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창연 Jun 26. 2024

<저항 속에 싹터온 한국영화>(1962) ③

영화사가 노만 8

1962년의 노만. 잡지  《국제영화》 1962년 5월호 연재 <한국영화사> 1회에 수록된 사진.

(②에서 계속)


무성영화의 전성기

  1사(社) 1작(作)이라는 운명은 영화가 기업화가 되지 못한 조건으로 대개의 경우 한 작품을 완성할 자금조차 없이 영화사를 설립하고 나서 촬영을 하는 당시의 형편으로서는 당연한 결과였다. 이러한 영화계의 침체상태를 극복하기 위하여 교육계로 전신했던 윤백남이 1928년 11월에 조선문예영화협회를 창설하였다. 조선문예영화협회는 일종의 연구기구로 신인 양성과 아울러 영화제작 신극공연 등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먼저 그 달부터 연구생을 모집하여 영화, 연극 등의 실제적인 면에 치중하여 교육시켰던 것이다. 이 협회의 이사로는 이기세, 염상섭, 양백화, 김운정 등이었으며 안종화, 태전동(일인 촬영기사) 등의 영화인을 전속으로 영화 강의를 담당시키고 있었다. 결국 이 협회도 아무런 사업실적을 올리지 못한 채 신인 양성에 그쳤을 뿐이었다.

  또한 1929년 12월에는 침체 상태에 놓인 영화계를 타개하기 위하여 경향적인 영화인이 주동이 되어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네들은 고루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이렇다 할 아무런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1930년에 들어서면서, 그런대로 영화제작이 진행되고 있었으니 최남주 원작 <가화상>을, 안종화 각색, 감독으로 <꽃장사>를 비롯하여 <젊은이의 노래>, <회심곡> 등이 발표되었다. 한편 <벙어리 삼룡> 이후 지방순회극단에 파묻혔던 나운규가 나타나 <아리랑 후편>을 착수하여 발표했던 것이니, 어느 정도 영화계는 다시 활기를 띠우게 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전작보다 떨어지는 것이었고 다만 기술적인 면에서 약간 향상됐을 뿐이었다.

  그 이듬해 동양영화사에서 이구영 감독으로 <승방비곡>이 제작되었다. 동양영화사는 1925년 5월에 창립된 외국수입과 영화제작을 목표로 설립되었는데 초기에는 외화수입을 하고 있었다. 이때 이서구, 이익상, 안석영, 전홍진 등이 관계하고 있었다.

  <아리랑 후편>을 감독한 나운규는 계속하여 원방각사의 <철인도>를 발표하는 한편 경성촬영소(분도촬영소라고 칭함. 일본인 분도주차랑 경영)의 <금강한>에도 출연했다.

  또한 엑스키네마사에서는 <노래하는 시절>, 녹성키네마사에서는 <바다와 싸우는 사람들> 등을 발표했다.

  1932년에는 김옥균의 삼일천하를 그린 <개화당이문>이 유성키네마에서 제작됐다. 이 작품 역시 춘사 나운규 감독, 주연이었고 윤봉춘, 임운학 등이 출연했다. 또한 이 해에 <임자없는 나룻배>가 발표되었는데, 오랫동안 일본 신흥키네마에서 연구해오던 이규환이 귀국하여 감독한 작품이었다. 사공의 비극을 그린 것으로 철교를 도끼로 찍는 장면 같은 것은 기계문명에 항거하는 것 같으나, 이것 역시 일제에 대한 저항이었다. 한국영화사에서 빼놀 수 없는 가작이었다.

  그 이듬해에는 서선키네마의 <돌아온 영혼>(이창근 감독, 촬영)이 발표되었고 이어 동사에서는 <도시의 비극>을 제작했다.

  1934년 금강키네마에서는 안종화 감독으로 <청춘의 십자로>가 발표되었는데 신일선, 이원용 주연 작품이었다. 이 해는 이 한 작품으로 저물고 말았으니, 이러한 침체 상태는 토오키 영화의 도래 때문이었다. 1927년에 토오키의 실험적인 단편영화가 들어온 이후, 이 시기에 와서는 영화상설관이 거의 토오키 영화를 상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한국영화계에도 새로운 시련을 겪게 되었다.


