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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Jun 17. 2024

프롤로그 / 연재를 시작하며

영화사가 노만 1

기사를 쓰고 있는 노만. 1956~1957년 경. ⓒ 노만, 한상언영화연구소 제공.




2022년 4월 어느 날, 원로 영화평론가 김종원(金鍾元, 1937~)은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것은 1960년대 영화비평가협회 창립 멤버로 함께 협회를 함께 이끌던 영화계 선배 노만 근황을 근 반세기 만에 접한 것이었다.

그해 1월. 노만은 대학 동기 박병채의 장례식장을 친구와 방문한다. 그 자리에서 박병채의 생질(누나의 아들) 성종무를 처음 만나게 된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노만은 그가 영화계 종사자임을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성종무는 김기덕 감독의 <시간>(2006), <숨>(2007)의 촬영감독이었다. 영화와 관련한 이런저런 대화가 오고 가던 중, 노만은 과거 자신의 영화계 활동 이야기를 꺼내며 문득 김종원의 근황을 물었다. 성종무는 김종원 이 여전히 활동하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건넸다. 그리고 영화연구가 정종화(鄭宗和, 1942~)에게 김종원의 연락처를 문의해 보겠다고 답했다.

성종무로부터 노만의 등장을 접하게 된 정종화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방대한 영화 자료 수집가이자 '충무로의 마당발'로 유명한 그는 고교시절 노만이 쓴 등사본 『한국영화사』를 읽고 영화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을 정도였다. 이후 정종화 김종원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리하여 노만과 김종원, 두 사람은 그해 4월 무려 50여 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2022년 4월 30일 충무로 음식점 '진고개'에서. 왼쪽부터 영화평론가 김종원, 영화사가 노만, 영화연구가 정종화. ⓒ 영화연구가 정종화 페이스북.

성종무, 정종화, 김종원으로 이어진 이들은 '진고개 모임'이라는 이름 하에 충무로 인근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정기 친목 모임을 갖고 있다. 김종원은 2023년 출간된 자신의 회고록 『시정신과 영화의 길』(한상언영화연구소, 2023)에서 이 만남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오랫동안 소식이 끊겨 세상에 없는 존재로 여겼던 노만 선배와 만나게 된 것은 옛 영화계의 마당발 정종화 덕이었다. 어느 날 정종화가 연락을 해와 한 측근 후배의 연결로 노만 선생을 만났다는 것이다. 1960년 영화평론가협회의 창립은 물론 1965년 재발족될 때 이영일 회장과 우리는 총무간사와 기획간사로 집행부에 있었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부터 모임에 빠지기 시작하더니 영화계와는 아예 발길이 끊겼다. 그가 맡았던 기획간사 자리는 미국에서 돌아온 하길종이 이었다. 그 뒤 1978년 영화학회가 발간하는 《영상예술》제2집에 「춘사 나운규의 인간과 작품활동」이라는 글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세상에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랬던 그가 살아있다니, 하도 반가워 정종화로부터 받은 전화번호로 숫자를 찍는데 거의 동시에 전화가 걸려왔다. 노만 선배였다. ... 2022년 4월 13일 오후 2시 44분이었다. 당장 만나고 싶었지만 서로 일정을 맞추다 보니 16일 만에야 만날 수 있었다. 정종화의 단골 음식점인 충무로3가의 진고개에서였다 ...

52년 만에 만난 그의 모습은 아주 여유롭고 건강해 보였다. 우리 셋은 점심 식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옛 시절로 돌아가 명동과 충무로 시대의 영화 이야기를 쏟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이날 그가 예전 한국배우전문학원에서 강의할 때 교재용으로 사용했던 등사판 저서 『한국영화사』(1963)와 여원사 발행 『다시 보고 싶은 영화』(1959), 『세계의 배우 70인』(1960) 세 권을 들고 갔다. 일부러 기억을 되살리고 놓쳤던 서명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자신은 이 책 모두 갖고 있지 않다며 반가워했다.

