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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Nov 18. 2024

한국영화 40주년과 기점을 둘러싼 논쟁

영화사가 노만 72

<오는 9일이 영화 40년>, 한국일보 1963년 4월 5일 7면 기사.


*


[연예] 오는 9일이 영화 40년 :

행사 없이 쓸쓸히 첫 극영화 <월하의 맹서>는 1923년작 / 2년 전 '잔치'는 '생일' 오산


재작년 3월 3일부터 29일까지였다. 경복궁에서 '한국영화 40주년 기념 대전시회'가 외국의 협찬 작품이 상영되는 속에 열렸던 것은, 이를 본 사람은 너나없이 이 전시회가 가시덤불을 헤치며 오늘에 이른 '한국영화' 40년의 발자취를 증언하는 줄 알고 감회를 새로이 하였다. 그 당시 주최 측은 우리나라 최초의 극영화가 윤백남 감독 <월하의 맹서>이고 그것이 1921년에 탄생되었다고 계산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화 이론가 (한국영화사 전공) 노만 씨에 의하면 "그러한 계산은 어설픈 기억에 근거를 둔 것으로 문제의 <월하의 맹서>는 1923년 4월 9일 서울 단성사에서 첫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재작년이 아니라 오는 9일이 바로 한국영화 40주년 기념일이 되는 것. 그러면 다음에 노만 씨가 제공한 자료로 한국영화의 올바른 인식을 위해 그 탄생일을 밝혀보기로 한다.


전혀 무근거한 기산(起算)

그러나 이에 앞서 논의될 것이 있다. 그것은 <월하의 맹서>가 과연 우리나라 최초의 극여화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 영화는 총독부 체신국이 그것도 저금장려를 목적으로 제작하여 무료로 공개한 것이고 상영시간도 20분정도(전2권)의 단편영화였다.'스태프'와 '캐스트'가 한국인이고 제작 자본 역시 순 한국 민간인으로부터 나왔던 영화는 그 이듬해인 1924년 9월 5일 서울 단성사에서 공개된 상연시간 한 시간 20분(전8권)의 장편극영화 <장화홍련전>인 것이다.

<춘향전>이라는 상영시간 한 시간 30분(전9권)의 장편 극영화가 <장화홍련전>보다 먼저 공개되긴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얘기에 한국인 배우가 출연했다 뿐 <춘향전>은 자본과 '스태프'가 일본인으로 엄격히 말하자면 한국인 관객을 위해 제작된 외국영화로 봄이 옳다.

그런 점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의 자본, 기술, 두뇌로 이루어진 <장화홍련전>이 장편 극영화론 우리나라 최초라는 명예를 차지하여야 할텐데 백보를 양보해서 <월하의 맹서>를 그렇다 하더라도, 이 영화는 1921년도 작품이 아니다.

서울의 교외를 배경으로 주색잡기에 놀아나서 가산을 탕진한 약혼자의 곤경을 남몰래 푼돈을 모아 마련한 저금통장으로 구제-- 두 청춘이 달빛 아래서 결혼하여 알뜰하게 살림을 해서 남은 돈을 저축하자고 맹세하는 얘기를 벌인 <월하의 맹서>라는 영화는 3.1운동을 계기로 해서 일본이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전화한 그 뒤에 나온 것이다.


영화사에 무지한 탓

조선총독부 체신국은 저축을 장려할 목적으로, 당시 민중극단의 단장이었던 윤백남에게 의뢰하여 <월하의 맹서>를 제작케되었다.

이처럼 정책영화의 하나로 제작된 <월하의 맹서>가 1921년도 작품이라는 것은 말이 아니다.

다음으로 이월화, 권일청, 문수일, 송해천, 안세민, 김응수 등 <월하의 맹서>의 출연 '멤버'가 모두 민중극단 단원은 1922년 1월 15일에 발족하여 그해 2월 23일 단성사에서 윤백남 작 <등대직>(3막) <기록>(4막) 두 작품을 공연하여 실패를 보았다.

