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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 Feb 03. 2022

할머니 글씨

할머니께 (영진)

왜 축복을 거꾸로 썼을까?

스티커 야무지게 붙였네

중학교 때 할머니가 위암 선고를 받고 위 절제 수술을 했었다. 그때가 아마 할머니가 돌아가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던 때 였다. 그게 나에게도 꽤나 스트레스였던지, 친구네 집에 갔다가 그 집 화장실에 코피를 쏟았던 기억이 있다.


기억 속에 없던, 할머니가 간직해 놓은 할머니와의 추억이다.


할머니가 동네 폐지 줍는 장군네 할머니와 친했었다. 할머니가 동네 마실을 자주 다니며 가끔 그 일을 도와드렸는데, 누가 버린 휴대폰이 있으면 주워다가 우리한테 갖고 놀라고 주셨었다. 그런데 언젠가 나 없을 때 예쁜 핸드폰을 동생들에게 줬나보지?내가 동생들한테 나눠줄 테니 휴대폰을 주우면 나에게 먼저 달라고 할머니한테 '비밀 약속' 서명을 받아놨네. 02년도면 초등학교 3학년 때. 그 때도 동생들한테 장난 걸기를 좋아했는지, 나는 (할머니 말로) 동생들을 지럭거리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 할머니에게 야무지게 지장까지 받은게, 그 장단에 할머니가 맞춰준 게 너무 웃겨서 이걸 발견하고는 가족들하고 한참 웃었다.




할머니의 메모


할머니는 근처 교회의 원로 목사에게 어깨너머로 한글을 배웠다. 학교를 오래 다니지 못한 것이 할머니의 한이라고 했다. 일을 은퇴하고서는 교회 노인대학에 다니며 한글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래서 평소에 할머니가 노트에 이것저것 적는 모습, 설교 카세트 테이프를 듣고 받아적는 모습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아마 이사를 하면서 할머니가 노트는 다 버리신 것 같다. 메모 수첩만 남았는데 이 수첩들도 내가 쓰던 것들이다. 새 것을 사고서 쓰던 게 질리면 버리려고 내 놓았는데 그걸 할머니가 주워다 썼다.


내 생일만 시간을 정확히 적어놨네. 오른쪽은 할머니가 부탁해서 우리가 적어드린 것 같다.
틀니에 폴리덴트 (틀니 세정제)

초등학교 때 할머니가 화장실에 내 놓은 틀니를 보고 엄청 놀랐던 기억이 있다.


지혜

된장이 싱겁다

보리콩 삶음

구더기 생긴 된장 > 고추씨

김치 시다 > 계란 껍질

간장이 쓰다 > 감초 끓임















연근이 된장찌개 배출함

된장 감자 양파 호박 버섯

돼지고기 삶을 때 커피 한 스푼 넣음

다시마 연근

간장이 쓰다면 감초 끓인다

감초 달인다






















냉장고 청소

코드를 뽑아놓고

주걱으로 살살

칼이나 등등 안됨
















우리 할머니랑 친했던 장군네 할머니. 이전에 살던, 우리 할머니가 거의 평생을 살았던 서부이촌동 27번지 골목길.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나온 아주머니들처럼 할머니들이 늘 골목에 나와 앉아 계셨었다. 주로 장군네 할머니 집 앞이나 골목길 초입의 경아 야채가게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할머니가 집을 비웠을 땐 늘 거기로 찾으러 갔었지. 장군네 할머니, 야채가게 아줌마, 앞집 아줌마, 안경 할머니, 대림아파트 할머니, 해성이 엄마, 진경네 할머니, 부동산 할머니, 3층 아줌마, 지하실 아저씨... 주로 그렇게 불렸다. 우리 할머니는 작은고모 이름 따라 백경이네.

우리 집이 효창동으로 이사오던 18년도 가을에 대림아파트 할머니가 우리 할머니 손을 잡고 눈물을 보였었다. 우리 할머니가 치매 초기라는 걸 알았던 야채가게 아줌마는 새 동네에서 어떻게 다니시려나 엄마더러 걱정을 늘어 놓으셨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사온 지 얼마 안되어, 지병이 있던 장군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작년엔가, 치매도 없던 대림아파트 할머니까지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싸이

본명 박재상

(이걸 왜 써 놓았는지? 어쩐지 예전에 TV에 나온 싸이를 보고 할머니가 재상이라고 하더라..)
























가수 신유

조아

(할머니가 자던 영은이 깨워서 가요무대 보라고,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라고 했단다.)

















자주 고름이

눈물 ?

(할머니가 안구 건조를 심하게 앓아서 늘 안약을 달고 살았다.)
































반딧불초가

(노래 제목 같기도 한데?)





































[교회를 열심히 다녔던 할머니의 교회 관련 메모들]

마태복음 마가 누가 요한

?

금요일 십자가에 달려 3시에 운명하심 (예수님)


















성전에 문이 되게 하소서

기둥이 되게 하소서

열쇠가 되게 하소서


















공생이란 예수님이

고난 많이 받은 것

면죄부 연옥

죄를 면하고 천당을 간다는 뜻이다



















기독교 맨 처음 개척하신 분은 깔뱅 입니다.

칼뱅, 루터



















4.6. 오전 9시에

예수님은 4.6. 십자가에 못박혀 오후 3시

4.6. 9시에 십자가에 못박혀 오후 3시에 운명



















만복의 근원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2007.4.15.

