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느낀 마음
감사한 마음이 잘 들지 않는다.
삶은 기본적으로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감사함은 잡히지 않는 흐릿하고 잡히지도 않는 신기루다.
오히려 걱정하고 신경 쓰던 일이 별일 없이 지나갈 때의 찰나, 휴. 하고 내쉬는 숨에서 느껴지는 안도감이 훨씬 명징하다.
긴장했던 어깨가 잠시 풀리고, 쭈뼛 섰던 머리카락이 다시 부드러워지고.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나서 물 한 컵을 시원하게 마실 수 있는, 결코 오래가지는 않는 그 느낌.
감사함은 그에 비하면 뜬구름 같은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피부로는 느껴질 수 없는 말로만 존재하는 감정.
그래서 나는 뭐든 충분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물컵의 반도 차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항상 생각해 왔다.
되지 못한 것, 하지 못하는 것,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의식하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이, 마치 오른쪽 골반이 틀어진 채로 비뚤게 걷는 내 걸음걸이처럼 바꾸고 싶어도 바꾸지 못하는 습관이 되어버렸다.
고치고 싶어도 고치려고 하면 팔다리가 삐걱대면서 마치 처음 걷는 사람처럼 우스꽝스러워진다.
긍정적인 마음을 장착하고 싶어도 어색하고 과장된 모습인 것 같아서, 다시 나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다.
감사함을 모르는, 충분함을 모르는 나. 하지만 공기처럼 익숙한 나.
그런데, 어제 먼저 잠든 남편 옆에 자려고 누웠는데,
서른하고 몇 년을 살면서 정말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지금, 충분하다고.
객관적으로 볼 때 내가 모든 걸 가진 건 절대 아니다.
머릿속 어딘가에 존재하는 상상 속의 충분한 사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남편의 거취는 아직도 불안정하고, 내 건강은 작년에 비해 완연하게 나빠졌다.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일기장에도 쓰지 못하는 일은 지금도 먼 친척처럼 이따금씩 나를 찾아와서 나를 감정의 바닥으로 기어코 끌어내려 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면서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충분하지 않은 나에게 처음으로 바꾸지 않아도 그 모습을 인정해 주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게
믿을 수 없이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
나는 물컵의 반도 못 채운 인간이 아니라, 나라는 모양의 물컵에 꽉 차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끔 하는 사람이 나의 배우자라는 것.
항상 허기진 채로 부족한 나를 채우기 위해 이것저것 욱여넣으며 체할 것 같은 마음으로 살아왔는데,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채워 넣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사람.
뭐든 해야 된다, 가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하지 않을 용기를 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이런 행운을 얻은 것에 비하면, 어쩌면 내가 지금 겪고 있거나 겪었던 아픔은 행운의 대가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렇게 감사함을 느낀 것도 찰나였다.
사람이 그렇게 쉽게 바뀌지는 않나 보다.
그래도 처음 느낀 “충분하다.”는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지금이 좋다는 생각, 감사하다는 마음을 조금 더 자주 느끼고 싶다.
비뚤지 않게, 똑바로 걸어가는 그 느낌은 어떤 걸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