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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Jun 24. 2024

<저항 속에 싹터온 한국영화>(1962) ①

영화사가 노만 6

잡지  《사상계》 1962 5월호에 실린 노만의 글 '특집: 한국영화의 조감도' <저항 속에 싹터온 한국영화>를 총 3회에 나누어 소개한다. '한국영화약사: <월하의 맹세>에서 8.15 해방까지'라는 부제가 붙은 이 글은 초창기에서 8·15 해방 직전 시기까지 한국영화의 흐름을 개괄하고 있다. 이후 이 글은 1962년 잡지 《국제영화》에 연재된 <한국영화사>와 함께 철필 등사본 교재로 간행되는 『한국영화사』(한국배우전문학원, 1964)의 저본(底本)이 되었다.


노만의 <저항속에 싹터온 한국영화>가 수록된 잡지《사상계》1962년 5월호 표지.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특집: 한국영화의 조감도

저항 속에 싹터온 한국영화

- 한국영화약사: <월하의 맹세>에서 8.15 해방까지 -


노 만


  영화는 시대의 요구에 의하여 발명된 과학적 소산이다. 과학의 발달과 아울러 무수한 발명품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 영화는 일개인의 발명이 아니고 거의 같은 시대에 각지에서 여러 사람 손에 의하여 실천된 특이한 발명품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영화가 대중의 것임을 증명해주며, 인간의 오랜 욕구가 실현된 현상이었다. 1895년 류미에르 형제가 완성한 씨네마토그라프의 공개를 영화의 탄생이라고 일컫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같은 시대에 발명한 키네토스코프나 비오스코프는 1인 1회로 한정된 것을 류미에르 형제는 동시에 여러 사람이 같이 볼 수 있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영화의 원형을 완성했던 것이다. 그후 수많은 사람에 의해 영화기법의 완성으로, 1923년 우리 영화가 발표된 해에는 거의 오늘날과 같은 영화가 제작되었다.

  영화가 발명된 이후 28년만에 우리 영화가 제작되었다는 것은 물론 그 시대 우리 국민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시기는 일본치하였기 때문에 자유로운 표현을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영화기업으로 발전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활약한 영화인이 생존해 있는 오늘날, 아직까지 이 선구자들의 노고를 단 한 페이지에 기록한 사이 없음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우리 영화계가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이때, 어떠한 전통을 전승하고 있는지 조차 돌아볼 겨를 없이 외면하고 있었다는 것은 ‘한국적인 작품’을 생산해야 할 오늘 날, 뒤늦게나마 재고(再考)의 가치가 없지 않을 줄 믿는다. 물론 전통은 과거의 역사적 현실이 현재의 역사에 속하며 객체에 속하는 동시에 주체에 속하는 것이다. 과거가 현재가 되며, 객체가 주체로 되는 것이 곧 전통인 것이다.

  일본의 혹독한 식민지 정책 하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고유의 정신’을 영화에 묘사했던 선구자들이 있었음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활동사진의 수입

왼쪽부터 윤백남, 이경손, 안종화


  고종 25년(1888년) 경에 외국인의 손으로 거쳐 들어온 사진기는 그 당시 왕실과 상류가정의 전용무롤 등장하고 있었다. 고종 21년부터 본격적으로 외국과 공사를 교환하게 되자, 주한외국공관을 거쳐 현대문명의 이기가 들어왔고, 또한 외국공관의 한국 관리에 의해 소개되었던 것이다.

  고종 40년(1903년)에는 고종황제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축하 광경을 찍어 외부(지금의 외무부)에서 환등을 공개하였다. 환등 역시 왕실과 상류가정의 전용물로서, 특권층의 오락물로 등장했던 것이다. 그 당시 외국사절이 촬영한 필림과 그들이 가져온 빠리나 런던 같은 도시의 필림을 동시에 상영했다. 외부에서 공개한 이 환등대회에 구경갔던 김화진 씨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나는 옆에서 같이 보던 외부의 속관에게 "거기에 있는 것의 움직이는 것까지 보았으면 좋겠어요." 하니 그 속관의 대답이 "외국에는 이것을 활동하는 기계까지 있단다. 우리나라에는 그 기계가 아직은 아니와서 오늘은 환등만 한단다." (이하략)」


