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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Jun 27. 2024

서울중학교에 입학하다

영화사가 노만 9

노만은 1948년 3월 서울중학교에 입학한다. 서울 서소문 경희궁터에 위치했던 서울중학교는 1909년 5월 일제에 의해 설립된 경성중학교가 그 전신이다. 해방 직후인 1946년 3월 이 학교는 '서울공립중고등학교'라는 명칭으로 재건, 신설되어 초대 교장인 김원규(金元圭, 1904~1968)가 부임하여 6년제 중고등학교 과정으로 다시 운영되었다. 특히 김원규 교장은 새로이 개교한 학교의 교육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담당 교사들을 적극 초빙해 꾸렸다. 평양고보 출신의 그는 해방 이후 경기도 학무과장을 역임했고, 서울중고등학교 교장을 거쳐 1950년부터 1952년까지는 서울시 교육국장을 역임하면서 중, 고등학교 6년제 학제를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학제 개편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했다. (백창민, <'감옥소'라고 불린 고등학교의 놀라운 서울대 진학률: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학교도서관 선구자 김원규 ①>, 오마이뉴스 2021.3.19.)

노만은 1948년 3월 14세의 나이에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 전쟁기를 거쳐 1953년 2월까지 서울중학교, 서울고등학교에 재학했다. 이 사이 1951년 9월 6년제 학제가 중, 고등학교 3년제 과정으로 각각 분리되면서 '서울중고등학교'는 '서울중학교'과 '서울고등학교'로 분리 재편되었고, 서울중학교는 '서대문중학교'로 개칭했다. 노만의 서울중, 고등학교 재학 시절은 이후 그가 문학적 감수성과 재능을 키워가면서 국문학을 전공하게 되고 영화기자, 저술가로 몸담게 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해방기와 전쟁기의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그는 이 시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서울중학교 1학년(1948년). 맨 앞줄 중앙이 담임교사 정덕화. 맨 뒷줄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중학교 1학년 노만. ⓒ 노만, 한상언영화연구소 제공.


"해방 직후 서울중학교는 일제 당시 경성중학교 시절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개교 초기에만 하도 이북에서 내려온 학생들을 다수 받아들였다. 우리 선배들인 1, 2, 3회 졸업생들이 대부분 그러했다. 우리 때만 해도 6년제 학제였다. 오늘날처럼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학제로 편성된 것은 전쟁 중에였다. 이후 정부가 수립되고 점차 학제가 재편되면서 입시 제도가 마련되었다. 우리 바로 앞 기수인 5회 졸업생 선배들 부터 입시를 치르고 학교에 입학했다.

서울중학교에는 훗날 각 분야에서 활약하게 되는, 당시로서도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다. 훗날 철학교수가 된 안병욱(安秉煜, 1920~2013) 선생이 영어를 담당했고, 국문학자인 유창돈(劉昌惇, 1918~1966) 선생, 시인 조병화(趙炳華, 1921~2003) 선생도 재직하고 있었다.

소설가 황순원(黃順元, 1915~2000) 선생은 국어 담당이었다. 황순원 선생님과는 중학교 이후 고등학교 시절에도 문예반 활동을 통해 계속해서 가르침을 받고 교분을 쌓았다.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내주신 과제가 일기를 제출하는 것이었다. 나는 수업 시간에 황 선생님이 내 일기와 작문을 보고 해주신 칭찬에 용기를 얻어 줄곧 열심히 썼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썼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때 일기를 열심히 쓴 것이 나름 커다란 문장 연습이 되었고, 나중에는 소설을 비롯한 문예 작품을 직접 창작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차츰 일었다. 그래서 문예반에 참여했다. 황 선생님은 이후 발간된 교지 《경희》와 학교 신문 《경희보》에 실리는 문예반원 학생들의 문예 작품을 직접 선정하기도 했다. 선생님의 손을 거쳐야 교지와 신문에 작품이 실릴 수 있었다. 우리 문예반원들은 당시 여러 문예지에 실린 선생님의 최신 발표 작품들을 관심있게 찾아 읽기도 했다. 선생님의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소나기> 같은 소설은 발표년도가 1953년이었으니 그 이후에 읽었던 것 같다. 가까이서 느꼈던 선생님 조용하고 자상한 성품에, 매우 신사적인 분이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선생님들이 또 있다. 중학교 2학년 시절 담임이었던 홍찬희(洪燦憙) 선생이다. 수학 담당이었던 홍 선생님은 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 1888~1968)의 사촌동생이었다. 특이하게도 그는 '순 우리말주의자'였다. 이를테면 '비행기'를 '날틀', '이화여자대학교' 같은 말도 '배꽃계집큰배움터', 이런 식의 일상 언어 사용을 주장한 분이었다. 심지어는 별 상관이 없는 수학 시간에도 이를 강조했다. 담임을 맡고 있던 우리 반 학생들에게도 평상시에 '순 우리말' 어휘를 쓰지 않으면 야단을 치기도 했다. 나중에 전쟁 발발 직후 서울이 인민군 치하에 놓이게 되자, 그는 학교 '책임자'를 자처하며 학생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인민군 의용군으로 보내는 등 앞잡이 노릇을 했다. '이제 사회주의 세상이다' 했던 것이다. 담임 교사였을 때나 수업시간에도 '사회주의'나 이념에 관련된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일절 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국가보안법이 막 공포되고 난 직후였으니, 그런 모습을 숨기고 있었을 것이다. 전쟁 이후 그는 월북하여, 김일성종합대학의 꽤 높은 직책을 역임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사회주의자' 였던 김풍섭 선생은 9.28 서울 수복 당시 월북하지 못하고 학교 학생들에게 집단 린치를 당하기도 했다.

그 밖에, 음악을 담당했던 이성삼(李成三, 1914~1987) 선생과 서수준(徐守俊, 1913~?) 선생이 있었다. 이성삼 선생은 나중에 경희대 음대 교수와 한국음악평론가협회 회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서수준 선생은 우리 학교의 합창반과 고적대 지도 교사였다. 체육을 담당한 조식(趙永植, 1921~2012) 선생은 전쟁 이후 '신흥대학'을 인수하여 '경희대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 이 '경희(慶熙)'가 우리 학교가 있던 경희궁터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서울중, 고등학교에 재직했던 선생님들 다수가 경희대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것도 이를 계기로 해서였다."

서울중학교 2학년(1949년). 맨 앞줄 중앙이 담임교사 홍찬희. 뒤에서 두번째줄 맨 오른쪽이 중학교 2학년 노만. ⓒ 노만, 한상언영화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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