이런 실패로 안광익, 최일, 나효진과 같은 신파 출신 배우들은 탈퇴하였고 윤백남은 신인들을 기용하여 제2회 공연을 서두르게 됐다. 이때 가입한 여배우가 이월화였다. 윤백남은 자금난으로 지방 공연을 못떠나고 있을 때 체신국에서 '저축장려 활동사진' 제작 의뢰가 왔던 것이다.

"백남은 즉시 민중극단의 회원을 봉익동에 있던 개성여관에 모아놓고 내용을 설명해주었던 바 회원들 모두가 쌍수를 들어 대찬성이었다. 이때 민중극단 연기진을 혁신, 교체했으므로 거의가 신인들이었는데 서울 공연을 마치고 멀지 않아 지방 공연을 나서야 할 판이었만 자금난으로 말미암아 곤경에 빠져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영화 촬영은 이를테면 연극운동을 하기 위해서 잠시 외도를 한 것이라고나 할까"(안종화 저 한국영화측면비사에서)

이러한 곡절을 겪은 <월하의 맹서>가 어떻게 민중극단이 발족하기도 전인 1921년에 제작되었다는 말인가.

"톄신국에서는 저금사상을 선전하기 위하야 저금활동 사진을 영사(촬영의 뜻인듯)하든 중 재작일 밤에 톄신국에서는 시내 경성호텔엇 각 신문 통신사 기자와 및 관계자 백여명을 초대하야 그 '필림'의 시험 영사를 하얏든 바 각본은 윤백남 군이 만든 <월하의 맹서>라는 2천척의 긴 사진으로 내용이 매우 잘되야 크게 갈채를 받았으며 그 필림은 경성을 비롯하야 각 지방으로 가지고 다니며 저금을 선전할 터이라더라"(1923.4.1일자 동아일보)

영화는 공개한 날을 제작 년월일로 봐야되기 때문에 이상의 사실로 보아 <월하의 맹서>가 1923년도 작품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또한 1924년도 2월 10일에 '체신국 저금선전 활동사진대'가 지방으로 내려간 것을 미루어봐도 1923년엔 경성에 순회 공개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왜 1921년으로 오전(誤傳)된 것일까? 그것은 우리 영화계가 한국영화사를 등한히하고 외국인의 손(특히 일인)으로 약술된 한국영화사에 의거했기 문이다.

일본영화사 내에 한국영화사가 포함된 몇몇 책자에는 한결같이 이 <월하의 맹서>가 1921년도 작품이라고 기재되어있다. 그러나 일본영화사가도 실은 한국영화 초반기에 춘사 나운규와 함께 촬영기사로 활약하였고 일본에서 조선영화문화연구소를 경영하였던 이창용이 착각으로 제공한 자료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기념행사 다시 해야

그러니까 지금부터 2년 전 세인에게 40주년이라고 대대적으로 '페스티발'을 가졌던 것은 무지와 무책임이 빚은 허망한 사실(史實) -- 생일을 몰랐던 환갑잔치 같은 꼴이 아닐 수 없다.

"영화는 그 탄생일이 알려져있는 유일한 예술이다. 딴 예술의 기원은 모두 고대의 안개 속에 묻혀있는데..."라는 '벨라.발라주'의 유명한 말이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 최초의 극영화는 <월하의 맹서>라기 보다 <장화홍련전>이라고 보는 것이 엄격한 의미에서 타당하겠지만 통설에 따라 <월하의 맹서>를 최초의 극영화로 보더라도 탄생일은 1923년 4월 9일임을 확인하여야 한다.  그와 함께 40주년이 되는 오는 9일엔 영화계가 조촐한 대로 기념 행사를 갖고 나아가 대종상 시상식 같은 걸 이날을 기해 여는 현명한 수정을 갖는 것이 어떨까 싶다. [明]


(한국일보 1963년 4월 5일 7면 기사)


<장화홍련전>(1924, 김영환 감독)의 한 장면. (매일신보 1924.8.31.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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