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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경훈 Nov 30. 2019

응급실 일기

기뻐할 수 없는 성공


1.
어린 시절 추리 소설을 좋아했다. 물론 대단히 탐욕스런 독서광이라 환상소설, SF소설, 역사소설, 순수소설 심지어 무협지까지 가리지 않고 읽었으니 '추리 소설을 좋아했다'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나는 셜록 홈즈에 매혹되었다. 모리스 르블랑이 창조한 '괴도신사 아르센 루팡'도 시대 배경이 비슷하고 아가사 크리스티의 엘클 포와르 역시 추리 소설의 고전기를 대표하는 인물이나 그 둘에는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홈즈, 루팡 그리고 포와르 가운데 실질적으로 가장 유능하고 강력한 인물은 루팡이 틀림없고 단순히 '추리하는 능력'을 벗어나 이런 저런 사안까지 고려하면 포와르가 홈즈보다 훨씬 안정적이다. 그러나 루팡은 범죄자인 주제에 위선적으로 행동하는 인물로 느껴졌고 포와르는 홈즈보다 인격이 훌륭하고 안정적이나 덕분에 '전체에 속하지 않는 외계인 같은 매력'이 부족했다.

어쨌거나 추리 소설을 탐독하는 여느 아이처럼 탐정이 되어 복잡한 사건을 수사하고 거대한 악에 맞서는 나를 상상했는데 재미있게도 응급의학과 의사가 응급실에서 하는 일은 형사 혹은 탐정과 비슷하다. 탐정이 단서를 추적하고 주변 인물을 조사하여 사건의 상세한 사실을 규명하듯 의사는 증상을 확인하고 병력을 조사하며 검사를 시행해서 질환을 밝힌다. 탐정이 범죄자를 체포하여 추가적인 희생자를 방지하는 것처럼 의사도 적절한 치료를 통해 환자의 생명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탐정은 대부분 이미 일어난 사건을 수사하기에 살인과 도난을 되돌리기는 어렵다. 반면 의사는 진행되고 있는 질환을 규명하기에 앞으로 환자가 악화하여 장애를 입거나 사망하는 것을 막아야 해서 단순히 질환을 밝히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심지어 질환을 규명했고 필요한 조치를 신속하게 시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죽음 혹은 영구적 장애를 방지할 수 없을 때도 있다.

2.
중환자실(intensive care unit, 의료인 사이에서는 ICU란 약어를 많이 사용한다) 병상은 늘 부족하다. 계절적 요인에 따라 환자가 증가하는 부분-겨울에는 폐렴과 심뇌혈관질환 환자가 증가한다-도 있으나 중환자실 병상 숫자가 충분하지 않은 보다 근본적 문제가 있다. 중환자실 병상 숫자가 충분하지 않은 이유는 아무 병원에서나 무턱대고 운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공간을 마련하고 산소포화도와 심전도를 실시간으로 측정하는 장비, 인공호흡기, 제세동기 같은 장비를 구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중환자실에 최신 장비를 구비하고 중환자의학 전문의를 채용하는 것만으로는 중환자실을 운영할 수 없다. '인공호흡기 치료가 필요한 폐렴 환자'만 입원시키면 그런 식으로 운영할 수 있으나 그러면 중환자실이 아니라 '폐렴 병동'일 뿐이고 심지어 폐렴 환자에게도 위장관 출혈, 기흉, 심근경색, 급성 신부전, 뇌경색 같은 다양한 합병증이 동반할 수 있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중환자실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위장관 출혈, 기흉, 심근경색, 급성 신부전, 뇌경색, 뇌출혈 같은 다양한 질환에 대한 신속한 조치가 가능해야 한다. 소화기내과에서 응급 위내시경, 심장내과에서 심혈관 조영술, 신장내과에서 응급 혈액투석, 신경과 혹은 영상의학과에서 뇌혈관 조영술, 신경외과에서 응급 뇌수술이 가능해야 중환자실을 운영할 수 있다. 그러니 일정 규모 이상 병원만 가능하고 단순히 병원 규모가 큰 것에 그치지 않고 필요한 다양한 임상과가 있고 서로 유기적으로 협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라 대학병원에는 중환자실 입원이 필요하나 병상 부족으로 응급실에 머무르는 환자가 드물지 않다. 그러나 우리 병원처럼 정식 허가받은 중환자실은 있으나 응급실 규모가 크지 않은 경우에는 12시간 정도라면 모를까 응급실에 며칠씩 머무르며 치료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 병원은 중환자실 병상이 없으면 응급실에서 중환자를 진료하기 어렵다. 그런데 중환자실 병상이 없다고 응급실에 방문하는 중환자를 무턱대고 다른 곳으로 전원할 수도 없다.

