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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리 Aug 18. 2019

일본 제품은 안 사지만 일본말은 써야 한다는 와이프

6년 차 디자이너의 고충


우리는 두 달 전에 결혼을 했고, 한 달 전에 직장을 때려치웠다. 직장의 굴레에서 벗어난 신혼부부. 이보다 좋은 게 있을까. 우리는 알람 없이 일어나는 아침을 만끽했다. 평일엔 '주중 할인'과 '웨이팅 없는 맛집'과 '텅 빈 영화관'을 즐기고, 주말엔 집에서 맥주와 넷플릭스를 즐겼다. 이런 완벽한 백수의 삶.


그런데 얼마 전, 와이프가 사업시작했다.



아직 백수인 나는 6년 차 가방 디자이너이자 이제 사장님이 된 와이프와 함께 가방 제작 공장에 도착했다. 주차를 하고 조금 늦게 들어갔더니, 먼저 들어간 와이프가 공장 사장님과 한창 대화 중이었다.


"사장님, 가죽은 구찌아대피랑 마찌 모모, 소꼬에만 대려고 하거든요?"


'웟,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사실, 나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유니클로를 비롯한 많은 일본 제품을 구입하지 않던 와이프. 일본 제품 불매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던 나는 와이프 덕분에 알게 된 것도 많지만 솔직히 불편한 것 많았다.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안되고, 여긴 일본 회사고 저긴 지분 몇 %가 일본 꺼고. '노노재팬' 없었을 때부터 어디서 그런 걸 다 알았는지. 그런 와이프가 공장에만 가면 일본말 같은 것들을 쏟아냈다.


"사장님, 저는 간지가 이렇게 나오면 좋겠거든요?"

"그러려면 마찌에 다마를 넣어야 될 것 같은데?"

"흠, 다마를 안 넣고 아루지게 할 수는 없을까요?"

"다마가 없으면 구찌랑 마찌 만나는 부분 간지가 안 예쁠 거 같은데~."

"그럼 사장님, 다마 넣어주시고 소꼬랑 모모는 1차 샘플 때랑 똑같이 해 주세요~."

"그려~."



공장 미팅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운전을 하며 와이프에게 물었다.

 

"저... 일본분이세요? 불매 운동을 그렇게 열심히 하시는 분이. ㅋㅋㅋ"

"ㅋㅋㅋ 왜? 이상해?"


"아니, 뭐~ 내가 당구칠 때 쓰는 말 같은 건가??"

"비슷하지~. 내가 디자이너 일 시작한 게 6년 전이거든? 그때 제일 먼저 배운 게 이거야. 뜻은 잘 몰랐어도 듣자마자 일본말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반발심이 생겼었지."


"안 봐도 뻔하다. ㅋㅋ"

"막상 실무를 시작하니까 디자이너들이나 공장 직원들은  일본말 같은 걸 쓰더라고. 그거 보니 괜히 오기가 생기더라? 그때부터 나 혼자 그걸 한글이 영어로 바꿔서 썼어. 신입의 패기 같은 그런 거였지"


"혼자?"

", 예를 들어 구찌는 입구(top), 소꼬는 밑면(bottom), 간지는 형태감(style)으로 바꿔 썼는데 이거 말고도 엄청 많았어. 그리고 그때 당시엔 앞으로 계속 그렇게 쓸 거라고 다짐했었던 것 같아. 어려운 단어로 바꾼 것도 아니라서 업계 직원들도 금방 알아들을 것 같았거든."


"그래서 잘 썼어?"

"처음엔 당연히 잘 될 줄 알았거든? 근데 안되더라고. 이 업계에서는 40~50년 가까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용어들인데 그걸 나 혼자 다르게 쓰니까 별종 보듯 보는 건 기본이고, 실무에 계시는 공장 사장님들은 용어를 한 번에 못 알아들으셔서 계속 되묻다 결국 내가 일본말로 해석을 해줘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

다른 것보다 내가 이쪽 용어들을 잘 모르는 초짜인 줄 알고 다들 무시하니까 열은 열대로 받고, 일은 일대로 안되더라고. 내가 오기로 2년을 넘게 한 것 같은데, 이게 오랫동안 쌓여온 업계 전문용어 같은 거라 그런지 혼자 바꾸기가 참 힘들더라고. "






그랬다. 이 업계 전문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은 자주 부딪히는 공장 사장님들과의 원활한 의사소통 혹은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함이었고, 업계 어디에서나 '일 좀 해봤다는 표식'같은 것이었다.

누군가는 그 느낌이 제법 괜찮아서 썼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바꾸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꿔야 할지 몰라 답답했을 것이다. 또 남들이 벤또라길래 그저 벤또라고 부르던 그 시절 어르신들처럼 단어의 잘잘못을 따질 기회조차 없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공장 사장님도 디자이너도 신입도  일하다 보니 쓰고 있는, 어쩌다 보니 달라붙어 있는 그런 것이다. 심심하면 '노노재팬'에 들어가며 불매 리스트를 늘리고 있는 와이프조차 어쩔 수 없는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여전히 여기저기 많이도 묻어있는 일본의 때를 다 벗겨내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쓰메끼리, 땡땡이, 이빠이...' 일 생활이나 스포츠, 다른 업계에도 일본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 연일 불매 운동에 대한 기사가 올라오고 있는 요즘, 불매를 한다면 저마다 그 이유를 찾고 또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것이 조금 느리더라도 일본의 때를 더 확실히 벗겨낼 수 있지 않을까.  




용어의 일부는 일본어 사전에서 찾을 수 있었다.

 구찌(くち) = 입, 아가리.
 소꼬(そこ) = 밑, 바닥, 창
 간지(かんじ) = 느낌, 감각, 인상
 와리(わり) =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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