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뎌져가는 미각을 살릴 수 있을까?
흑수저, 백수저의 한판 승부라... 넷플릭스 썸네일부터 심상치 않았다.
볼까 말까 고민하던 차에 아내가 보고 싶었다며, 같이 보자고 보채었다.
못 이기는척, 함께 먹을 간식거리를 소파에 두고 흑백요리사 1화의 재생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밤이 깊어가고 있었음에도 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살면서 많은 종류의 요리를 먹어보았다. 그 중 몇 가지 음식은 처음 맛본 순간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기억을 남긴 것들이 있다. 여러분도 각자 생각나는 음식들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3가지 음식이 그러했는데,
1) 피자
2) 크림 스파게티
3) 새마을식당 열탄불고기
이렇게 세 가지였다.
너무 어린 아이 취향의 입맛이 아니냐 할 수 있겠지만, 모두 어렸을 때 먹어본 음식들이고, 그 당시의 그 짜릿한 기억이 40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피자를 처음 먹어본 것은 초등학교 1~2학년 정도 되었을 때다. 부모님께서는 지금은 거리에 보이지 않는 '피자몰(Pizza Mall)', 그리고 '피자에라이(Pizza Errai)'라는 가게에서 피자를 사주시곤 하셨는데, 처음 맛본 피자의 맛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피자는 8조각이 나 있었고 4인 가족인 우리가 각자 2개씩 집어 먹으면 금방 식사가 끝이 나버렸다. 피자를 나누어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싫어, 어린 나이에 피자몰로 가서 라지 한판을 시켜 혼자 다 먹고 나온 적도 있다.
당시 사장님이 '너 혼자 와서 라지 한판 주문하는 게 맞니'라는 질문을 3번 정도 되풀이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는 날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시며 주문을 받아주시던 그 분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크림 스파게티를 처음 먹어본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당시 고시원 생활을 같이 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고민을 털어 놓았다.
'내가 엄청 좋아하는 음식이 하나 있는데, 여자친구가 없어서 먹으러 가질 못해.'
'뭔데? 맛있는거야?'
'엉, 나 크림 스파게티 진짜 좋아하는데, 식당들이 블링블링해서 여자친구랑 가야지 남자들끼리 가면 좀 이상하거든'
'스파게티를 크림으로 만든다고?(당시까지 난 세상에 있는 스파게티는 모두 빨간색으로 알고 있었다.)'
'너 아직 안 먹어봤어?'
'그런게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럼 한 번 같이 먹으러 가볼래?'
그렇게 생전 처음으로 '쏘렌토'라는 음식점을 찾아 하얀 국물의 스파게티 맛을 보았다. 메뉴명은 까르보나라였는데, 처음으로 맛본 생크림의 풍미는 머릿 속을 짜릿하게 할 정도로 강렬했다. 더벅머리 남자 고시생 두 명이 앉아 크림 스파게티 맛에 취해 있는 모습이 신기했는지, 식당을 찾은 젊은 남녀의 시선이 가끔씩 우리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쳐다보거나 말거나... 난 그저 내 앞에 놓인 하얀 그릇과 같은 빛깔의 음식에 취해 있었다.
마지막으로 백종원님의 대표 브랜드인 '새마을식당'의 열탄불고기...(그때는 백종원이라는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당시 나는 고시생 생활을 하며 친구들과 연락을 거의 끊고 지내던 시기였다. 오랜 기간 고시생활을 하느라 힘들지 않냐며 맛있는 고기를 사줄테니 나와서 영양보충이나 하고 들어가라는 친구의 말에 논현동 식당거리로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새마을식당이라... 레트로느낌의 간판에 원형 숯불구이 식탁과 동그란 의자들로 채워져있는 식당이었다. 여느 고깃집과 달라 보이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친구는 이 집 고기가 정말 맛있다며 영양 보충 많이 하고 가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친구는 까맣던 숯이 하얗고 빨간 빛을 내며 타닥타닥 타들어가자 시뻘건 양념을 뒤집어 쓴 열탄 불고기를 굽기 시작했고, 동시에 사장님을 부르더니 7분 김치찌개와 밥을 추가했다. 고기는 두께가 얇아서 금세 먹기 좋게 익었고, 잘 익은 고기 한점을 소스에 찍어 파채와 함께 입안에 털어 넣었다.
