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노만의 주목할 만 한 영화계 활동은 같은해 7월 6일 영화비평가협회 창립 회원 및 발기인으로 참여한 것이었다. 이전에도 영화비평 및 평론가들의 모임은 몇 차례 결성된 바 있었다. 가장 먼저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9월 10일 임시수도 부산에서 유두연(1920~1972), 이봉래(1922~1998), 허백년(1922~1978) 등을 중심으로 한 영화평론가협회가 결성되었다. 언론인 오종식을 회장으로 한 이 협회에 참석한 인물들은 박인환, 이진섭, 전창근, 오영진, 김소동, 이청기, 이철혁, 황영빈, 이정선, 최백산 등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등 현장 영화인과 영화비평에 종사하던 언론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김종원, <한국영화비평사 시론: 하나의 정립을 위한 조명>, 영화평론 1호, 1989, 28쪽). 이후 1958년 3월 결성된 부산영화평론가협회는 초대 회장으로 취임한 부산일보 논설위원 박두석을 필두로, 장갑상, 이주홍, 김일구, 여수중, 허창, 황용주 등 부산 지역의 문인 및 영화평론가들이 주축이 된 모임이었다. 이들은 같은해 2월에 부산일보사 주최로 부일영화상을 제정, 3월 27일 부산 국제극장에서 제1회 부일영화상 시상식을 개최하면서 부산 지역 영화문화는 물론 영화 평론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영화평론가협회의 발족 및 창립 과정에 대한 증언은 영화평론가 김종원의 회고를 통해 자세하게 알 수 있다. 협회 창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은 1960년 6월 중순 경이었다. 이영일은 김종원에게 유명무실한 상태로 거의 활동이 없었던 기존의 영화평론가협회를 대신하여 새로운 구성원으로 결성된 협회의 결성을 제안한다. 김종원의 회고에 따르면, 협회의 명칭을 '평론'이 아닌 '비평'을 앞세운 것은 영화에 대한 학구적인 성격을 강조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김종원, <척박한 비평의 땅에 일군 보람의 연대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40주년과 영화평단의 형성, 24쪽).
이영일, 김종원을 필두로 이루어진 협회 입회원으로 가장 먼저 언급된 인물이 김정옥(1932~)과 노만이었다. 이영일과 마찬가지로 문학으로 이력을 출발한 김정옥은 1958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 소르본느 대학 영화연구소를 수료하고 귀국하여 1959년 <사상계>를 통해 등단, 같은해 중앙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이듬해인 1960년에는 강찬우 감독의 영화 <사랑의 함정>(1960)의 각본을 집필하기도 했다. 노만은 이영일과 함께 1959년 잡지 <영화예술>의 창간 핵심 멤버로 영화 평론 활동을 비롯해 [다시 보고 싶은 영화], [세계의 명배우 70인] 등의 저술을 발표하는 등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 물망에 오른 인물로는, 195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나리오 <비에 젖은 창>이 가작으로 입선한 시인 출신의 정우영(1927~2018), 부산일보 문화부장이자 부산 지역 영화평론가로 활동 중이던 허창(1927~2000) 등이었다(김종원, [시정신과 영화의 길], 한상언영화연구소, 2023, 197~198쪽). 그 외에 평화신문이 제호를 바꾼 <대한일보>의 연예담당 기자이자 시인이었던 황운헌이 참가하기도 했다. 노만을 제외하고, 이영일, 김종원을 비롯한 대다수 협회원은 공통적으로 문학 등단을 통해 데뷔한 이후 영화계와의 인연으로 영화 비평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그리하여 영화비평가협회는 1960년 7월 6일 수요일 저녁 7시 서울 명동1가에 있는 중국음식점 대홍운(大鴻運)에서 창립 모임을 가지고, 대표간사 이영일, 사무간사 김종원, 기획간사 김정옥으로 집행부 임원을 선출했다. <평화신문> 1960년 7월 12일 단신으로 실린 기사는 협회의 발족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한국영화비평가협회가 지난 6일 명동 '대홍운'에서 발족되었는데 동회에는 앞으로 기관지 발행 영화상 제정 연구 발표 및 합평회 등을 개최하리라 한다. 이날 선출된 임원은 다음과 같다. 대표간사 이영일 사무간사 김종원 기획간사 김정옥"(<평화신문> 1960.7.12. 4면 기사) 이와 같은 내용의 기사는 경향신문 1960년 7월 12일 석간 4면에도 동일한 내용이 단신으로 보도되었다. 간사 임원진 선출은 창립 모임에서 무기명 투표를 통해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와 이로 인한 각종 문화 단체의 해산으로 인해 영화비평가협회는 뚜렷한 활동을 이어가지 못한 채 해체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김종원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 정부의 이른바 "사회적 혼란으로 예술인 상호성은 물론 국가관이나 정치 이념상 산만하게 흩어져있는 문화 단체의 재규합"이라는 강압적 명분 이래 자진 해산 형식으로 해체됨으로써 단명의 운명을 맞게 된다. 이런 현상은 자정의 노력까지 겹쳐 문총(문화단체총연합회)이 예총으로 거듭나게 되고 문학가협회가 문인협회(1961.12)로 바뀌는 문화단체 개편의 격변 속에서 이루어진 결과였다.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이 당국의 재검열고 상영이 중단되는 홍역을 치른 것도 이 무렵이었다."(김종원, <척박한 비평의 땅에 일군 보람의 연대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40주년과 영화평단의 형성, 25~26쪽) 영화비평가협회는 1965년 11월 10일 '한국영화평론가협회'라는 이름으로 재창립되기까지 한동안 별다른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 못했다.
영화비평가협회 창립 회원 당시 노만의 명함. 노만이 소장하고 있던 이 명함은 2023년 발간된 단행본 [한국영화사](법문사, 2023)의 화보로 수록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