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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Jun 25. 2024

<저항 속에 싹터온 한국영화>(1962) ②

영화사가 노만 7

잡지 《사상계》1962년 5월호에 실린 노만의 <저항 속에 싹터온 한국영화> ⓒ 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

(①에서 계속)


과도기

<개화당이문>(1932, 나운규 감독)의 하소양(여, 왼쪽), 윤봉춘(남, 오른쪽)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서 <운영전>을 감독한 윤백남은 그 작품이 끝나자 그 회사와 손을 끊고 상경하여 백남푸로덕슌을 설립했다. 이 백남푸로덕슌은 한국 최초의 독립프로덕슌으로 제1회 작품은 <심청전>이었다. 을지로5가에 있었던 이 푸로덕슌에서는 '순조선영화제작'과 외국영화수입을 목적으로 설립했던 것이다. 이 백남푸로덕슌에서는 부산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소속해 있던 이경손, 윤봉춘, 김태진(남궁운), 나운규, 김우연, 서천수양(촬영기사) 등이 있었다. 여기서 <심청전>을 촬영하는 한편 연구생을 모집하여 신인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때 연구생으로 입사한 사람 중에는 현재 활약하고 있는 전창근도 있었다. 1925년 3월에 완성한 이 작품은 이경손 감독, 각색에 김우연 주연으로 발표되었다. 이 작품 역시 흥행의 성공으로 계속하여 이광수 원작의 <개척자>를 크랑크·인 했다. 이경손 감독에 의해 촬영하는 한편 윤백남은 <심청전>을 일본으로 수출하기 위해 도일했다. 그러나 이미 <춘향전>, <해의 비곡> 등의 작품을 본 일본인들은 다시 '조선영화'를 수입하려 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개척자>는 중단되고 백남푸로덕슌에서 탈퇴한 영화인들은 고려키네마를 조직하여 이 작품을 완성하여 그해 7월 단성사에서 개봉하였다. 이 고려키네마도 이 한 작품을 끝내고는 해산했으며 이어 현철과 배우학교에 관계하고 있던 이구영을 중심으로 고려영화제작소가 창립되었으니 제1회 작품이 <쌍옥루>였다. 전15권으로 된 이 작품의 제작비는 무려 7천원이었으며 출연은 김소진(기생 출신), 조천성과 일본에서 배우수업을 하고 귀국한 김택윤 등이었다. 이 회사도 이구영 감독의 <쌍옥루>를 발표하고는 문을 다고 말았다. <쌍옥루>를 각색, 촬영한 이필우는 이 작품을 끝내고 반도키네마를 설립하여 한국 최초의 희극영화 <멍텅구리>를 제작 공개했다.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동명의 만화(노도현 작)를 영화화한 이 작품은 당시 극계에 희극왕이었던 이원규 주연으로 완성하여 우미관, 조선극장에서 동시 개봉하였다. (1926.1.10)

  같은해, 즉 1925년에는 특기할 만 한 제작회사가 창립했으니 바로 계림영화협회였다. 신소설 작가로 유명한 조일제(중환) 주재로, 을지로 입구에 자리잡고 백남푸로덕슌이 부원을 맞아 창립했던 것이다. 제1회 작품으로는 조일제 변안소설 <장한몽>을 이경손이 각색, 감독했다. 주연으로는 주삼손, 김정숙이었고 그 외 정기탁, 강홍식, 이규설 등이 출연했다. 그런데 이 작품은 1역 2인이라는 웃지 못할 작품이 되어버렸는데, 그것은 주삼손이 촬영 도중에 행방불명이 되어 심훈이 주삼손 역(이수일)을 맡아 출연한 때문이었다. 막대한 제작비가 들기 때문에 새로 촬영할 수 없었던 실정이었다.

  이 <장한몽>을 끝내고 계속해서 <산채왕>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고려말 홍건적의 이야기로 조일제 원안을 이경손이 각색, 감독한 것이었다. 이 작품들은 모두 흥행 수입을 별로 올리지 못하고 말았으니, 자금난으로 더 이상 제작하지 못하게 되어 계림영화협회에 소속되어 있던 영화인들은 다른 회사로 뿔뿔이 헤어지고 말았다.