그는 식당 아줌마에게도 잊지 않고 팁을 쥐어주는 여유로운 노신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점심 식사가 끝나면 으레 진고개 맞은편 작은 골목에 있는 옛날식 초원다방으로 가서 다시 가물거리는 추억을 불러내었다. 그러고도 2시간 이내에 일어서 본 적이 없다. ...(중략)... 그동안 계절과 입맛에 따라 다른 식당을 찾기도 했지만 나는 이 모임을 '진고개 모임'이라고 부른다. 발음은 식당 이름(珍古介)과 같지만, 우리가 주로 만나는 곳이 흙이 진 고개(泥峴), 즉 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룬 충무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김종원, 『시정신과 영화의 길』, 한상언영화연구소, 2023, 609~611쪽)


노만(魯晩)은 누구인가? 본명은 노만길(魯萬吉). 1935년 평안도 용강군에서 출생한 그는 서울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4년 서울대 국문과 1학년 재학 당시 잡지 《영화세계》기자 생활을 시작으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이후《국제영화》, 《스크린》, 《영화예술》등의 잡지를 거쳐 한양대, 중앙대, 한국배우전문학원 강사로 한국영화사, 영화이론 등을 강의하면서 『한국영화사』를 집필, 간행했다. 그가 쓴 『한국영화사』는 해방 이후 최초로 쓰여진 한국영화 통사로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또한 그는 1960년 영화비평가협회, 1965년 11월 재창립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의 핵심 주요 창립 멤버로 활동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영화제작사 칠성영화주식회사를 설립하여 <갯마을>(1965, 김수용 감독), <만추>(1966, 이만희 감독)의 미주 수출 판권을 사들여 영화 제작 및 수출업을 겸하기도 했다. 이처럼 의 영화계 활동은 영화기자, 영화잡지 편집장, 저술가, 평론가, 영화사가, 교육자, 제작자, 사업가 등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그런 그가 어느날 영화계에서 돌연 종적을 감추었다. 1970년대 이후 그는 영화계와 발길을 끊고 다른 사업에 종사해왔다. 1972년 1월 그가 운영하던 칠성영화주식회사가 등록 취소되면서 영화 제작업을 접었고,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활동에서도 차츰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1978년 한국영화학회 학술지 《영상예술》2집에 실린 글 「춘사 나운규의 인간과 작품활동: 그의 40주년을 기념하여가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마지막 흔적이었다.

'노만 구술 컬렉션'.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이후 노만은 김종원으로 인해 연결된 영화계 후학들과 만나게 됨은 물론, 과거 영화계 활동과 업적이 재조명받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같은해 9월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김종원의 제의로 '원로 영화인 생애사' 구술채록이 이루어졌다. 9월 14일, 21일, 10월 7일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총 세 차례 이루어진 대담은 영화사연구자 남기웅(아주대 강사), 이수연(한국영상자료원)이 담당했다. 이후 구술채록문은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의 '노만 구술 컬렉션' 페이지를 통해 공개되었다. (https://www.kmdb.or.kr/collectionlist/detail/view?colId=761&isLooked=false) 또한 남기웅은 이 구술채록을 토대로 작성한 학술논문 「'전사(全史)'라는 욕망, 전사(前史)가 된 '최초의 정사(正史)': 노만의 『한국영화사』(1964)를 중심으로」(『한국학연구』73집,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24)를 통『한국영화사』가 갖는 학술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2023년 출간된 노만의 『한국영화사』(법문사, 2023). 철필 등사본을 저본으로 60년만에 정식 출간된 이 책은 2023년 세종도서 학술부문 우수도서에 선정되었다.

이듬해인 2023년 2월에는 출판사 법문사에서 『한국영화사』가 정식 출간되었다. 김종원이 소장하고 있던 등사판을 저본으로 이 책의 출간 작업이 이루어졌다. 법문사 편집부에 재직 중인 장녀 노윤정과 중국문학을 전공한 외손녀 최지현이 국한문 혼용으로 된 원문의 컴퓨터 입력 작업을 맡았고, 출판사 교학사에서 표지 디자인을 담당해왔던 사위 최만길이 장정을 맡아 출간을 적극 도왔다. 약 1년간의 준비 끝에 출간된 이 책에는 김종원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구술채록을 담당했던 남기웅, 이수연, 한국영화연구동인회 대표인 촬영감독 성종무의 발문이 수록되었다. 또한 등사본에는 수록되어 않았던 다수의 영화 스틸컷과 화보들이 함께 수록되었다.

