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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윤정 Oct 20. 2021

책에 생명을, 주잉춘

디자이너로 시를 쓰는 중국 북디자이너





书衣坊工作은 '책의 옷을 짓는 공방'이라는 뜻으로, 사람의 치수를 재어 몸에 맞는 옷을 짓는 것처럼 책 역시 그 내용에 걸맞는 장정을 만들어 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그가 출판사를 다니던 시절 마감에 쫓겨 진정으로 책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은 결과물을 만들어 낸 것에 대한 후회다. 书衣坊工作에서는 매책마다 그에 맞는 아름다움과 독특한 의견을 담아내며 진정으로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스튜디오를 설립하며 주잉춘은 중국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던 독자적인 북디자인 세계를 본격적으로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2006년, 주잉춘의 대담한 시도를 담은 책 《不裁》이 발행되었다. 《不裁》는 古十九라는 작가가 신문에 기고한 것을 묶은 책으로 일상의 평범한 미학을 담은 에세이집이다. 저자는 세상만사를 돌아보며 타인의 심리를 헤아려 더 큰 세상을 이해한다. 그리고 타인의 허물을 통해 자신을 더 명확히 인식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날카롭고 풍자적인 글이지만 따뜻하면서도 잔잔한 사랑 이야기도 담겨있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주잉춘은 《不裁》에서 에세이 하나하나에 실린 감동적인 이야기에 주목했다. 한 호흡으로 단숨에 읽는 소설과 다르게 에세이는 각 장마다 본연의 리듬이 있었고 주잉춘은 독자들이 한번에 이 책을 읽기보다는 장마다 천천히 내용을 음미하며 쉬어 읽기를 바랬다. 이에 주잉춘은 디자인에서 파격적인 시도를 행한다. 바로 책의 단면을 아예 실로 꽁꽁 제본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책 앞에 작은 종이칼을 삽입했다. 독자들은 책을 읽기 위해 종이칼로 실을 끊어내야 했고 책장을 넘길때도 직접 그들이 한면 한면 재단해야 했다. 번거로운 과정이었지만 독자들은 책을 재단하는 시간 동안 다음 장을 머릿속에서 그려보게 되었고 앞서 읽었던 내용들을 차분히 되짚어 갈 수 있었다. 편집디자인에 있어서도 여백을 많이 두어 독자들은 책을 읽다가 느낀 점을 여백에 메모하며 이를 독서 노트처럼 활용할 수 있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책 자체에도 질감의 변화가 생긴다. 처음 구입했을때 책은 실로 묶여있어 단면이 매끈한 상태지만 독자가 책을 읽어가며 재단함에 따라 울퉁불퉁한 상태로 뒤바뀐다. 마치 책이 생명을 얻은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독자와 교감하며 변화하는 《不裁》의 장정디자인은 출판계의 큰 파장을 몰고왔고 2007년 독일 라이프치히 도서전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에 선정되는 쾌거를 이룬다.










그 후 그는 개미의 삶이 담긴《개미蚁呓》라는 책을 발표했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처럼 먹이를 찾아 다니고 싸움질을 하고 동료의 시체를 묻는 개미의 삶을 담담히 그림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개미는 한낱 미물이지만 우리 역시 전 우주에서 보면 아주 왜소한 존재임을 강조하며 개미와 우리의 생명이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전했다. 이 책은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에 선정되며 주잉춘의 새로운 시도가 성공적으로 전달되었음을 증명했다. 
   

















수년간 벌레에 관한 연구끝에, 그는 《벌레책 虫子书》을 출판하며 벌레시리즈의 귀결을 맺었다. 그러나 이 책은 벌레에 관한 내용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 심지어 '벌레虫子'라는 글자도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무수히 어지러운 선들만이 뒤엉켜 있을 뿐이다. 사실 이 책은 벌레 스스로가 만든 책으로, 벌레다리에 먹을 묻혀 그들이 지나간 궤적이 그대로 드러나게 만들었다. 여기서 주잉춘운 단지 그 사실을 발견한 정리자일 뿐이다. 이렇게 벌레들이 만든 책은 마치 한 폭의 서예,  산수화 같다. 파리가 쓴 행서(行書), 지렁이의 전서(篆書), 매미의 세밀화, 하늘소의 우점준(雨點皴), 무당벌레의 초묵, 달팽이의 사의(寫意), 노린재의 비백(飛白), 말벌의 광초(狂草).. 벌레들이 지나간 흔적은 생명의 노래처럼 너무도 신비롭다. 
   



















   

그는 전자책이 활성화된 지금의 시대에도 종이책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그는 전자책과 다르게 종이책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종이는 나무에서 만들어졌고 그것을 제작하는 사람들의 손길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또 종이책은 독자들이 소장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감정이 불어넣어지기 때문에 전자책과는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다. 따라서 그는 종이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반드시 독자들이 생명감을 느끼게끔 책을 제작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곤충과 함께 논밭을 쏘다니던 한 시골의 아이는 책에 진정한 의미의 생명을 불어넣으며 중국의 대표적인 디자이너로 부상하였다. 앞으로도 그의 손끝에서 탄생할 아름답고 특별한 책들을 기다려보자.  




해당 포스트는 저서 <중국디자인이 온다>에서  일부를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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