  이 계림영화협회 이외에도 작품을 제작하지 못하고 해산된 영화사는 동국문화협회, 선활사, 조선영화예술협회, 배우학교영화부, 물산장려회 촬영부 등이 있었다.

  이렇게 과도기적인 현상을 나타내고 있던 한국영화계는 나운규의 <아리랑>이 발표되면서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오게 되었다.


영화예술의 맹아기

  1926년 하반기부터 예술로서의 영화운동이 전개되었다. 이것은 역시 춘사 나운규의 작품 <아리랑>이 표되면서 표면화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1926년에 창립된 조선키네마는 일인 정이란 인물(김창선)이 주관하여 당시 욱정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조선키네마에는 계림영화협회에서 탈퇴한 이규설, 나운규 등이 주동이 되어 제1회 작품은 일본 유행가를 영화화한 <농중조>였다. 이 작품은 이미 일본에서도 영화화된 것으로, 일인 김창선에 의하여 제작된 이 영화는 일본영화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이 <농중조>에는 복혜숙이 데뷰했고 나운규, 이규설 등이 출현했다. 이 작품을 끝낸 조선키네마에서는 제2회작으로 나운규의 <아리랑>을 착수했다.

  오늘날 아리랑은 한국의 대표적인 민요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당시에는 지금 같이 알려진 민요가 아니었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나온 이후에야 바로소 널리 알려졌고 누구나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춘사 나운규의 공이었다. 나운규가 민요 아리랑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경손 때문이었다. 이경손은 영화계에 들어 오기 전부터 민요와 동요에 조예가 깊었다. 그가 부산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입사한 후에도 많은 동요와 민요를 지상에 발표한 바 있었다. 이경손과 같이 일하고 있던 나운규는 그의 노트에서 이 아리랑이라는 민요를 보고 시나리오를 집필하게 되었다. 나운규는 또한 처음으로 감독까지 맡아 <아리랑>을 완성했다.

  이 <아리랑>은 한마디로 말해서 저항적인 작품이었다. 비록 미친놈을 주인공으로 설정했으나, 그 주인공의 행동은 정당한 것이었다. 이것은 일제하에서 정상적인 사람을 주인공으로 설정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미친놈은 그 당시의 한국민을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환상의 사막 씬은 나운규의 사상을 담은 것이었다. 사막에서 대상에게 물을 구걸할 때 대상은 물을 마구 버리면서도 목타서 죽어가는 청춘남녀에게 주지 않는다. 단 자기의 요구를 들어주면 줄 수 있다고--, 여기서 물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물질(돈) 혹은 일제로 해석할 수 있다.

<아리랑 3편>(1935, 나운규 감독). 왼쪽부터 윤봉춘, 신일선, 전택이, 나운규.

  한편 영화기법으로 볼 때에도 이 작품에서 그런 환상은 곧 주인공의 심리적인 변화를 강조하고 있으니 이것은 곧 몽따쥬의 성공이었다.

  나운규의 이후 작품도 모두가 민족적인 정신이 깃든 저항적인 면을 표현하고 있다.

  나운규의 <아리랑>이 개봉되자, 백남푸로덕슌 때 연구생으로 입사했던 정기탁이 독립푸로덕슌을 설립하여 이경손을 맞아 <봉황의 면류관>을 제작했다. 이 영화는 젊은 남녀의 사랑을 그린, 당시 가장 모던한 작품으로 인기를 모았다.

  한편 조선키네마에서는 <아리랑>의 성공으로 나운규는 계속해서 <풍운아>를 발표했고(1926.12) 이규설, 서봉옥을 중심으로 조직된 토성회에서는 그 이듬해 시대극 <불망곡>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한때 검열에 통과되지 않아 재정리하여 상영했으니 한국영화사상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 작품은 서월영, 김소진 주연으로 제작되었으며 이어 제2회작으로는 <홍련비련>을 착수했다. <홍련비련>은 덕수푸로덕슌과의 합작으로 역시 각본, 감독에는 이규설이었고 주연에는 복혜숙, 이규설 등이었다. 두 작품을 제작한 토성회는 흥행의 실패로 그 후 해산하고 말았다.