'.........!!!!!'
잠시 뇌정지가 온 것 같았다. 먹고 나서 깜짝 놀랐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은데, 간단히 몇 가지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머리를 때려 맞은 것 같은 느낌에 나는 친구가 연신 구워주는 고기를 아무 말도 없이 걸신들린 사람처럼 주워 먹었다. 친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기가 떨어질 때마다 1~2인분씩 추가 주문을 넣었고, 그렇게 그 자리에 앉아 먹은 고기는 무려 10인분이었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고기의 대부분은 내 입으로 들어갔다고 하고, 밥과 김치찌개 역시 깔끔하게 해치웠다고 한다.
가끔 그 때 그 놀라운 기억들을 추억하곤 한다. 생전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맛을 느꼈을 때의 짜릿함이랄까.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간혹 살면서 먹어본 음식 중에 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그 때마다 난 위의 3가지 음식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곤 한다.
30대에는 그래도 그 기억들이 멀지 않은 기억들처럼 느껴졌는데, 40이 넘고 나니, 아주 오래 전 추억처럼 되어간다. 10대 중반에서 20대 중반 사이에 경험한 것들이니 그럴만도 하다. 벌써 20여년 전 일들이라니... 문득 흘러가는 세월의 바람에 익숙해져 가는 나를 인식한다.
사회 생활을 하며, 온갖 음식들을 먹어왔고, 동네 맛집이다 하는 소식을 들으면 기억해 놓았다가 꼭 한 번 찾아가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내 미각은 온갖 맛있는 음식들에 적응해버린, 어찌보면 너무 감각에 무뎌져버린 상황이 되지 않았나 싶다. 웬만한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그 시절만큼의 감동을 느끼기는 어려워졌다.
오히려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겠다는 욕심을 점점 내려놓게 되었다.
그렇게 음식에 대한 관심과 기대감이 꺾여가던 시점에 넷플릭스 흑백요리사를 만났다. 세상에는 많은 요리가 있고, 어떤 재료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셰프의 역량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가 영상을 통해 실감나게 전달 되었다. 비록 직접 그 음식들을 맛보는 경험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심사위원들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심사평들로 인해, 내가 마치 그곳에서 음식을 맛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살짝 받기도 했다.
과거 '냉장고를 부탁해', '강식당', '마스텨셰프코리아' 등 여러 TV프로그램에서 요리를 주제로 다루긴 했지만, 국내외 최정상급 셰프들이 본인의 커리어를 온전히 쏟아붓는 열정으로 요리를 만들어 내는 이런 프로그램은 없었던 것 같다.
이 프로그램의 모든 에피소드를 시청하고 나서는 참 재미있었다거나, 누가 우승했어야 했다거나 등의 생각은 거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고, 그저 저 셰프 분들이 만들어주는 음식을 꼭 한 번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최강록 셰프는 어디에서 식당을 하지? 나폴리맛피아는? 에드워드리는?...
이런 궁금증이 계속 뭉게뭉게 피어났다.
구글과 네이버 등을 오가며 식당들을 검색해보았는데, 대부분 표 형식으로 간략히 셰프명, 가게명 정도만 나와있고 더 자세한 정보를 알아보려면 또 다른 링크를 통해 계속 타고 타고 들어가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검색의 바다에서 헤엄치다 운 좋게 식당별로 잘 정리된 글들을 몇개 발견할 수 있었다.
보다보니, 중식여신이나 에드워드리의 식당도 꼭 찾아가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이분들은 우리나라에 식당을 두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우승자인 나폴리맛피아와 이모카세, 장사천재 조사장, 정지선, 최현석 같은 셰프 분들이 운영하는 식당들을 꼭 일정을 잡아 가볼 생각이다.
과연 20대 중반 이후 사라져있던 짜릿한 미각의 경험을 다시 해볼 수 있을까.
https://health.inforsome.com/흑백요리사-식당-리스트-총-정리-흑수저-백수저-top-20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