김종원은 「『한국영화사』재출간 의미」라는 추천사에서 이 책이 "황무지나 다름없는 이 분야에 초석을 깔아놓은 역저"라고 평하면서 1963년 당시 "마땅한 교재가 없는 한국배우전문학원이나 갓 출범한 한양대학교 등 몇 군데 대학의 영화학과 학생들에게는 단비와 같은 교재"였다고 말했다. 노만의 책 이전에는 1939년 박누월이 쓴 『영화배우술』(삼중당, 1939)에 수록된 <조선영화발달사>, 해방 이후 1946년 3월 잡지 <인민평론>에 수록된 김정혁의 <조선영화사>와 같은 개략적인 서술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거의 60년만에, 그것도 저자가 90세를 바라보는 시점에 영인본이 아닌 어엿한 인쇄본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에 축사를 보냈다.

책 말미에는 노만이 쓴 출간 후기가 수록되었다. 그는 이 글에서 "영화예술의 흐름을 이해하여야만 한국영화의 본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국적이란 무엇일까"라는 근본적인 문제의식 하에 이 책이 쓰여졌음을 밝혔다. 대학 졸업논문인 「씨나리오문학론」을 쓰면서 한국영화의 흐름을 정리할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집필 당시 주요 출판사들을 통해 출간을 타진했으나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좌절되어 철필 등사본 교재로만 남아있던 이 책이 무려 60년만에 출간된 감회를 밝혔다. 출간 이후 이 책은 2023년 세종도서 학술부문 우수도서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최근 2024년 5월, 충남 천안 책방 노마만리에서 그의 한국영화사 출간 60주년을 기념하는 기획전시가 개최되었다. 책방 노마만리, 한상언영화연구소의 한상언 대표가 마련한 이번 기획전시는 다시 영화계와 후학들에 모습을 드러낸 선생의 활동과 업적을 다시금 재조명받게 했다.


가장 최근인 6월 초,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한국영화 100선'을 발표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창작자, 연구자 등을 대상으로 현재 필름이 남아있는 영화들에 한해 리스트를 선정했다.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정종화 팀장이 건넨 10편의 영화 선정란에 노만이 선정한 영화들은 다음과 같다. <수업료>(1940, 최인규 방한준 감독), <마음의 고향>(1949, 윤용규 감독), <피아골>(1955, 이강천 감독), <단종애사>(1956, 전창근 감독), <자유부인>(1956, 한형모 감독),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신상옥 감독), <오발탄>(1961, 유현목 감독), <하녀>(1960, 김기영 감독),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이만희 감독), <별들의 고향>(1974, 이장호 감독). 특별언급으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 배용균 감독)을 꼽았다. 지난주 6월 11일 화요일, 서울 공덕동 자택 인근에서 선생을 뵌 나는 이 리스트를 보고 '선정의 변'과 함께 여기에 얽힌 이야기들이 궁금해졌다.


"<수업료>는 어릴 때, 일제시대 국민학교 다닐 때 봤던가, 기억이 아련하다. 최근 와서(2013년) 이 영화가 발굴되었다고 들었는데 아직 다시 보지는 못했다. <마음의 고향>은 서울중학교 2학년이던 1949년 중앙극장에서 학생 단체관람으로 이 영화를 보았던 적이 있다.