  이 해(1927)에 새로 제작 회사가 설립되었으니 극동키네마사였다. 김철산, 김수로 등이 주동되어 창립된 극동키네마사에서는 첫 작품으로 <괴인의 정체>를 발표했다. 소위 기사탐정극이라고 하야 최초의 탐정영화를 제작했던 것이다. 김수로 감독에 김철산, 신일산 주연의 이 작품은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로 인기를 얻었다. 다시 그해 6월 제2회 작품으로 <낙원을 찾는 무리들>을 제작했다. 이 작품의 감독은 일본에서 영화연구를 한 유봉열(황운)이 담당했다.

  한편 이해 3월에는 김택윤영화사가 발족했다. 오랫동안 일본 제국키네마에 있던 김택윤이 설립한 이 독립푸로는 <흑과 백>을 제작했다. 제작, 각본, 감독, 주연에는 김택윤이고 나운규, 이규설 등이 출연하였다. 그해 4월 26일에 개봉한 이 작품은 호평을 받았다. 특히 그때까지 발표한 다른 작품에 비하여 촬영이 선명했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었다. 그러나 김택윤영화사도 이 한 작품으로 해산하고 말았다.

  <아리랑>, <풍운아>를 발표한 조선키네마사에서는 계속해서 <들쥐>(9권)를 제작하여 이해 4월에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이 <들쥐>에는 나운규와 동향인 윤봉춘이 데뷰했고 이창용이 촬영을 담당한 작품이었다. 7월에는 다시 <금붕어>를 발표했으며 촬영에 이창용과 이명우(이필우의 동생)였고 각색 감독에는 춘사 나운규였다.

  나운규는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조선키네마를 사퇴하고 나운규푸로덕슌을 창립했다. 춘사가 조선키네마에서 나온 것은 일인제작자와 뜻이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흥행 성적이 좋다해도 이익이 돌아오지 않으므로 생활은 항상 허덕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생활의 위협은 춘사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영화인들은 모두 한결 같았다. 더구나 제대로 출연료를 받지 못한 때이니 만큼 그것은 당영한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나운규프로덕슌에서는 제1회 작품으로 <잘있거라>를 제작 발표했다. 여기에 관계한 영화인들은 모두 나운규푸로덕슌의 멤버로 촬영 이창용, 제화 이명우, 지휘 박정현, 출연 주삼손, 이경선, 윤봉춘, 이금룡, 전옥, 김연실 등이었다.

  한편 증자운동으로 일년간 작품 제작을 중단하고 있던 계림영화협회에서는 이해 4월에 <고 월남 이상재 선생 장의식실황>이라는 뉴스 영화를 제작하고 이어 심훈 감독의 <먼동이 틀 때>를 발표했다. 심훈은 일찌기 일본 영화계에서 수업한 바 있으며 <장한몽>에도 출연한 신인이었다. 더구나 이 작품에는 한국 초유의 삽화가였던 안석영이 신일선과 함께 출연하고 있다. 어느 전과자의 기구한 운명을 그린 이색작이었다.

  또한 이 해 9월에 발족한 금강키네마에서는 변사 출신의 김영환 감독으로 <낙화유수>가 발표되엇으며, 나운규 탈퇴 이후 조선키네마에서도 <뿔빠진 황소>를 제작했으니 감독에는 김창선, 주연에 주인규, 이규설, 김소영, 이월화 등이었다. 이 조선키네마에는 새로 이규설이 입사하였던 것이다. 이어 조선영화제작소가 창립되며 <운명>을 발표했다.

<복지만리>(1941, 전창근 감독)의 전옥(여, 왼쪽)과 심영(남, 오른쪽)(좌), <성황당>(1941, 방한준 감독)의 전택이(남, 왼쪽)와 현순영(여, 오른쪽)(우).

  이 해에 작품을 발표하지는 못했으나 고려영화제작소, 평양키네마, 개성영화제작소, 서광키네마, 대구영화제작소, 조선영화예술협회, 대륙키네마 등이 새로 발족했다.

