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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무으야우 Apr 16. 2024

고향 방문기 2

K는 아침 일찍 인천에 있는 볼일을 보고 바로 내려오느라 매우 피곤해 보였다. K는 워낙 다양한 레이어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그를 여기에 적으려는 시도자체가 그를 매우 단면적으로 보이게 할까 두렵다. 그는 학석사를 마치고 박사를 준비하고 있다. 부모님 집에서 살고 있고, 세상이 잘 못 되어도 K의 편파적인 편이 되어줄 것이 확실한 엄마가 있다. K는 고등학교 시절 잠이 엄청 많았다. 매번 잠을 자서 내가 매일 K를 깨우는 역할이었다. 우리 관계의 언어는 매우 다정하거나 매우 싸가지 없었다. 이런 극단적인 온도차가 나에게도 분명 있기 때문에 그의 우울함과 광기 같은 것들이 이해가 안 되지 않았다. 아 그리고, 재능도 많았다. 피아노를 조금 다루더니, 온갖 악기는 몇 번 만져보면 바로 연주가 가능했다. 다른 어떤 학문에는 관심도 없었지만, 생물은 어찌나 좋아했는지 다들 수능과 입시로 찌들어 모의고사를 풀 때 옆에서 <이기적 유전자>만 몇 번을 읽고 있는지. 그런 여유로운 태도가 K가 정말 이 다급한 고3의 생활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불능에서 나오는 건지, 그저 그의 뚝심인지 분간이 잘 안 되었다.


그는 그가 원하는 대학에 갔다. 인서울은 K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 중요했다. 여기서 빼놓은 것이 있는데, K는 아주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나는 그런 독실한 기독교인이 유전자학, 생물학은 공부하는 것이 다소 모순된다 여겼지만, 그런 모순성이 K 그 자체의 특성이었다. 그런 모순이 없다면 K는 너무 밋밋한 인간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K와 나의 어록을 꼽으면 래퍼들도 울고 가는 디스전 아니었을까. 하지만 의도는 전혀 악하지 않은, 직설화법의 대가들. 공부에 전혀 집중을 못하지만 다른 모든 것에 재능을 보였던 K를 보며 나는 "넌 연필 쥐는 거 빼곤 정말 다 잘한다"라고 말했고, 현재 책상에서 공부를 평생 해야 하는 삶을 선택한 K에겐 최악의 어록으로 남은 모양이었다. 그런 어록들을 K는 다른 친구들과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보물함을 열듯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다. 서론은 보통 이렇게 간다. "야 ㅇㅇㅇ 정말 싸가지없었는데 하나 말해줄까?" 그러고 앞과 같은 이야기를 꺼낸다. 친구들은 장난을 섞어 나에게 야유한다. 진짜 너무하다며, 인성이 빠개졌나는 그런 이야기다. 난 K의 말들에서 순전히 재미를 위해 추가된 과장법을 다 집어낼 수는 있지만, 나 혼자 여기서 진지해졌다가는 이 자리를 무겁게 만들까 그저 입을 다문다.


몇 시간을 지나니 난 어느새 순수악이 되어있었다. 고등학교 때의 이야기가 나중에 성인이 돼서 진단받은 K의 ADHD 스토리와 어우러져 나는 뇌병변 장애인을 매번 괴롭히며 깨운 사람이고, 3년 동안 K에게 온갖 악담을 퍼붓는 사람이었다. 앞뒤 맥락을 다 제거하고 과장을 하니 실로 완벽한 악역이었다. 물론 다 재미를 위한 것이었지만, 제일 꼭지를 돌게 하는 건 이런 마무리였다. "그래도 ㅇㅇ야 나 때려줘서 고마워" 라거나,  "나 친구 없었는데, 네가 나 지적해 주고 괴롭혀서 좋았어. 앞으로도 나 쭉 지적해 줘"  이런 마무리. 완벽한 피해자와 가해자를 만드는 마무리. 다들 나에게 <더글로리>의 박연진이고, K는 문동은이라며 웃고 그랬지만, 분위기를 잔뜩 재밌게 가다가 어느 순간 조용해지면 또 내가 악역인 이야기를 또 꺼냈다. 오직 분위기를 띄우기 위함인 것을 알면서도, 나는 슬슬 이 자리가 불편해졌다. 혼란스러웠다. 나 진짜 악역인가. 나 정말 쓰레기인가. 내가 K한테 진짜 큰 죄를 지었던 건가. 이 친구가 벼르고 벼르다 이러는 걸까. K가 힘들어할 때 병원에 가보라 하고, 그의 ADHD투병기를 나름 응원하고, 고민이 있을 때 같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 친구의 대학 입학에 기뻐 소리를 지르던 그런 과거의 나는 그저 나의 괜찮은 친구로서의 자아를  지키기 위해 좋게 편집된 상에 불과했다.


이런 불편과 함께 K는 주변에 농담도 다 진담으로 받아들이는 성향을 갖고 있는 친구들을 다 놀라게 할 심산이었는지 여러 발언도 서슴지 않고 뱉었다. G의 질 나쁜 전 남자 친구를 G대신 복수해 주겠다는 심산으로 본인이 가지고 있는 실험실 약품으로 그 인간을 "정말" 녹여버리겠다, 살려 둬야 하냐며, 본인이 감방이라도 가겠다는 그런 말들을 너무 진심을 가득 담은 제스처로 이어나갔다. 난 K가 만성형 불안과 극심한 감정 변동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과한 표현 정도라고 생각하고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이야기를 들었지만, 다른 친구들은 웃으면서도 제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달라고 간청하는 상황도 연출되었다.


친구들과의 가벼운 술자리를 나의 수동공격성으로 이렇게 까지 적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진짜 악역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신나게 상황을 재밌게 만들다가도 갑자기 다운되어서 입을 쭉 내민 채 아무 말을 안 하며 주변 사람을 동시에 눈치를 보게 하는 K의 어딘가 유아적인 태도를 보며 나는 이제 미안함을 느끼기보다 심드렁했다. 조금 역겹다 느꼈기 때문이다. 그저 그의 눈치를 보는 친구들을 위해 설명을 덧붙여줄 뿐이었다. "지금 K가 G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많이 안 좋아서 그래."라든지, "K가 저렇게 말해도 진짜 범죄자들을 저런 생각 자체를 못해"라든지.


난 혼란스럽다. 내가 진정 K를 아끼는 친구라 말할 수 있는지. 이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있었는데. 내가 상상한 것과 실제의 간극은 뚜렷했다. 그저 평소와 같이 우리끼리 떠든 과장법을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인 걸 지도 모른다. 우리가 서로 용인하던 코드를 내가 많이 놓친 것일지도.


위 글을 쓰고 이제 몇 달이 지나서 다시 이 글 앞에 앉았다. 확실한 건 지금 나에게 남은 건 이 K에 대한 분노도 아니고 실망도 아니다. 그저 당분간 K를 자주 볼일은 없을 것 같다는 그런 작은 결심. 그저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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