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가 노만 61
은막의 개척자
나운규 (1902~37)
노 만
민족의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우리 전래의 민요 아리랑이 오늘날 한국의 대표적인 민요로 세계 여러 나라에 널리 알려지게 되기까지에는 춘사(春史) 나운규(羅雲奎)가 만든 영화 <아리랑>의 역할이 컸다고 하겠다.
나운규의 <아리랑>이 나오기 이전까지만 해도 '아리랑'이란 민요는 그리 알려지 있지 않았다. 나운규 역시 이 민요를 알게 된 것은 당시 그의 영화계의 선배였던 이경손(李慶孫)의 민요 노우트북에서였다.
이경손은 한국영화 초창기에 활약한 감독이었지만 일찌기 문학에 뜻을 두어 동요(童謠) 작가로 출발한 영화인이었다.
나운규가 이경손의 민요 노우트북에서 <아리랑>이란 명작을 구상하여 발표한 것은 1926년이었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발표되자, 민요 <아리랑>도 비로소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만큼 나운규의 <아리랑>은 당시 한국민의 울분을 대변하여 일제에 시달림을 받는 민족의 비애를 여실히 반영시켜 준 작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랑>이란 민요는 관객의 절찬을 받았으며 전국적으로 풍미하게 되었다.
나운규의 <아리랑>은 또한 한국영화의 지위를 향상시켰다. 1923년부터 한국에서 영화제작이 시작되어 <아리랑>이 발표되기까지는, 아직도 활동사진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종합예술로 새로운 표현 양식을 가진 영화가 단지 '스토오리 텔링'에 급급하고 있을때, <아리랑>이 등장하였고 한국영화도 예술로서의 영화로 출발하게 되었다. 이것은 곧 나운규의 공이었으며 그의 영화사적 의의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다.
또한 <아리랑>은 영화적인 기법으로 볼 때도 결코 뒤떨어지는 작품이 아니었다. 사막 장면, 환상 장면에는 그의 작품에서의 주제가 담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주인공 영진으로 하여금 살인할 수 있는 '모티프'를 설정해주고 있다. 이것은 곧 심리적 '몽따쥬' 수법의 성공이었다.
세계영화사상 '몽따쥬' 수법은 이 해(1926)에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같은 해에 제작된 <아리랑>에서 '몽따쥬' 수법에 성공하여 또 하나의 선구적인 역할을 입증해주고 있다. 이는 결코 과소평가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막에서의 '대상(隊商)의 물'은 곧 일본제국주의를 상징하고 있으며이는 일제에 대한 신랄한 공격이요 저항이었다. '대상의 물'은 기갈에 허덕이는 남녀에게 줄기찬 압박을 가하고, 드디어 '물'로 인해 자기의 정조까지 바치는 여인을 증오하는 사실-- 여기서 일제가 한국민족에게 가하는 지배자로서의 오만성을 말하고 있으며, 일제에 아부하는 여인을 증오하고 있다. 따라서 살인까지 할 수 있는 동기를 설정해주고 잇는 것이 영화작가 나운규의 의도였던 것이다.
나운규의 경력을 살펴보면 더욱 이해가 빠르겠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따뜻한 동포의 품을 그리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운규를 가리켜 민족주의 작가라고도 부르고 있지만 하여튼 <아리랑>에서 심리적 '몽따쥬' 수법의 성공은 예술로서의 영화로 발전시킨 그의 커다란 업적의 하나였다.
사막의 물
나운규는 1902년 함북 회령 태생으로 회령소학교를 거쳐 간도에 있는 명동중학에 진학하였다.
간도는 1910년 한일합병으로 일제에 밀려 실향민과 이향민의 집결지였으니 명동중학교는 이들 동포들의 자녀를 교육시키기 위한 학교였다. 이 학교는 그 후 재정난과 일제의 마수가 뻗쳐 폐교되고 말았으니 그도 하는 수 없이 다시 서울로 전학하게 되었다.
나운규는 간도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동포의 비참한 생활상을 목격하였으며 또한 자신이 직접 체험도 했었다. 여기서부터 그의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은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나운규도 학생의 몸으로 여기에 가담했다. 고향 회령으로 돌아와 윤봉춘을 비롯한 여러 친구들과 함께 항일 투쟁을 하다가 지명수배를 당하게 되자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고향을 등지고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갔다가 그곳에서도 신변의 위험을 느끼자 다시 러시아로 정처없는 방랑의 길을 밟기 시작했다.
