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사』 집필 착수, 『다시 보고싶은 영화』의 출간과 함께 1959년에 있었던 또 한 가지는 잡지 《영화예술》을 창간, 발행한 일이다. 1954년 《영화세계》를 시작으로 《국제영화》, 《스크린》 등 영화계에 입문해 그동안 내가 참여했던 영화잡지들은 대부분 영화에 대한 정보를 담은, 흥미와 오락성을 위주로 한 대중 잡지였다. 1959년을 기점으로 국산영화의 연간 제작 편수는 100편이 넘기에 이르렀고, 서울 장안에도 세기극장, 대한극장, 명보극장 등 대형 영화관들이 속속 생겨나던 때였다. 여기 저기서 영화를 향한 관심은 뜨거웠지만 정작 이를 둘러싼 깊이있고 진지한 논의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1959년 초, 다시 들어간 《영화세계》를 그만 두고 한동안 할 일이 없었다. 그때 친구 채조병에게 쓴 편지 내용에 따르면, 《영화예술》 창간 준비에 착수한 것도 그 해 초였던 것 같다. 편지 내용 가운데, 《영화예술》 창간 일로 연락이 온 "키큰 김씨"가 누구였는지 지금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와 이영일, 최백산을 연결해준 인물이었는지, 《영화예술》 창간에 함께 한 인물이었는지 기억이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잡지 창간 핵심 멤버는 나와 이영일(1931~2001), 최백산(1927~2015)이 의기투합했다. 두 사람 모두 '휘가로'를 출입하며 이전부터 줄곧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이영일은 평안북도 구성 출신으로 영남대학교 전신인 대구 청구대학을 졸업하고 문학으로 출발한 인물이었다. 1956년 문학잡지 《시와 비평》을 거쳐 주간 《희망》기자, 1958년 잡지 《현대영화》 편집장을 거쳐 당시 《평화신문> 문화부장을 맡고 있었다. 영화 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계에 활동 범위가 넓었다. 최백산은 평안북도 선천 출신으로 《여성계》, 《자유공론》 등의 잡지 편집장을 거쳐 영화 평론 활동을 하던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바둑과 낚시에 취미가 있었다. 이영일이 영화예술사 발행인 및 사장을, 최백산이 주간을, 내가 편집장을 맡았고, 오영진, 허백년, 유한철, 최일수, 호현찬, 이청기 6인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영화예술사 사무실은 서울 중구 충무로 3가 15번지에 위치했다.
이영일은 잡지에 수록될 광고를 따오는 것을 맡았다. 나는 이전의 영화잡지 편집장을 비롯한 발간 경험을 살려 인쇄를 비롯한 잡지 발간 과정 전반을 담당했다. 아쉬웠던 것은, 이전에 내가 관여했던 《국제영화》나 《스크린》과는 달리 컬러 인쇄를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재정 문제가 컸다. 선명한 9도 컬러 인쇄로 냈던 《국제영화》의 '그레이스 켈리 호'와는 달리 잉그리드 버그만을 모델로 한 잡지 표지를 비롯한 내지 전면이 거의 흑백 인쇄였다. 나로서는 보다 공들이고 싶었던, 아쉬운 부분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발간 당시 《영화예술》은 "저속한 상업조류에 젖어가는 영화오락을 지양하며 본격적인 영화이론과 예술로서의 영화문화 발전을 목적으로 하는 연구지"(동아일보 1959.9.16. 4면 기사)를 표방했다. 보다 이론적이고 학술적인 영화 담론을 본격적으로 지향했다. 특집 기획 역시 여타 영화 잡지 혹은 대중지들과는 다르게 구성했다. 가장 먼저, <현대영화예술의 새로운 시도>로 동시기 세계 영화의 주 경향을 아우르는 한편, 당시 한국영화계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고 우리 영화 현실을 보다 고민하는 내용을 담고자 했다. 나와 친분이 있던 전창근 감독은 <난망고우: 나의 영화인교유록>, 유현목 감독과 최일수는 <한국에는 아직 영화예술이 없었다>라는 제목의 대담자로 참여했다. 동아일보 기자였던 호현찬, 평화신문 기자이자 시인이었던 황운헌이 필자로 참여했고, 서울대 교수 변시민, 고제경, 김인득, 영화제작자 정화세, 유한철, 김사겸 등 필진 섭외는 명동을 출입하며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인물들로 겨우 채워졌다. 일 년전(1958년) 타계한 제작자 이철혁의 유고 <영화배우가 되는 요건>과 같은 원고도 수록되었다. 삽화 컷을 담당한 원계홍은 유명 화가였다. 컷 비용을 일절 받지 않고 해주었다. 핵심 멤버였던 나와 이영일, 최백산 뿐만 아니라 대부분 원고료도 받지 않고 참여했다.
