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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봉쇼콜라 Feb 25. 2024

어차피 결혼은 제로섬 게임.

이겨도 이긴게 아니고 져도 진게 아닌. 

 얼마 전에 남편이 결혼 후 처음으로 홀로 태국 여행을 다녀왔다. 이 여행에서 남편은 첫날의 숙소만 예약하고 나머지는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아본다며 그냥 떠났다.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요즘 유행하는 MBTI 적 용어로 말해보자면, 나는 J(통제형), 남편은 P(즉흥형)로 우리 둘은 다르기 때문이리라.

  INTP 남자와 ESFJ 여자. MBTI로 분류한 우리 부부다. 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한 글자도 맞지 않을 수가! 어느 하나 비슷한 구석이 없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벌써 15년을 같이 살고 있다. 신기하게도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끌렸던 가장 큰 이유는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다른데도 말이지.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공통점이 아주 많다. 나이가 같고 고향이 같다. 종교가 없는 것도 같았다. 대학교 1학년 때 소개팅남이 모 정치인(내가 극도로 싫어하는..)을 존경한다고 해서 굉장한 충격을 받은 뒤 나는 정치적인 성향도 꼭 보곤 했는데 그것도 같았다. 어떤 취향이랄까 결이랄까 그것도 비슷했다. 대화도 아주 유쾌하고 재미있었다. 한마디로 나는 남편이 나와 비슷한 사람이어서 끌렸다.

 나이도 어리지 않았고 서로 매우 마음에 들었기에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만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부부가 되었다. 물론 사랑의 크기가 시간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며 우린 서로에게 확신이 있었지만 상대를 완벽하게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비슷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백만 광년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예를 들면 그는 시시콜콜 연락하는 걸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사소한 것도 연락하는 것이 좋다. 밥을 먹더라도 나는 어디서 몇 시쯤에 무얼 먹고 디저트는 이걸 먹는다! 라고 정한 후에 외출하는 것이 마음이 편한데, 남편은 그냥 무작정 돌아다니다가 눈에 보이는 집에 들어간다! 라면서 나간다. 나는 스릴러나 액션 영화는 보지 않고 로맨스 영화만 본다. 남편은 로맨스 영화라면 질색한다. 나는 누구와 싸워도 내가 이길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남편은 그 누구에게도 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할 일을 항상 미뤄두는 느긋한 나와는 달리 눈앞에 보이는 일은 다 처리해버려야 하는 사람. 가리는 음식이 많은 남편과 못 먹는 음식이 거의 없는 나. 술을 좋아하는 아내와 술을 싫어하는 남편. 부석사 무량수전을 모르는 사람이 이해가 안 돼서 잠깐 계속 만나야 하나를 고민했었던 여자와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몰랐던 여자가 신기했던 남자. 쉬는 날이면 집에서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책이나 읽는 게 제일 좋은 사람과 무조건 밖으로 나가고 싶은 사람. (와, 쓰면 쓸수록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잖아.)



에드먼드 레이튼 <결혼 등록>, 1920년, 91.4×118.5㎝, 브리스톨 시립 미술관, 영국 브리스톨



 여기 이제 막 부부로서 첫발을 내딛는 부부가 있다. 사뭇 긴장한 채 결혼 서약서에 진지하게 서명하고 있는 아름다운 신부와 상기된 얼굴로 그걸 지켜보는 신랑. 신부에 비해 신랑은 왠지 모르게 좀 들떠 보인다. 마음에 꼭 드는 여인을 신부로 맞이해서일까? 뒤에서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는 하객들은 남자가 여자를 엄청 좋아하나봐 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에드먼드 레이턴은 복식 묘사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새하얀 드레스의 디테일이 돋보인다. 100년 전 결혼식이지만 지금과 별다른 바 없어 보인다. 신부의 드레스는 오늘날 결혼식장에서 입어도 잘 어울릴 듯 세련되고 우아하다. 부케나 머리의 꽃장식 등도 참 아름답다. 앞으로의 날이 기대감으로 가득한 행복한 날. 나는 신부처럼 비장하게 결혼서약을 한게 아니라 다들 그만 좀 웃으라고 할 정도로 내내 웃으며 식을 치렀다. 

 예쁜 웨딩드레스를 입고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 서약을 하는 날, 그 행복한 날에 앞으로 상대방과의 갈등을 생각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웨딩드레스뿐만 아니라 그때나 지금이나 결혼이 엄청 중요한 인생의 일임에는 변함이 없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사는 일이 늘 행복하지만은 않다. 다르다는 이유로 많이도 부딪혔다. 왜 이런 나를 이해 못 하냐며 서로 비난하기도 했고 어떨 땐 버겁기도 했다. 우리는 차이를 잘 모른 채 결혼했고, 다름을 알고 난 후에는 때로는 불같이 다투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적당히 포기도 하면서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 

 나처럼 어리석은 중생을 위해 위대한 작가 톨스토이가 이런 말을 했나 보다. “행복한 결혼 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얼마나 잘 맞는가보다 다른 점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냐이다.”라고. 맞는 말이지만 실천하긴 어렵다. 나의 단점엔 너그러우면서 상대방에겐 한없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그렇지만 상대방이 나를 보듬어 주고 있다는 사실 역시 잊으면 안 되겠다. 어느 날은 이해하고 어떤 날엔 포기하고 때론 못 본 체하면서 익숙해져 가고 있다는 것도.     


p.s. 아 참, 해리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노예 도비가 해방될 때처럼 “도비 이즈 프리(Dobby is free)를 외치며 신나게 떠났던 남편은 당분간은 나홀로 여행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사흘쯤 지나니 가족 여행객이 그렇게 부러웠다나 뭐라나. 있으면 귀찮고 없으면 허전한 뭐 그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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