나운규는 호구지책으로 러시아 백군(白軍)에 입대했으나 인종차별과 참을 수 없는 학대에 못이겨 망국의 설움을 안은 채 1919년 가을 두 사람의 한국인 친구와 함께 탈영하고 말았다. 그들은 훈춘을 거쳐 북간도로 향하였으나 수중에는 무일푼이어서 이틀을 꼬박 굶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당시의 광경을 그의 <방랑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독자 중에는 어이하여 구걸을 못하느냐고 묻는 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백인의 모욕으로만 살아온 자들이다. 이 중에 어느 누가 황인종도 사람으로 여겨주는 집을 찾으러 걸인행세로 가가호호 돌아볼 사람이 있느냐. 여기서 삼십리만 더 가면 조선인 부락이 있다 하니 그 부락에 가기까지는 굶어도 좋다는 것이 우리의 결의였던 것이다. 그러나 K라는 친구는 도저히 참지 못하겠던 모양이다.
"물이라도 한 그릇 얻어먹세."
"그냥 가!"
"물 달래는 것도 걸인인가? 한 그릇 하세."
B라는 친구 역시 못견디겠는 모양이다. 이왕이면 한 그릇 단단히 얻어서 자기에게도 얼마쯤 생명수를 남겨 달라 한다.
어디를 가든지 나이 적은 탓이라 교섭의 심부름은 내게로 돌아왔다. 옆에 보이는 집을 향하여 나는 걸어간다. 두 친구는 내 뒤를 따랐다. 세 명의 짠발짠은 문 앞에 당도하여 약속대로 노크는 내가 하였다. 문이 열리며 이 집 주부가 행주치마에 손을 씻으며 나온다. 몹시 매정한 얼굴.
"흥, 잘못 걸렸구나."
우스운 소리 잘하는 B의 탄식이다. 나는 행인인데 목이 마르니 물 한그릇 청하노라 하였다. 아니나 다르랴. 그는 아무 대답 없이 우리 세 사람을 아래 위로 훑어본다. 그리고 역시 아무 말 없이 돌아서 들어간다. 주기는 줄 모양인데 대체 무슨 놈이 모욕이 이다지도 심하냐. 발길로 문짝을 차버리고 싶은 판에 물그릇은 우리 앞에 나타났다. 나는 그것을 받아서 K에게 주었다. K는 얼마를 남기더니 B에게 전하는 모양이다. 그야말로 생명수다.
물그릇이 나기에 주부에게 보치며 고맙다고 하였다.
그러나 주부는 조금도 그 매정한 표정을 풀지 못하며 그 그릇을 받아든다.
"네멋대로 살아라."
우리는 돌아섰다. 바로 그 순간이다. 무엇이 쨍그렁!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나니 우리들은 돌아다볼 수 밖에 없다. 깨어진 것은 바로 그 컵이다. 깨어진 유리 조각들이 주부의 발끝에 있는 게 아니라 저편 쪽 쓰레기통 안에 다복이 쌓이었으니 어찌된 셈이냐. 그러자 주부는 덜컥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독자여! 개 먹던 그릇을 상 위에 다시 놓을 수 없다는 말이다. 황인종이 먹던 그릇에다 사람의 음식을 담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한 개의 촌부를 때려 엎는 것이 남아의 일생이었더냐.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이 유황불을 퍼부어야 알맞을 저자를 벗어났다. 야견(野犬) 하나 볼 수 없는 끝없는 벌판에서 어둠은 깔린다. 이 슬픔을 무엇에 비하랴.
--- <나의 러시아 방랑기>에서
탈출에 성공은 했으나 그들은 곧 일제에 체포되어 소위 제령(帝令) 위반이란 죄명으로 2년간 함흥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운규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에 이렇듯 많은 고난의 경험을 체득했다.
명동중학 시절에 간도지방 동포, 실향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의 목격, 방랑 시절에 체득한 민족 사상은 한결같이 그의 뇌리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이러한 모든 체험은 일제에 대한 항쟁의식을 북돋아주었으며 그의 작품에도 반영되었다. <아리랑>을 비롯하여 <풍운아>, <사랑을 찾아서> 등에 나오는 인간상은 한결같이 그의 이러한 귀중한 체험의 소산이었다.
(인물한국사편찬위원회 편, 『인물한국사 4』, 박우사, 1965, 430~4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