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하 Nov 19. 2022

젊은 날의 초상 1

글을 써 내려왔던 젊은 날의 초상

슬프거나 힘든 일이 있을  그렇지 않은 척하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다. 그렇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을 문제에 대해서 토로하고 있자니 듣는 누군가가 가여워 차마 입을  수가 없어졌다. 기쁠 때건 슬플 때건 생각나는 얼굴들이 있었는데,  기쁜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질투가 슬픈 일들이 듣기 힘든 푸념이  수도 있다는  알고 나서는 점점 제일 먼저 떠오르는 대상이 글이 되었다. 글은 내가 우는소리를 하든, 기쁜 일을 자랑을 하든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던 이야기는 나를 가장 잘 알 수밖에 없었던 나 자신에게 글을 통해 전했고, 고통을 쓰레기통처럼 쏟아내는 것이 아닌 표현에 감정을 싣고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렇게 하니 숨이 트이고 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게워내는 것들이 불순물에 불과하구나 하는 인식 대신에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거름망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자율감을 느꼈다.



표현을 사랑하는 이유도 그러했다. 듣기 싫은 말들을 자주 하는 사람보다는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고 궁금한 사람이 되고 싶었기에 그 표현들의 힘을 빌려 내게는 궁금함에 대한 타당성을 주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내게는 이래서 힘들어하고 자신의 고통과 연민에 갇혀 있는 게 아닌 고통을 관찰하고 있는 사람이 글을 쓰는 이었기에 그런 기록을 남기는 누군가를 동경했다. 또 자신의 고통이 아무렇지 않은 듯 들고서 타인의 고통을 안아줄 수 있는 다정한 이들에게 무한한 감동을 느꼈으며,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다짐했었다.



창작에서 오는 기쁨의 첫 번째 듣는 이가 나 자신이라 여겼고 거기서 뻗어나가 타자에게도 닿고 싶은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온기를 사랑하는 인간이었기에 사랑받고 싶었던 나는 주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글을 썼던 게 아닐까. 창작을 지속하며 앞서간 이들에게 배운 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지고 싶은 게 있다면 먼저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다정을 별것 아니라는 듯 건네는 누군가에게서 배웠던 고마운 삶의 진실이었다.



글을 쓰기 위한 책들을 읽으며 배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듣는 사람을 위해서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첫 번째 독자인 나를 위한 글이 무엇일까 생각을 해보니 나를 지지하는 응원의 말들, 지난날의 내게 필요한 조언의 말들이었다. 그 한 줌의 여유가 있는 배려의 말들은 실은 사랑에서 기반되었다는 걸 겪으며 느낄 수 있었다.



글을 쓰는 마음가짐의 기초가 되는 건 사랑이라는데, 내 글의 뿌리는 나의 삶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소한 것에서 달라졌다. 나를 위한 말을 남기고, 나를 위해 삶에서 발견하는 감사함을 기록하고, 앞으로의 내가 하면 행복함을 전해줄 것들을 계획하며 써 내려가다 보니 그 모든 것은 그저 문자로 남지 않고 내 삶이 되어주었다. 기록이 건네주는 삶은 그토록 갈망하던 풍성한 삶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사랑에는 부지런함이 수반된다.


(마치 엄마가 내게 그러했듯)


다음 날 새벽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하며 끼니를 거를 나를 위한 도시락을 챙겨두던 엄마의 마음처럼,


나는 딸을 챙기듯 나 자신에게 내일 네가 이걸 했으면 좋겠어하고 좋아하는 일들로 채워진 일정을 선물했다.


그러자 계획이 더 이상 내게 갚지 못한 부채처럼 느껴지지 않고 나를 사랑하기에 주는 선물처럼 느껴졌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생각보다 단순했다.



내가 변할 것이라고 믿는 것.


충분히 지금을 바꿀 힘이 있다고 믿는 것.


과거의 모습에 갇히게 두지 않을 것.


내가 터무니없는 실수를 해도 나를 미워하지는 않는 것.


행동 자체의 미움이 남을지라도 나 자신을 혐오하진 않는 것.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든 파편들을 밀어내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지난날엔 모난 조각 없는 내 모습을 감히 상상하고 실망하기를 반복하면서 그렇게 생을 살아가며 생겨난 흠집이 안타까워 마음을 쏟는데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조각은 전부가 될 수가 없는데 그 부분이 애틋하고 가여웠기에 그것이 전부인 것 마냥 끌어안고서 더 많은 걸 보지 못했다.



조각은 전부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나에게 존재하는 파편들을 그저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부터 출발했다. 그 모자란 모습조차 내가 퍽 좋아하는 모습 가운데 하나라는 걸 느끼게 되는 순간부터 진정 자신을 사랑하는 게 되는 것이 아닐까. 아직까지는 그리 마음에 들지 않은 모습들도 여전히 있지만 말이다. 코끼리 코를 만지면서 감히 코끼리를 상상하는 것과 같은 것은 파편의 편린에 불과했지 않나. 시간을 걸어가며 발견하는 파편들은 각기 다른 시간대의 나를 마주하고 발견하는 찰나였고, 그 찰나의 모습들이 모여 나를 이룬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고 나는 더 이상 그럴듯한 나의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이 좋아졌다. 그 과정에서 글도 마찬가지로 읽는 이로 하여금 요철이 느껴지지 않는 평온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지 않았을까. 더 나은 글을 쓰게 될 나의 내일이 궁금하고 기대된다. 그 기대감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 전해졌을 때 또한 기분 좋은 영향을 준다는 걸 몸소 경험하고서 글을 쓰는 게 더욱 즐거워졌다. 그 경험으로 인해 내일의 기대를 안고 살아가는 나의 이야기를 전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게 되었다.



내가 쓰는 글을 스스로 좋아하고 나서의 변화도 꽤 마음에 들었다. 듣고 싶은 이야기를 지닌 사람이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주기적으로 글을 찾아주는 이들 덕분에 글을 쓰고 있고, 글로 만난 인연들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면서 앞으로도 글을 쓰는 삶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부질없게 느껴졌던 기록의 파편들이 돌고 돌아 나를 대변해 준다는 그 문장이 그러했듯, 실은 누구보다도 짙은 의미를 겪고 살아가고 있었기에 나는 여전히 기록을 멈추지 않았던 지난날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2022.11.18 요철 없는 평온한 마음으로 쓰인 글들을 모아보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