  1928년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작품이 다수 발표되었다. 그러나 나운규의 독무대가 되다시피 했으니, 그것은 뒤를 대어주는 자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작품의 질은 흥행 위주의 경향으로 흘렀으니, 이것 역시 영화기업으로 확립이 되지 않은 까닭이라 하겠다. 더구나 총독부의 검열이 강화되어 흥행가치와 함께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그런 가운데 현실생활의 일단면을 반영시키고 있었다. 생활의 빈곤과 비애, 그리고 이향--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문제는 그 당시로서는 가장 한국민의 절실한 현실이었다.

  이해 1윌에 나운규 푸로의 <옥녀>가 공개되었고 대륙키네마에서는 <나의 친구여>가 유장안 감독에 의해 발표되었다. 동사에서는 이어 2회작 <지나가의 비밀>이 역시 유장안 감독, 복혜숙, 이월화, 나웅, 서월영 출연으로 제작했다.

  또한 조선영화예술협회에서는 <유랑>이란 작품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경향파 문학인들이 관계한 것으로, 김유영 감독, 한창섭 촬영, 임×, 조경희 주연으로 제작되었다. 이 조선영화예술협회는 1927년 3월 이경손, 안종화, 이우 등의 발기로 창립하여 첫 작품을 최학송의 소설을 영화화하려 했으나 좌절되었다. 이어 <이리에>(낭군)라는 시나리오를 안종화 감독으로 제작하려 했으나 이 역시 실패했던 것이다. 더구나 이 조선영화예술협회는 신인 양성도 했으니 젊은 여인 출신이 제1기 연구생으로 나와 <유랑>이라는 작품을 완성했던 것이다. 이 경향파 문인 출신의 영화인은 경향적인 작품을 발표하면서 영화이론을 지상에 발표하기도 했다.

  한편 금강키네마와 서광키네마에서는 합동으로 <세동무>(12권, 김영환 각본 감독, 복혜숙, 이원용, 김연실 주연)를 발표했고, 김동평이 설립한 평양키네마에서는 이경손 감독으로 <춘희>(정기탁, 김일송 주연)를 제작 공개했다. <춘희>를 완료한 이경손은 이경손푸로덕슌을 설치하고 <숙영낭자전>(조경희 김강 주연)을 제작했다. 이경손은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고국을 등지고 상해로 건너가고 말았다(1929).

  이러한 반면 나운규는 계속해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었다. 나운규 푸로의 제3회작 <두만강을 건너서>는 일제의 검열로 제명이 세 번이나 바뀌는 사건이 일어났다. 즉 <저 강을 건너서>로 다시 <사랑을 찾아서>라고 하여 겨우 4월 25일에 개봉하게 되었다. (4월 10일에 <저 강을 건너서>로 전편 7권이 개봉했지만 중단) 이 <사랑을 찾아서>는 무려 14권의 작품으로 고향(고국)을 버리고 간도로 이민가는 것을 그린, 민족의 비극을 묘파한 거작이었다. 이어 동 푸로덕슌에서는 <사나이>를 발표했는데 감독에는 홍개명(홍일명의 백씨)이었고 촬영에는 손용진, 유신방이 데뷰한 작품이었다.

  나운규 푸로도 결국 제5회작 <벙어리 삼룡>(1929.1.19일 개봉)을 마지막으로 해산하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이 작품은 나도향의 동명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것인데 소위 문예영화로 호평을 받았다.

  1929년에는 서울키노(조선영화예술협회를 개칭)의 <혼가>(김유영 감독)와 진주에서 설립한 남향키네마의 <암로>(독고성 감독)가 단성사에서 동시 개봉되었고 조선극장에서는 김팔봉의 신문소설 <약혼>이 중앙키네마 제작으로 김영환 각본에 의해 발표되었다. 이어 그해 4월에는 금강키네마의 <종소리>가 (김상진 감독으로) 마지막 장식을 했다.

  이리하여 조선영화계는 침체상태로 들어가고 말았다. 가장 큰 원인은 경제상태의 악화였다. 1928년 여름에는 호남지방의 한발(旱魃)과 개성지방의 대홍수로 흉년을 초래했으니 전국민의 생활이 곤궁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반면 한국영화의 질적 저하로 그 인기가 차츰 상실되고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③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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