"의식저하로 신고된 환자이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 맥박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현장에서 자동 제세동기를 부착하고 심폐소생술을 시작했고 6 사이클만에 심장 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지금 이송하고 있어 10분 내 도착합니다."

전화기 너머 119 구급대원의 목소리는 긴박했다. 종합하면 의식저하로 신고받았으나 현장 도착하니 심정지(cardiac arrest) 상태였고 1사이클이 2-3분임을 감안하면 대략 15분 정도 심폐소생술을 시행한 후 심장 박동을 회복했다는 정보였다. 심정지 원인은 다양하나 원인과 관계없이 중환자실 입원이 필요했는데 그날도 중환자실에는 여유 병상이 없었다. 그러나 '중환자실 병상이 없으니 다른 병원으로 가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심장 박동만 회복했을 뿐 여전히 불안정한 환자가 '중환자실 병상이 있는 병원'을 찾아 도로 위를 헤매다가 치료 시기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자 수용을 결정했고 잠시 후 환자를 태운 구급차가 응급실에 도착했다.

3.
예상대로 환자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심장 박동은 회복했으나 자발 호흡은 불규칙했고 완전히 확대된 동공은 빛을 비추어도 줄어들지 않았다. 덧붙여 응급실 침대로 옮기자 양쪽 팔이 뻣뻣해지며 손목이 어색하게 꺽이는 동작이 나타났다. 그런 동작은 이른바 피질제거 반사( decorticate reflex)로 심각한 뇌손상을 의미했다. 완전히 확대되어 빛을 비추어도 줄어들지 않는 동공 역시 심각한 뇌손상일 때 나타나서 환자에게 심각한 뇌손상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가능한 뇌손상의 원인은 대략 두 가지였다. 우선 뇌출혈을 고려해야 했다. 심한 뇌출혈로 심정지가 발생했고 뇌출혈이니 당연히 뇌손상이 있어 피질제거 반사가 확인되고 동공반사가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다음으로는 저산소성 뇌손상(hypoxic brain injury)을 감별해야 했다. 심정지 원인은 뇌출혈이 아니나 심정지 상태에 있을 동안 혈액이 공급되지 않아 산소가 부족해진 뇌가 손상입는 경우다.

원인이 무엇이든 일단 환자를 안정시켜야 했다. 119 구급대원이 삽입한 후두마스크(LMA, Laryngeal Mask Airway, 기관내삽관을 시행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임시로 사용하는 기도 확보 도구)를 제거하고 기관내삽관(endotracheal intubation)을 시행해서 인공호흡기를 연결했다. 혈압이 60/40으로 낮고 맥박수도 분당 50-55회로 느려 승압제(inotropic agent)로 도파민(dopamine) 투여를 시작했다.

그런 다음 두부 CT(Brain CT)를 촬영했다. 다행히 두부 CT에서 뇌출혈(brain hemorrhage)은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뇌출혈로 인한 심정지 가능성은 사라졌다. 동공 반사가 소실되고 피질제거 반사에 해당하는 동작이 관찰되는 이유는 저산소성 뇌손상(hypoxic brain injury)일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심정지 원인은 심장 문제가 유력했다. 패혈증 쇼크(septic shock)는 선행되는 감염이 있는데 환자는 이전에 발열, 오한, 근육통 같은 증상이 전혀 없었다. 저혈량성 쇼크(hypovolemic shock)는 심각한 출혈이 발생해야 하는데 외부 상처도 없고 토혈(hematemesis), 흑색벽(melena) 같은 증상도 없으며 대동맥 파열(aortic rupture) 같은 심각한 내부 출혈 가능성도 낮았다. 물론 심전도에는 서맥(bradycardia)이 있을 뿐 심각한 부정맥이나 ST분절 변화(심근경색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심전도 변화)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그것으로 심장 문제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심장내과 당직의사를 호출했다. 환자의 상황을 설명하고 심정지 원인으로 심장 문제를 감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장내과 당직의사는 '심장 문제는 아닐 것 같습니다'라고 다소 회의적으로 반응했으나 그래도 심혈관 조영술을 시행하기로 동의했다.