  외부에서 환등을 공개한 이듬해 영미연초회사에 의하여 처음으로 활동사진이 공개되었다. 영미연초회사에서는 그 회사에서 만든 담배를 판매, 선전하기 위하여 일본의 영화업사인 고택상회(요시자와 상회)의 순회영사반을 이용했던 것이다. 그때만 하도 아직 담배가 전매품이 아니기 때문에 자유로이 판매할 수 있었다. 더구나 영미연초회사는 1899년 인천에 대공장을 건설하여 대대적으로 제조판매하고 있었다. 이 영미연초회사는 현재 충무로 입구에 있었던 그 회사의 창고를 임시 사용하여 사진을 상연케 했으며 관람은 빈 담배갑을 가져오는 사람에게 무료 입장케 했던 것이다.

  일반 시민이 활동사진에 다대한 관심과 인기를 집중케 되자 계속하여 활동사진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수입 공개되었다.

  1904년, 미국인 콜브란(Collbran)이 경영하던 한성전기회사에서도 이 활동사진을 수입했다. 한성전기회사는 이미 청량리-서대문 간의 전차를 가설했고 계속하여 서울(경성) 시가에 전차선로를 가설하였다. 한성전기에서는 일반 시민에 전차 승차를 권장하기 위하여 활동사진을 이용했다. 동대문에 '활동사진관람소'를 설치하여 전차를 타는 사람에게 입장권을 주었던 것이다. '활동사진관람소'가 곧 한국 최초의 영화 상설관이었고, 또한 이로서 미국영화가 한국시장을 개척하게 된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즉 이곳에서 공개한 작품이 모두 미국 활동사진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이때까지 공개한 작품은 50척에서 100척 정도의 짧은 사진작품임을 밝혀 둔다. 이 사진작품이라는 것은 파도가 방파제에 부딪친다든다, 기차가 달려간다든가 하는 한 숏트(shot)의 것이었다. 그후 활동사진 상설관이 기면서부터 1, 2권(卷)에서 7, 8권(卷)물의 작품이 수입되었다.


초창기

나운규, 전창근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한국에 총독부가 설치되고 일본인들이 한국으로 건너오는 수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것은 일인들이 새로운 식민지에 대한 관심이 컸던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일본인들은 활동사진에 투자하여, 서울에는 차츰 영화상설관의 수가 늘었고 또한 영화배급권을 장악하게 마련이었다. 1912년에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인 영화상설관이 생기기 시작했으니 철물교(현 관철동)의 고등연예관을 비롯하여 대정관(인현동 소재), 황금연예관(후에 황금관 현 국도극장) 등이 차례로 개관되었다. 이 영화들은 물론 일본인을 위주한 극장이다. 고등연예관이 후에 우미관으로 한국인을 상대로 하는 영화관이 되었고, 이어 1918년 단성사가 영화상설관으로 개축하였고, 1922년 11월 인사동에 조선극장이 건축되어 한국인을 위한 상설관이 3개 극장으로 그 수가 증가하게 되었다.

  한편 지방에도 영화상설관이 나타나게 되었으니 1920년 대구에 조선관, 그 이듬해에는 인천의 애관, 1923년 평양에 제일관, 개성에 개성좌, 대구에 만경관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영화상설관에는 변사라고 하는 영화의 해설자가 있었다. 물론 무성영화였기 때문에 당시의 영화는 모두 이 변사에 의해 작품이 설명되었고, 또한 이들의 인기란 대단한 것이었다. 초기의 변사는 서상호를 비롯하여 우정식, 김덕경 등이었고 그후 김조성, 최병룡, 최종대, 오태선, 이병조, 김영환, 성동호 등이 활약했다. 이들 해설자의 해설 여하에 따라 영화의 인기가 좌우되었으니 가히 이들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으며, 무성영화시대는 바로 변사의 황금시대라 할 수 있다.

  또한 초기의 영화의 흥행은 평일에 밤 1회, 토, 일요일은 낮과 밤 2회 상영하고 있었다. 푸로의 교환은 대개 5일에서 7일만큼씩 한 번 변경하고 있었다.

  영화상설관의 발달과 함께 1919년에는 처음으로 한국인 배우가 은막에 나타나게 되었다. 연쇄극 <의리적구투>는 최초로 배우가 등장한 작품이었다.

