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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Jun 21. 2024

해방 공간의 서울, 채플린과 키튼의 매혹

영화사가 노만 5

서울에 도착한 이후 노만과 그의 가족들의 생활은 차츰 안정되어갔다. 당시 발간된 《조선일보》 1946년 5월 6일자 기사 <삼팔이북학생 서울로 쇄도: 각학교는 희생적 봉사 하라!>를 보면, 해방 직후 38선 이남으로 남하하는 이북 지역 학생들의 속출과 남한 지역 학교의 학생 수용 현황을 보도하고 있다. 여기에 경기도 학무과 시학관이었던 그의 큰아버지 노응도의 말이 실려있다.


"끗임없는 학생 사건의 속출과 돌발적인 토지개혁령의 실시 이래 삼팔 입구으로부터 서울을 향하여 넘어오는 학생과 피난민의 수는 나날이 느러가고 있는데 현재 상경한 학생수만 하여도 2천여명이나 되며 이 젊은 학생의 압날을 위하야 각 방며의 동정과 원조는 적지 않었고 특히 학무국의 응급책의 하나로써 4월 23일부터 25일까지 38 이북 학생 등록을 시행하여 6천 50명의 등록자중 현재까지 각 학교에 배정된 학생은 남학생 6천 '파-센트' 여학생 100'파-센트'의 조흔 결과를 보히고 있는데 다만 학교에 따라 자교의 고집으로 등록 마감 이후에도 속속 쇄도하는 향학에 불타는 젊은 학도의 마음을 조이게 하는 경향이 있어 일부 학부형의 불만을 사고 있다.

이에 관하여 경기도 학무과 시학 로응도(魯應燾)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학무 당국으로서는 널리 문호개방을 하여 38 이북 학생을 위하여 극력 힘쓰고 있으나 아무튼 나날이 연다러 상경하고 있는 무수한 학생을 전부 바더드리기에는 현재의 학교시설로는 무리인듯 하다. 새로 학교를 신설하거나 현재 학교 시설을 확충하는 이외에는 별 도리가 없다. 그러타고 경비문제 또한 도가 있으니 만큼 현상으로는 시내 각 학교 당국 측의 희생적 봉사심을 바랄 따름이다. ...(후략)..." (<삼팔이북학생 서울로 쇄도: 각학교는 희생적 봉사 하라!>, 《조선일보》1946.5.6. 2면 기사)

<삼팔이북학생 서울로 쇄도: 각학교는 희생적 봉사하라!>, 조선일보 1946.5.6. 기사


일신국민학교 5학년에 재학중이던 노만은 해방 공간 서울에서 벌어지던 혼란상을 그대로 목도했다. 해방 직후 미군정 시기 서울에서 벌어진 극심한 좌우 대립 광경을 본 일도 잦았다. 노만은 이와 관련해 국민학생 시절 겪었던 일화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때만 해도 군정시대였으니 우익 쪽에서는 서울운동장에서, 좌익 쪽에서는 남산에서 모여서 집회 하는 광경들도 숱하게 보았다. 어린 나이에도 뭔가 심각하구나, 너무 혼란스럽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루는 하굣길에 우리 국민학교 담벼락에 붙은 공산당 포스터를 본 적이 있었다. 지금 그 포스터 속 표어가 무슨 문장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공산당', '사회주의' 운운하는 꽤 과격한 표어와 그림이 그려져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 포스터를 보자마자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담벼락으로 다가가 그것을 북북 찢어버렸다. 포스터를 찢어버리고 난 후,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곤 냅다 도망쳤다. 당시 국방경비대가 있었던 중부세무서 쪽 골목이었다. 우리 가족들은 이북에서 맨 몸으로 왔는데... 우린 이북에서 지주도 아니었고 친일파도 아니었다. 잘못한 것도 없었고. 그런데 아버지가 금융조합 출신이라고 친일파라고 보았던 건지, 그들에게 미움을 받고 탄압을 받았던 것이 북받쳐 올랐던 것이다."

왜성대로 불린 은사기념과학관. 해방 이후 국립과학기념관으로 개칭 운영되다가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었다. (c) 티스토리


월남 이후 서울에 정착한 노만이 기억하는 또 한 가지는 서울 남산 예장동에 위치한 국립과학박물관에서 영화 구경을 한 일이다. 이것은 그가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유년 시절 영화 체험이다. 일제강점기 은사과학기념관(恩賜記念科學館)으로 불린 이 곳은 1925년 5월 10일 천황의 결혼 25주년을 기념하여 은사금 17만엔이 동원되어 이듬해인 1926년 1월 창설을 준비하여 1927년 5월 구 통감부 건물에 개관된 과학박물관이었다. 이곳에 '은사'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천황으로부터 받은 은사금을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것으로, 그 속뜻은 식민지조선에 천황의 은덕을 베풀어 과학문명이 전파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해방 직후 1945년 10월 13일 이곳은 국립과학박물관으로 개칭되어 운영되다가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9월 27일 폭격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정인경, <은사기념과학관(恩賜記念科學館)과 식민지 과학기술>,《과학기술학연구》5호, 한국과학기술학회, 2005, 70~71쪽) 현재 이곳에는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자리하고 있다.


소년 시절 노만을 매혹시킨 것은 그곳에서 본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의 무성 코미디 영화들이었다. 실제로 1946년 당시 국립과학박물관에서는 5월 5일 어린이날 기념 행사를 비롯해(<무료영화를 상영>, 《조선일보》1946.5.3. 2면 기사)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무료 영화 상영을 자주 개최했다. 노만은 이 때의 영화 관람 경험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당시 친구들과 우리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남산을 자주 올라갔다. 그때 '과학관' 강당에서 보았던 찰리 채플린 영화, 버스터 키튼 영화, 또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채플린과 키튼의 단편영화들 거의 대부분 작품들을 그곳에서 보았다. 특히 버스터 키튼은 '웃지 않는 코미디' 아닌가. 기차가 나오고, 온갖 몸짓과 액션이 나오고, 하는 광경이 지금도 기억난다. 우리 친구들과 나는 하루종일 거기 있으면서 줄곧 영화를 보았다. 그때만 해도 극장 구경은 걸리면 곧 '퇴학'감이었다. 국민학생들이 볼 마땅한 영화들도 없었으니까. 우리가 들어가 볼 수 있는 영화라고는 그곳의 그 영화들이었다. 하루종일 봤던 영화를,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았다. 이후에도 친구들과 과학관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 밖에 기억에 남는, 서울에 와서 영화를 보았던 경험은 1949년 중학교 2학년 시절 중앙극장에서 학단체관람으로 보았던 <마음의 고향>(1949, 윤용규 감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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