심혈관 조영술 결과 예상대로 심근 경색은 아니었다. 다만 심혈관 조영술 중 관상 동맥(coronary artery, 심장근육에 혈액을 공급하는 혈관)이 심각하게 수축하는 증상이 확인되었다. 혈관 확장제를 투여하자 수축은 즉시 사라졌으나 관상동맥 수축(coronary artery spasm)은 가볍게는 가슴이 뻐근하고 저린 증상을 일으키나 혈관이 아주 심하게 수축해서 빨리 해소되지 않으면 드물게 심정지를 일으킬 수도 있다.

결국 환자의 심정지 원인은 관상동맥 수축(coronary artery spasm)이었다. 환자의 상태는 좋아져서 승압제 투여를 중지하고도 정상 혈압이 유지되었다. 또 자발 호흡을 회복해서 기관내관은 유지해도 인공호흡기 연결은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피 엔딩'이라 말할 수는 없었다.

4.
고대부터 인간은 심장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잉카인은 살아있는 인간의 가슴을 갈라 여전히 뜨거운 피를 뿜어내는 심장을 신에게 바쳤고 오늘날에도 사냥꾼 사이에는 사냥한 동물의 심장을 먹는 풍습이 있다. 심장에 영혼이 깃든다고 믿기도 했는데 실제로 심장은 아주 중요한 장기다. 심장이 움직임을 멈추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어 오랫동안 '사망'은 '심장의 죽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의학이 발달하면서 뇌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심장이 문제없이 힘차게 박동해도 대뇌에 심각한 손상이 발생하면 이른바 '식물 인간'이라 부르는 상태에 빠진다. 또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 기능을 담당하는 뇌간(Brainstem)에 심각한 손상이 발생하면 심장을 비롯한 다른 장기가 멀쩡해도 생존할 수 없다. 이른바 뇌사(Brain death)라 부르는 상태에 해당하는데 사람들은 가끔 식물 인간과 뇌사를 착각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죽지도 살지도 않은 단계로 몇 개월, 몇 년을 지속하는 상태'는 식물 인간이다. 뇌간까지 손상받은 뇌사의 경우 인공호흡기를 연결해도 기껏 며칠 정도 생존할 뿐이고 아주 드문 경우에도 몇 달 이상 생존하기 어렵다.

그런데 심장과 비교했을 때 뇌는 더 취약하다. 심정지가 발생해도 단순히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것은 아주 어렵지는 않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어서 아무리 노력해도 심장 박동을 되돌릴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으나 5-10분 정도 심정지 상태에 있은 후에도 심폐소생술이 성공하는 사례가 종종 있다. 그러나 심장근육과 달리 뇌세포는 5분만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도 심각한 손상이 발생한다. 그래서 10분 이상 심정지 상태에 있던 환자의 심장 박동을 노력 끝에 가까스로 회복시켜도 최종적으로는 뇌사로 사망하거나 식물 인간이 되거나 운좋게 의식을 찾아도 심각한 인지 기능 장애 같은 후유증이 발생할 때가 많다.

안타깝게도 그날의 심정지 환자 역시 그런 사례에 해당했다. 탐정의 수사와 달리 의사의 진료는 원인 질환을 규명하여 그에 따른 적절한 조치를 신속하게 시행하고 그 모두 성공적으로 진행되어도 실질적 성공은 아닐 수 있음을 보여주는 씁쓸한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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