대중 오락지에 가까웠던 여태까지의 영화 잡지들과는 다르게 이론적인 담론을 추구한 본래 취지에 맞게 꽤 많은 기사들로 밀도있게 구성되었다. 《영화예술》 창간호가 추구하던 지향은 이영일이 쓴 창간사에 잘 담겨있었다. 이영일이 쓴 창간호의 <창간사>는 다음과 같았다:
"'아폴로'처럼 젊고, '뷔너스'처럼 아름답기 때문에 영화예술은 숙명처럼 대중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매력을 가지고 있다.
영화의 역사는 짧은데, 한국의 영화의 역사는 더욱 짧고 얕다. 그 짧은 역사를 통해서도 최근 수년은 경이적인 성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대중은 무턱대로 영화를 취애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들은 인생의 모든 경험과 미적인 상상과 정감과 및 사유에 대해서 충족과 공감을 강요하는 존재인 것이다. 훌륭한 작품을 보면 광희 작요해가며 감동하는가 하면, 저급한 작품에는 가책없는 혐오와 비평을 가하는 것이다.
현대의 영화조류는, 오늘의 사회적 성격과 역사적 현실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그러한 욕구와 비평에 병립하면서, 예술의 저 전통적인 명제인 정신의 자유와 미적인 해방을 위해서 불요불굴의 자기형상을 이루어가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다양한 제성격도 그 궁극에 있어서는 이렇게 보다 높은 예술의 오의에 도저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자칫하면 그 길을 잃어버리기 쉽고 예술로부터 완구로 타락하기 쉬운 혈륜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들은 밖으로 이것을 보호하고 안으로 이것을 지양하는 입장에서 부단히 영화예술이 지니는 바 진가를 높이고 그 발전을 꾀하여 나가야 하리라.
본 [영화예술] 지의 창간의 의의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관심과 함께 본지가 전통과 공헌을 쌓을 수 있을 것을 희망하는 바이다." (33쪽)
잡지는 1959년 10월 30일 인쇄되어 11월 1일 발행되었다. 총판은 서울시 중구 을지로 4가에 있던 장안서림에서 이루어졌다. 발행 직후, 《영화세계》 시절부터 알고 뵙던 이강천 감독에게 잡지 창간호를 드렸다. 명동 모처에서 감독님을 뵈었다. 이강천 감독은 잡지를 보고 놀라며 정말 수고 많았다며 짜장면 한 그릇을 사주셨다. <피아골>, <백치 아다다> 등 당대 문제작들을 연출한, 유명한 흥행 감독이었는데도 짜장면 한 그릇 먹는 것도, 누군가에게 사 주는 것도 힘든 형편이었다. 1년에 한 두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였으니. 당시 영화인들이 모두 비슷비슷한 형편이었다. 영화계에 꽤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다.
이틀 뒤인 11월 3일, 서울 YWCA회관에서 아내 엄경은과 결혼식을 올렸다. 잡지 발행과 결혼 준비 시기가 겹쳐 동시에 하느라고 정신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이영일과 최백산 두 사람은 결혼식에 오질 않았다. 얼굴도 비추지 않았다. 결혼 소식을 알리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잡지 일을 함께 하면서 감정이 상하거나 틀어질 만한 일도 없었다. 분명한 이유를 알 순 없지만, 함께하는 동료들이었기에 인간적인 아쉬움과 서운함이 컸다. 이후에도 그들을 만났을 때 그 이유를 굳이 묻지 않았다.
《영화예술》은 1959년 창간호 한 호를 끝으로 이후 지속되지 못했다. 재정적인 문제가 가장 큰 요인이었다. 여타 영세한 규모의 잡지들과 마찬가지로 '창간호'가 곧 '종간호'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후 1964년 이영일과 그의 동생 이영규를 주요 멤버로 재창간된 《영화예술》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영일과는 개인적인 아쉬움과는 별개로, 그 이후에도 간간이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평화신문》 문화부장 재직 당시 그의 부탁으로 '영화의 날' 제정과 관련한 글을 기고한 적이 한 차례 있었다. 그 후 1960년 영화비평가협회 결성, 1965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로 재창립되었을 때에도 발기인으로 합류해 참여했고, 1966년 초 '영화예술 베스트텐 심사'에도 참가한 적이 있었을 뿐, 잡지 편집진 혹은 필자였던 적은 없었다. 1970년대 초 어느날 이영일이 잡지 발간 재정 문제로 내게 찾아온 적이 있었다. 잡지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내게 어음을 빌려달라 부탁했다. 그에게 "나는 어음은 안 빌려줍니다" 하고 거절했다. 서운한 감정에서는 결코 아니었지만, 당시 나 역시도 꽤 큰 액수의 돈을 내주기 힘든 사정이었다.
《영화예술》을 끝으로 영화잡지 관계 일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이듬해인 1960년에는 주간 《삼천리》의 영화 담당 기자로 잠시 몸담았다. 담당 부장은 내 기사를 한 글자도 손대지 않고 그대로 실었다. 주간 《삼천리》는 1961년 5.16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폐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