<피아골> 같은 작품은 전쟁 이후 나온 수작이었다. 이 무렵부터 '한국적'이라는게 무엇인가? 하는 모색과 논의들이 차츰 시작때였다. 전창근 감독의 작품으로는 <단종애사>를 꼽았다. 전창근 감독을 처음 만난 것은 1955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영화세계> 초년 기자 시절, 당시 영화인들이 자주 드나들던 명동 휘가로다방에서 처음 만나 인연이 됐고, 그 후 줄곧 친밀한 사이가 됐다. 전 감독은 초년 기자였던 내게 함께 식사 하자고, 많이 챙겨줬다. 전창근과의 이러한 인연은 1963년 그가 이종기 감독과 공동 연출하고 내가 제작자이자 투자자로 참여하게 되는 <광야의 왕자 대 징기스칸>에 까지 이어졌다. 특히 그는 상해 시절 이야기를 많이 자주 했다. 국민학교 때 <자유만세>도 봤는데, 필름이 현존하는 영화들만 대상으로 선정한다는 (한국영화 100선 리스트 작성에서) 영화 프린트가 없는 줄 알았다. 물론 그 영화도 꼽을 수 있겠다.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은 정비석의 소설과 동명 원작 연극 이외에도, 물론 화제작이었지만 당시 영화는 특별히 기억에 남진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당시 흥행작이었다는 점에서 꼽았다. 한형모 감독과의 인연이라면 1957년 무렵 <국제영화> 기자시절 그의 영화 <마인>(1957)의 촬영 현장을 취재하러 갔다가 우연히 엑스트라로 출연한 경험이다. 김내성의 동명 인기 탐정소설을 영화화한 스릴러 미스터리 영화였다. 나는 그 현장을 취재하러 갔다가. 실제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 영화를 촬영했는데 그때 기차 승객 중 한 명으로 프레임에 모습을 비춘 적이 있었다. 영화 엑스트라는 처음이었다.

<오발탄>의 유현목 감독과는 아주 친했다. 유 감독이 시나리오랑 콘티 작업을 할 때 여관에 머무를 때 같이 술을 마시기도 하고, 자주 어울렸다. 10살 가까이 차이가 났는데도 허물없이 친밀하게 지냈다.

신상옥 감독 영화로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꼽았다. 신상옥 감독과는 이렇다할 친분이나 접점은 없었다. 그의 작품들이 상업적으로나 매끈하게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 내겐 이렇다할 인상을 남긴 작품은 크게 없었던 것 같다. 마주친 경험이라면 강원룡 목사가 크리스찬아카데미의 개원식을 할 때 영화인들을 초대해 좌담회를 열었을 때 마주했던 적이 기억에 남는다.

김기영 감독은 잘 알려진 그대로 '괴짜'였다. 부스스한 머리에 고무신 신고 다니고. 이만희 감독 영화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을 꼽았다. 이후 영화제작업을 하면서 제작자인 호현찬씨 한테서 <만추>의 수출 판권을 샀다. 서울의 한 스튜디오에서 하루 빌려 이 감독을 불러 검열로 잘려나간 장면을 재촬영했다. <만추> 같은 영화도 꼽을 수 있을텐데, 이 역시 필름이 남아있지 않으니. <별들의 고향>은 흥행 측면에서 1970년대 한국영화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지 않을까.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그 영화가 표출하고 있는 불교적인 세계관이나, 특히 카메라워크가 아주 인상적이어서 특별히 언급했다.

최근 영화 중에 <기생충> 같은 작품은 아카데미 상 받은 것이나, 세계적으로 그런 건 물론 높이 인정해야한다. 그런데 난 그거 좀 못 마땅하다. 하여튼 내 생각은 그렇다.

영화 일을 접은 이후에도, 괜찮은 작품이 걸리면 꾸준히 보았다. 요즘에는 일주일에 한 번, 매주 목요일 마다 나를 포함한 세 명의 친구들이 영화를 보러 간다. 우린 노인들이니까 관람요금 6천원까지도 해준다. 가장 많이 가는 영화관은 잠실 롯데타워에 있는 영화관이다. 규모가 크고 상영관이 제일 많다. 코엑스에 있는 영화관도 가고, 9월에 곧 폐관하는 대한극장도 종종 간다. 만나서 그때 그때 시간 되는 것에 따라 본다. 영화가 재미 없으면 자기도 한다(웃음). 최근 본 개봉 영화로는 나문희 김영옥이 출연한 <소풍>(2024, 김용균 감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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