를 가진 자료이기도 하고, 2) 그런 자료를 관리하는 체계나 조직이기도 하고, 3) 그런 자료를 보존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아카이브가 하나의 명확한 개념이 아니기에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외래어를 그대로 가져온 것일 터입니다. Archive는 단수일 때는 자료의 묶음을 지칭하지만, Archive 여러 개가 모인 Archives는 그 자체로 거대한 서고, 즉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기록물, 기록은 위 의미에서 1번 만을 우리말로 번역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기록’이라는 용어는 너무나도 광범위해서 용도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달라지는 듯합니다. 하루동안 나에게 일어났던 일과 소회를 적은 일기장과 기네스북에 오른 ‘잠 오랫동안 안 자고 깨어있기 세계 신기록’은 같으면서도 다른 종류의 기록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맥락은 기록이 갖고 있는 가장 큰 힘입니다. 기록은 사진 한 장, 문건 하나로 의미를 갖기보다 여러 개가 모였을 때 의미를 얻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루 일상의 조각이 일기장에 모여 내 삶 속 서사를 그려냅니다. 80억 인구 중에서 1등을 가려내는 치열한 기록 다툼은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키기 충분합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지만 2등, 3등도 서사가 있다면 스타가 될 수 있습니다.


기록이 갖는 공통점은 바로 맥락입니다. 자료들에 맥락이 있다면, 즉 자료들을 설명하는 정보가 충분하다면 서사는 힘이 됩니다. 기록은 어느 순간 한 번에 모아 보여주는 기획이 아니라, 모든 노력과 일이 진행되면서 서서히 쌓이는 사진, 문서들, 점수, 포트폴리오, 작품, 깃허브의 커밋 그래프, 연구성과, 이력서가 말해주는 나만의 고유한 서사입니다.


이런 맥락은 자연스럽게 쌓여가기도 하지만, 아키비스트가 마련해 둔 메타데이터에 의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기도 합니다. 마치 일기장에 그날의 날씨나 내 기분을 적어두는 것처럼, 맥락은 자연스럽게 켜켜이 쌓인 정보입니다. 맥락이 없다는 건 마치 조각난 퍼즐 하나와도 같습니다. 의미 없어 보이는 흑백 필름 한 롤이 맥락 정보를 만나면, 누가 아나요?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뒤바꿀 대반전의 시작이 될지도.




<기록자와 아키비스트> 다음 편은

‘아키비스트와 기록가는 무엇을 달리 기록하나’로 시작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제5편. 아카이브의 공공성, 지속성, 경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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