  연쇄극이란 연극에서 막과 막 사이를 연결하는 장면을 활동사진으로 촬영하여 상영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경우 그 장면은 무대에서 실연할 수 없는 것을 야외에서 촬영하여 연극과 같이 상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연쇄극을 처음으로 시도한 신극좌 김도산 일행은 그 당시 신파극단의 구체적으로 이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 연쇄극은 일인 촬영기사(성명미상)에 의하여 촬영되었으며, 피이트 당 1원이란 고가로, 천원에서 천5백원이란 막대한 제작비가 소비되었다. 이 최초의 <의리적구투>는 의외의 인기를 얻어, 연쇄극 붐을 형성케 했다(1920~3). 이 신극좌 이외에 신파극단에서도 서로 앞을 다투어 연쇄극을 제작하였으니, 이 연쇄극은 곧 극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었다. 즉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도 그 제작비를 회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었다.

  한편 조선총독부에서는 정책영화를 제작하게 됐으니, 1919년 3.1운동 이후, 그들의 입장을 변명하기 위한 <조선사정>을 필두로, 경기도 지방과에서 발표한 <농림모범장의 작업광경> 등은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총독부에서는 한일합병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이 활동사진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1921년에는 지방과에서 예산 60원이라는 거금을 세워, 활동사진 기재와 촬영기사를 일본에서 초청하여 본격적인 정책 영화를 제작하였다. 이곳에서 제작한 작품은 그 이듬해 장충단 공원에서 서울 시민에게 무료로 공개하였다.

  또한 1923년 4월 19일에 공개한 '위생사진'은 총독부에서 일반시민에게 위생사상(전염병예방)을 고취하기 위하여 제작한 활동사진이었다.

  이러한 정책영화의 하나로 제작된 윤백남 각본, 감독의 <월하의 맹세>라는 작품이 1923년 4월 9일에 공개되었으니, 한국에서 제작된 최초의 극영화였다. 이 <월하의 맹세>는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저금사상을 선전하기 위하여 제작된 작품이었다. 이월화, 권일청 주연으로 완성한 이 작품은 길이 2천척의 것으로, 그 당시의 다른 정책영화보다는 장척의 것이었다. 오늘날 이 작품을 한국 최초의 극영화로 꼽는 것은 비록 조선총독부의 정책영화이기는 했지만 한국인의 손으로, 한국인이 출연한 작품(물론 제작은 총독부 체신국이며 촬영도 일본인)이라는 데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족을 붙이지 않을 수 없다. 작년 경복궁 미술관에서 '한국영화40주년 기념' 행사가 있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이 1921년에 발표되었다고 본데 근거를 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살펴본 대로 조선총독부의 정책영화를 제작하기 위하여 영화기재와 촬영기사를 데려온 것이 1921년 4월이었으며, 또한 <월하의 맹세>에는 윤백남이 창립한 민중극단 단원이 출연하였는데 민중극단의 창립은 1922년 1월이었다. 그리고 이 작품에 출연한 이월화는 1906년 서울 태생으로 그때 나이 18세였다. 그녀가 극단에 처음 들어간 곳이 여명극단으로, 그 극단이 부산으로 순회공연 갔을때 일이었다. 이 극단이 상경하자 그녀는 이어 윤백남의 민중극단에 입단하였고 비로소 이정숙이란 본명을 버리고 이월화라는 예명을 썼던 것이다. 그러니까 1921년에 이 <월하의 맹세>가 발표되었다면 이월화의 나이가 불과 열여섯살 때였다. 여하튼 간에 영화란 개봉한 해가 제작년도임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이 <월하의 맹세>가 1924년 2월에 타방으로 내려간것을 미루어 봐도 틀림없는 1923년도 작품이다.

  1923년에 들어서면서 영화제작회사가 창립되기 시작했다. 당시의 금관 경영주였던 조천고주(본명 조천송이랑)는 연쇄극이 흥행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자 극영화제작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동아문화협회라는 영화제작사를 창립하였다. 동아문화협회에서 제1회작으로 제작한 작품이 <춘향전>(9권)이었다. 이 <춘향전>은 당시 흥행적으로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이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연쇄극이 성공한 것은 첫째 한국인이 스크린에 나타난다는 점에서였다. 이것은 그 당시 일제의 굴레 속에서 얽매여 있던 국민들이 대견스럽게 여겨 갈채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으니, 누구에게나 나라 없는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는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의 것'에 애착을 느끼게 되는 시대적인 욕구가 있었던 까닭이다. 이것은 곧 동족애의 일면이었다. 이러한 관객의 추이에 가장 민감한 사람이 황금관을 경여하고 있는 조천고주였다. 그는 조선 고전소설 <춘향전>이 가장 많이 애독되고 있음을 알았고, 그러한 관객의 동향을 포착했기 때문에, 흥행으로 성공할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각색, 감독은 조천 자신이 담당했지만 출연자들은 모두 조선 사람을 등용하고 있었다. 주연에는 조선극장의 변사 김조성과 예기(기생) 한룡이었다.