토오키 시대

  1935년, 이 해는 한국영화에서 가장 귀중한 시기였다. 먼저 영화에서 시나리오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시나리오 작가협회가 결성되었으니 그 회원은 안종화, 이효석, 안석영, 김유영, 서광제 등이다.

  <임자없는 나룻배> 이후 이규환은 안석영 시나리오의 <바다여 말하라>를, 그리고 다시 <그 후의 이도령>, <무지개> 등을 발표했다.

  특히 이 해에는 차상은의 설립으로 한양영화사가 생겼으니 이태원에 촬영소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하게 되었다. 첫 작품은 나운규를 맞아 <강 건너 머을>을 발표하였고 이어 <아리랑 3편>을 착수하였다. 이 <아리랑 3편>은 최초의 토오키 작품으로 현순영, 전택이, 신일선, 김덕심 등으로 촬영에는 손용진이었다. 이 토오키는 오늘날과 같이 후시녹음이 아니라 동시녹음으로 완성했던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경성촬영소에서도 이필우, 이명우 형제의 노력으로 발성영화 <춘향전>을 촬영하고 있었다. 이필우는 이미 전부터 실험하고 있었으니 이 <춘향전>의 성공은 오직 그의 노력의 결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아리랑 3편>이 녹음의 불완전으로 작품을 고치고 있을 때, 먼저 상영하게 되었으니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는 <춘향전>이 그 영예를 획득하였다. <춘향전>으로 성공한 경성촬영소에서는 계속하여 <홍길동 후편>, <아리랑 고개> 등을 발표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무성영화가 계속하여 제작되고 하였으니 <춘풍>, <역습>, <인생항로>, <순정해협>, <청춘부대> 등이 그것이었다.

  1937년에 들어서면서 이규환은 <나그네>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일본 신흥키네마와 합작 영화로 원작, 각색, 감독은 이규환이었고 왕평, 문×봉 주연으로 완성했다. 이 <나그네>는 토오키영화의 우수작으로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절찬받은 작품이었다. 허무주의적인 색채가 농후한 이 작품은 인생에 대한 체념이었다. 이러한 작품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당시였다. 이 해는 소위 지나사변이 일어나 한국민에게도 전시체제를 강요하고 있을 때였다.

  한편 나운규도 <오몽녀>를 발표하였고 이 해 그는 그만 우리와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또한 이 해 늦게 안석영 감독으로 <심청>이 발표되었는데, 1927년도에 설립된 외화배급상사였던 기신양행 영화제작부에서 제작한 작품이었다. <심청> 역시 가작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 이듬해에는 완전히 토오키시대로 들어서 방한준 감독의 <한강>을 비롯하여 윤봉춘 감독의 <도생록>, 서광제의 <군용열차> 등이 계속 발표되었다. 또한 이때에 발표된 극예술연구회 영화부 제작의 <애련송>이 있다. 최금동의 《동아일보》 영화소설 당선작 <환무곡>을 소설가 이효석이 각색한 작품이었다. 감독에 김유영, 촬영에 양재웅, 녹음에 최인규, 조명에 최술 등이었다.

  다시 그 이듬해에는 방한준의 <성황당>이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정비석의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을 영화화한 것으로 로칼한 영화였다. 당시 가작으로 호평받았다.

  이 시기에 제작비는 1편 당 1만 5천원 정도로, 그나마 제작 시일은 6개월 내지 1년을 소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원인은 1937년에 일본이 중국침략, 소위 지나사변으로 인하여 모든 영화기재가 고갈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영화인이 받은 생활의 위협은 말할 수 없었으니, 다른 작품에 종사하게 마련이었다. 그래도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당시 제작회사는 조선영화주식회사 분도촬영소(경성촬영소), 기신양행 영화부, 반도영화사, 조선발성영화제작소, 성봉영화원, 금강키네마, 극예술연구회 영화부 등이 있었다.


한국영화의 운명

  일본의 중국침략전쟁 이후 사회 정세의 악화로 영화도 국가통제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1940년에는 조선영화법을 제정하여 실시케 되었다. 영화의 제작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나마 겨우 명맥을 이어 오던 한국영화는 완전히 암흑기에 들어서고 말았다.

