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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영 Nov 20. 2022

MBTI 소리 좀 안 나게 하라

당신을 이해하고 싶지 않다는 선언

오랜만의 모임이라 들떠있었다. 예상치 못하게 직장을 그만두어 지쳐있던 나는 같은 직종에서 일하는 동기들을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생각에 설렜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한 지인이 MBTI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최근에 MBTI 자격증(?)을 땄다고 하면서 각자의 MBTI를 물어보더니, 모임에 온 동기들의 MBTI의 특성을 줄줄 읊었다.


나는 E가 외향형, I가 내향형이라는 것 외에, MBTI를 구성하는 다른 세 쌍의 지표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잘 모른다. 그래서 그가 16개의 유형을 그가 외우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드디어 그는 내 MBTI를 물었고, 내가 알고 있는 나의 MBTI인 OOOO(특정 MBTI에 대한 편견을 방지하기 위해 동그라미 처리함)를 이야기했다. 돌아온 그의 반응은 이랬다.


“어… 그렇구나(그의 안쓰러운 표정). 난 OOOO인 사람들 인생이 안타까워. 너무 힘들 거 같아. 매일 OOOO들은 집에 가서도 오늘 했던 말, 남이 한 말 곱씹잖아. 그렇게 살면 인생이 진짜 괴로울 것 같아. 정말 안타까워.”


‘저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내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떴지만, 거기서 뭐라고 한 마디를 덧붙이는 것도 이상한 것 같아 어영부영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그는 모임 참석자들의 배우자의 MBTI까지 물어보더니,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지인의 남편의 MBTI를 두고서 "그 MBTI가 보통 지능이 되게 낮아."라고 까지 이야기했다. 너무나도 불편했다.


MBTI라는 도구 자체는 흥미롭다.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을 파악하려는 욕구가 높지 않은가. 내가 나를 모른다는 말처럼, 우리는 스스로의 행동과 생각에 대해 의문이 들 때가 있다. 그렇게 하여 "MBTI 특징", "MBTI별 추천 직업", "MBTI별 궁합"과 같은 글과 영상을 보기도 한다. 정신과나 심리상담소를 방문해 돈과 시간을 투자하여 임상심리사 선생님들이 분석해주는 MMPI나 로르샤흐 검사를 거치는 것이 조금은 거창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럴 때 내 방 침대에 누워 나름(?) 정교해 보이는 16가지 유형으로 스스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보는 것은 자연스럽고 즐겁다. 내 키만큼 자란 나무를 보면 견주어 보고픈 그런 마음, 커다란 거울이 있으면 내 얼굴을 비춰 보고 싶은 자연스러운 마음이 우리가 MBTI라는 유형에 열광하게 된 계기이겠다.


게다가 MBTI는 타인의 성향을 빠르고 간단하게 파악할 때도 유용한 도구이다. 내가 알 수 없는 타인의 모습은 나에게는 미지의 세계이자 불안, 위험 요소이기에, 조금이라도 상대를 빠르고 쉽게 파악하고자 하는 것은 본능이다. 우리는 소개팅 자리에서 서로를 알기 위해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취미는 무엇인지, 쉴 때는 무엇을 하며 쉬는지, 어떤 노래를 듣는지를 물어보지 않는가. MBTI도 그중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MBTI 검사를 해 보지 않았다면 검사를 해보지 않았다는 그 자체로도 그 사람의 어떤 면모에 대해 알 수 있다.) 게다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의 어색함을 깨줄 수 있는 재미난 대화 소재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MBTI는 ‘상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과 있는지에 따라 똑같이 행동하는 사람은 없다. 특정 상황에서 나의 외향성이 더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이 사람만 있으면 내 목소리가 커져, 혹은 이 모임만 가면 차분하게 되는 경험을 떠올려보자. 친밀한 사람들과 있을 때에는 매우 충동적이다가도, 회사에서는 한없이 계획적인 (혹은 그 반대인) 것이 사람이다. 직관적으로 생각하여 결론을 내었다가도, 누구보다 논리적으로 그 직관적 결론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그런 멋지고 복잡한 존재가 인간이다.


게다가 '상태'라는 건 세월에 따라 달라진다. 20대의 내가 다르고 지금의 내가 다르다. 내가 인터넷에 떠도는 MBTI 검사를 해 본 것은 20대 후반이었고, 그 이후에는 이 검사를 다시 해본 적이 없다. 사람들이 물어보면 20대 때 검사를 해본 그 결과를 이야기하면서 즐겁게 서로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그뿐이다. 경험이 쌓이고 성장하는 인간이 어떻게 한 유형에 들어가 평생을 그 유형에서 살겠는가.


"너는 I라서 그래, P라서 그래. OOOO는 마이웨이라서 설득해도 절대 소용없어. 난 XX 성향이 아니면 연애 안 할 거야. XXXX들은 머리가 나빠." 이런 말은 그냥 '난 사람을 알고 싶지 않아요."라고 선언하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을 인터넷상에 적힌 16가지 유형의 특징, 그 이상의 존재로는 보지 않겠다는 것으로 느껴진다.


설마.


그는 나를 더 알고 싶지 않아서 내 MBTI를 불쌍히 여겼나? 그렇다면 유감이다. 그렇다면 나도 그의 MBTI처럼 “자기애가 너무나도 강해서 자신에게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오길 바라고, 공감능력이 없는 걸 논리적이라 생각하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의 말마따나, 나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이렇게 그와 나눈 대화를 글감으로 썼으니, 나는 "남의 말을 곱씹으며 인생을 괴롭게 살아가고 남한테 안타까움을 사는 사람"인 거다. 이런 MBTI라는 생각의 틀에 갇힌다면 우리는 결코 서로의 경험과 성장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는 없을 거다. 나는 그런 사람,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만일 다음번에 그가 또 나의 MBTI를 가지고 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려 시도한다면 나는 말해야겠다. 서로를 좀 더 깊게 이해하고 더 건설적인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라도, "그놈의 MBTI 소리 좀 안 나게 하라."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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