부활절 마태복음 28



















솔로몬 같은 지혜

다윗 같은 믿음 주세요



















주 날개 밑 품어주시고

영광 역사하시옵고

부족한 죄인 용서하시고

저이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고난받기 전 기도에 대한 설교 내용으로 추정)















성령 임하시면

겁내지말라

두려워말라



















시편 121편

찬송 493

사랑의 날개로 품어주(소서)



















주 너를 지키리

환란에서 가려주시리고 (?)

나를 지켜주시리



















432장 성경41

주의 날개 밑에 거하게 하소서

환란을 막아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시고

우리 마음에 문을 열게 하소서

















4.10.

오전 예수님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시었다

오후 3시에 이제 다 이루었다

하시며 6시간만에

운명하셨다














어느 도둑이 담을

넘어서 어느 모자가

도란도란 이야기가 들려

'엄마, 먹을 것 없어'

'아들, 똥이라도 먹자'

도둑이 듣고 불쌍해서

옆집에서 가져온 쌀을

거기 놓고 감












수상한 가정부

15 16 17회

(이 드라마 재밌나?)





















할머니의 2G 휴대폰에 저장해 둔 단축번호
큰고모 아들과 작은 고모 아들

치매가 오기 전, 할머니는 매일 아침 KBS1에서 하는 '아침마당'을 챙겨 봤었다. 화요일엔가는 '이산가족찾기'시리즈를 했었고, 주말이면 가족 노래자랑 코너를 한다(강하늘이 나왔던 그거). 응원하는 팀이 생기면 전화를 걸어 투표를 했었다. 아마도 그래서 적어놓은 아침마당 전화 번호.

정 하나 준 것이 이렇게 아플 줄 몰랐네

정 하나 준 것이 이렇게 아플 줄 몰랐네... 검색해보니 '정 하나 준 것이'라는 노래 가사였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요즘 코로나 19가 더 심해져서 걱정이다.

손자 손녀 아들 며느리 항상 건강 조심하기 바란다.

영은아 할머니를 3일에 한 번 씩 목욕을 시켜주니 너무 고맙다.

영진이, 영은이 남자친구 좀 데려 오너라. 얼른 시집가게.

사랑한다, 할머니가.

2020년 8월 24일















이때만 해도 할머니가 센터 활동도 열심히 참여하고 활발했다. 종이접기나 이것저것 만들어 오고 상장도 받아 오고 그랬었다.


20년도 중반부터는 할머니가 혼자 씻기 어려워 해서 영은이가 주로 도와주었다. (21년도부터는 재택근무를 하는 내가 할머니 목욕과 데이케어센터 등원을 담당했다.) 치매 증상이 심해질수록 씻기를 싫어해서 씻기려고 얼마나 실갱이를 했는지 모른다. 나중에 육아를 하게 되면 이런 느낌일까 생각했다. 화장실까지 겨우 데려가면 씻기 싫다고 변기에서 앉아 버티고 있는다. 어느 날은 할머니 옷에 물장난 하듯 물을 뿌려서 결국 옷을 벗고 씻게 만드는 기지(?)를 발휘했던 에피소드도 있다. 물론 깔깔대다가 할머니한테 욕 많이 먹었지. 그러면 할머니는 '재밌냐?' 했다.


할머니가 줬던 2021년 세뱃돈 봉투

작년 설 연휴 때 외출하고 돌아오니 웬일인지 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만원을 이 봉투에 담아서 세뱃돈이라고 줬다. 아침에 대뜸 세뱃돈을 줘야겠다며 영은이를 불렀단다. 영은이가 준 봉투에 할머니가 직접 이름도 써 줬다. 세배도 안 했는데 웬 세뱃돈이냐, 나 돈 많다고 할머니 쓰라고 했더니 줄 때 받으라고 했던 용돈. 그래서 장난으로 나는 첫째인데 왜 만원밖에 안 주냐고 더 달라고 했더니 할머니가 이제 돈이 없다고 했다. 그럼 맛있는 거 사달라고 했더니 치킨 시켜준다고 했었는데.

평소에 할머니가 많이 말하게 하려고 일부러 할머니 방을 자주 찾았다. 정작 할머니는 대화 자체를 귀찮아했다. 말을 걸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몰라, 싫어, 나 좀 냅둬, 귀찮게 하지 말고 절로 가라고, 나 좀 괴롭히지 말라고 그랬다. 컨디션 좋은 날에는, 할머니가 과일 장사 했을 때, 찻집했을 때, 젊은 시절 할아버지랑 살았을 때 옛날 얘기도 해줬다. 치매에 걸리고서는 생전 안 꺼내던 할아버지 얘기를 부쩍 자주꺼냈다. 그 때가 좋았다고. 기분이 좋으면 노래도 흥얼거렸다. 불과 두달 전까지만 해도, 대뜸 돈 없으면 빈대떡이나 부쳐먹지 노래를 불렀었다.

밤잠 없는 할머니가 일찍부터 잠들어 방에 오래 누워있는 날엔, 가끔씩 들어가서 숨 잘 쉬나 확인하곤 했었다. 내가 귀에다 대고 '죽지마 할머니~ 죽으면 안돼~!' 이러니까 '아직 안죽어~'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가 요양원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날에는 내가 '죽으면 안돼 할머니~'하니까 힘없이 고개만 끄덕였었네.


미안해 할머니 아직 시집은 못 갔어. 끝까지 효도는 못했네.

나 어렸을 때 가족 친척 어른들이 애교있는 영은이랑 아들 현준이만 귀여워 했어도 울 할머니는 장녀인 내가 젤루 최고라 그랬는데. 맞지? 나 키워주고 많이 이뻐해줘서 고마워.

할머니! 천국 가서 할아버지도 만나고, 할머니 마음대로 편하게 살어.

사랑해 남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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