  일인들이 한국에서 영화검열을 시작한 것은 1921년부터였다. 그것은 물론 외화의 검열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은 영화상설관이 있는 경찰서에서 실시했지만 현실적으로 불합리함을 깨닫고 1924년에는 소위 활동사진취체규칙을 개정하여 서울에서 통일하기로 했다. 이때 그 사무는 경찰부에서 담당하고 있었으며 1926년에 이러러서는 총독부 도서과의 주관 하에 들어갔다. 그 전에는 풍기문제(키스나 지나친 포옹)나 폭력(특히 무기) 등에 치중하던 것을 소위 '조선통치의 근본방침인 일(日)·선(鮮) 일체(一體)의 이념을 보급, 철저히 하기 위하여' 민족적인 정신이 조금이라도 비치는 작품이라면 상영을 불허했다.

  이러한 영화검열은 드디어 영화법 제정으로 1942년에는 조선영화 제작자의 강제 통합을 강행하여 통제회사가 설립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영화주식회사, 고려영화협회, 한양영화사, 명보영화사, 동양토오키제작소 등은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 흡수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영화인은 등록을 하게 되었으니 다시는 독자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더구나 이 해(1942)에는 제2차세계대전의 발발로 영화기재(특히 필림)난은 극심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몇 작품이 생산되었으니, 1941년 전창근의 <복지만리>였다. 이 작품은 고려영화협회와 만영(滿映)과의 합작으로이루어진 대거편이었다. 백남푸로덕슌 이후 상해로 건너가 중국영화계에서 활약하고 있던 전창근의 귀국 제1회 작품으로, 우리 민족이 만주에서 개척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또한 토오키 이후 녹음기사로 활약하고 있던 최인규는 <국경>, <수업료>, <집 없는 천사> 등의 가작을 발표했다. 이 중 <수업료>는 국민학교 학생의 작문을 영화화한 것으로, 어린이의 세계를 통하여 그 당시 우리 민족의 참담한 생활상을 그린 작품이었다. 이 밖에도 이병일의 <반도의 봄> 드잉 있었고, 한편으로는 소위 조선보도부에서 제작한 <너와 나>(君と僕) 같은 정책영화가 공개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작품은 일본어로 대사가 녹음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외에도 <망루의 결사대>와 같은 작품은 완전한 일본영화였으니, 이 시기의 작품은 한국영화인지 일본영화인지 분간을 하기 어렵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제2차대전이 치열해감에 따라 한국민에게 일본국민으로서의 의무를 강요함과 아울러 한국영화인에게도 일본어로 작품 제작을 명했으니 한국영화도 이 에서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 당시 통제영화사였던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는 자본금 2백만원이란 대회사로 일본인의 손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사장이나 촬영소장 등은 모두 일인이었고 한국인이라고는 취체역에 방태영, 박흥식 정도였다. 이 회사에서는 매월 1회 뉴스영화 특집 <조선시보>를 발행했고 문화영화 제작과 아울러 극영화도 제작했으니 제1회 작품이 <젊은 모습>이었다. 이 작품은 일본의 송죽(松竹), 동보(東寶), 대영(大映) 등의 후원으로 완성했던 것이다.

  이 제작회사 외에 배급회사인 조선영화배급사가 창설되어 완전히 배급권까지 이네들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더구나 이때는 미국영화를 비롯한 외국영화가 수입금지되어 완전히 암흑기에 들어서고 말았다. 이에 따라 한국영화인들은 직업을 잃고 뿔뿔이 헤어져 새로운 생활 방도를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북만주로 도피하기도 했고 농촌으로 숨어 버린 사람도 대다수였다.

  이리하여 1923년부터 제작되어오던 한국영화는 여기서 끊어지고 말았다. 이때까지 발표한 총 편수는 200편을 헤어릴 수 있게 되었으니 좋든, 그르든 작품에는 민족정신이 깃든,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내포되어 있었던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부기(附記) · 여기서는 일단 8·15 해방 직전까지만 취급했다. 적어도 6·25동란이 일어난 1950년까지는 수록해야 옳지만, 제한된 매수 때문에 다음 기회에 미루기로 한다.> (필자  · 한양대 문리대 강사, 영화학)



(잡지 《사상계》 1962 5월호, 234~248쪽)

매거진의 이전글 <저항 속에 싹터온 한국영화>(1962) ②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