  "조선사람의 돈을 꿀맛같이 아는 그 사람들은 여러가지로 조선사람에게 비위를 맞추게 되었다. 조천은 더럽게 만들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것은 지금 조선 활동사진이라고 한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과연 그 말과 같이 <춘향전>이나 <비련의 곡>은 더렵게 만들었다."(1925년 1월 1일자 동아리보, 현철씨 조선극계)

  이렇듯 조천은 관객의 추이에 영합하여 흥행 위주의 작품을 제작했던 것이다. 계속하여 기생 강명화의 실화를 소재로 한 <비련의 곡>(7권, 문용자 주연, 조천고주 감독, 1924), <흥부놀부전>(5권, 1925) 등을 제작했으며, 조선극장을 인수하여 본격적인 영화제작에 착수했다.

  한편 조천의 <춘향전>의 성공(흥행적으로) 자극받은 업계 단성사 경영주 박승필과 부산 고좌관장은 각기 영화제작소를 설치했다. 고좌관장은 이해 부산에 조선키네마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해의 비곡>(5권, 1923)을 제자했다. 이 조선키네마주시회사는 영화기업화를 위하여, 촬영소와 라보를 건설한 최대의 제작회사였다. 여기에 특기할만 한 사실은, 조선에서 영화를 제작하여 일본에 수출할 목적으로 공칭 자본금 10만원의 1회 불입으로 조직한 대회사였다. <해의 비곡>은 먼저 일본의 일활계배급망을 통하여 일본으로 공개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작품의 템포엿으니, 이런 실험적인 작품이 일본인 관객이 환영할 리 만무했다. 이 <해의 비곡>은 왕필렬(고좌관장의 변명), 각색 감독에, 이월화 안종화 주연의 작품이었다. 제2회 작품은 <운영전>(개봉 시에 <총희의 연>)으로 윤백남 각색, 감독, 안종화, 김우연 주연의 영화였다. 계속하여 <신의 장>(7권, 1925), <촌의 영웅>을 발표했으나 창립 3년만에 이 대회사는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러나 이 조선키네마주식회사는 안종화, 이경손, 나운규와 같은 인재를 길러낸 공이 컸다.

  단성사 경영주 박승필은 1924년 단성사에서 촬영부를 설치하여 <전선여자올림픽대회실황>이란 실사 작품을 제작했다. 이 작품을 촬영한 사람이 한국 최초의 촬영기사 이필우였다. 단성사 촬영부에서는 이어 <장화홍련전>을 제작했다. 1924년 9월 5일 개봉한 이 작품은 한국인의 손으로 완성한 최초의 장편극영화였다.


  제작 - 박승필

  각색 - 김영환

  감독 - 박정현

  촬영 - 이필우

  자막 - 김학근

  주연 - 김옥희, 김설자


  이 <장화홍련전>이야말로 '조선영화'가 아닌 '한국영화'로 평가해야 하며 개봉된 일자는 한국영화의 탄생이롤 봐야 한다. 그것은 당시 제작된 영화가 모두 일인들의 주관 하였고, 또한 그네들 두뇌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문제는 엄격히 다져 본다면, 그러한 일련의 작품은 우리 작품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박승필은 <장화홍련전>에서 흥행적인 성공을 거두자(9일간 상영), 영화제작을 기업화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영화상설관이 증가하기 전에는 영구적인 사업으로 하기에는 곤란한 것을 알았다. 그 당시 전국적으로 영화상설관이란 불과 6, 7관 정도였다. 그래도 개화기에 들어선 조선영화계는 우후죽순격으로 영화제작소가 난립하였다.

  

<춘희>(1926, 이경손 감독)의 김일송, 정기탁 (좌). <사랑을 찾아서>(1928, 나운규 감독)의 윤봉춘, 전옥 (우)


(②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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