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글 왜 안 쓰세요?"
오랜만에 만난 지인 B가 대뜸 물었다. 지금은 휴식 중이야, 라며 머쓱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말 못 할 사정들을 욱여넣느라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다시금 맞댄 B의 눈망울은 또렷했다. 이어서 그는 내가 속한 글쓰기 모임의 예전 글들을 다시 읽곤 한다고 말했다. B 역시 그 모임에서 글을 쓴 전력이 있었다. 오래전 활동을 중단했으나 글의 열람 권한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B는 알게 모르게 홀로 우리들이 함께 수놓은 과거를 추억하고 있었다. 그가 떠난 지도 이제 몇 년인가. 햇수를 세려는데 동석한 친구들이 서로 시끄럽게 논쟁을 벌여 정신이 사나웠다. 옆에서 옥신각신 떠드는 일행들의 취기를 의식적으로 음소거한 채 B와 잠시 대화를 이어나갔다.
"예전에 그 글 있었는데. 뭐였더라. 안 쓰니까 안 쓰···"
"못쓰니까 못 쓰죠."
정정해주자 그가 맞장구를 쳤다. 뒤이은 그의 말은 난데없이 날아든 비수 같았다.
"그거 되게 위험한 글이던데."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글에 담긴 허장성세를 포착한 것이다. 과거에 작성한, 아니 휘갈겨 내놓은 그 글은 뒤를 보지 않은 객기였다. 요약하자면 글이 안 써지는 아마추어 작가가 모종의 계기로 글쓰기의 작은 해답을 찾고 '쓰니까 쓴다'는 마음가짐을 갖게 되는 내용이다. 돌이켜보았을 때 그것은 허울뿐인 배수진이었다. 여전히 글쓰기는 아득히 멀기만 하며, 손에 잡히지 않는 그 무언가였다.
요란한 빈 수레를 손쉽게 간파한 B는 거짓말 보태서 관음증 환자였다. 관찰하기를 좋아하는 인간이었고, 붙잡은 시선들을 바탕으로 번민하며 재치 있게 냉소했다. 그의 글을 좋아했던 나는 그의 이탈에 누구보다도 섭섭했다. 그가 품은 송곳 같은 시선에 이끌렸고, 서슬 퍼런 활자 뭉치를 읽어 내려가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런 그가 예고도 없이 돌연 작별을 고했던 것이다.
"너무 어두운 글만 쓰게 되는 것 같아서요."
모임에서 발을 빼기 전부터 심심치 않게 들었던 그의 고민을 다시 되풀이해 들었다. 그런 당신의 어둠이 좋았는데, 하며 아쉬움을 표했지만 마냥 그렇지 않다고 격려할 수도 없었다. 그런 글을 쓰길 꺼리는 건 정작 나도 매한가지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에세이를 안 써. 아니 못 써."
에세이를 쓰면 매번 비슷한 내용으로 채웠다가 지워버리거나, 수치심에 못 이겨 소설이라는 미명으로 비겁한 포장지를 덮어씌웠다. 포장을 벗겼다간 상품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군소리만이 페이지를 가득히 점거할 뿐이었다. 그저 진부하고 지겨운 소재였다. 매일 같이 자살을 꿈꾼다는 것. 하루도 빠짐없이, 그렇게 연이어 의식을 사로잡으며 명멸을 반복한다. 감기, 어쩌면 지긋지긋한 만성 통증 따위의 잔병치레 수준일 테다. 지워내도 끝끝내 다시금 자리를 잡는 곰팡이처럼 생명에 직결되지 않는 위협을 가하며 하염없이 자라난다. 가능하면 빠르게, 아프지 않게 끝내고 싶어. 그렇게 생각해 봤자 항상 방도가 없어 무망할 뿐이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 매일 하지 않아?"
"아니, 난 안 그런데?"
모두가 나와 같지 않다는 건 오래전 한 친구와 나눈 대화에서 알게 됐다. 내심 놀랐다. 다들 분명 매일을 하릴없이 연명하는 것이었을 텐데, 살다 보니 어쩔 도리 없이 살아지고 마는 것이었을 텐데, 하면서 말이다. 거짓말하지마. 너도 죽고 싶잖아. 내심 속으로 외쳤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이후 무슨 얘기가 오고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술잔으로 실어 나른 말과 말 사이에 건져올린 건 내 정신 상태에 대한 작은 파문뿐이었으니까. 그날의 파편은 결국 내가 비정상의 영역에 발 담그고 있는가, 하는 의문에만 초점이 맞춰진 채 마음속 구석 끄트머리에 틈입해 박제됐다.
그만두고 싶다고 의식적으로 느낀 건 교복을 입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돌이켜보면 어딘가 하나씩 어긋났던 나날이었다. 연애, 시기심, 관심병 등 그 나이 때에 겪어볼 수 있을 법한 치기 어린 고민들부터 경제 여건, 대인 관계, 가족 문제 등 강산이 변하고 나서야 자각할 수 있을 법한 엉킨 실타래와 같은 문제들까지. 엉겨 붙은 지점들이 산적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는 나를 싫어하게 됐다. 내 이름 석 자와 거울에 비친 면상이 지독히도 혐오스러웠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나는 매일 같이 거울과 싸운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싸운다. 욕설을 내뱉고, 소리를 지르고, 주먹을 내지른다. 물론 거울이 깨지면 손해 보는 건 오롯이 나니까 깨지지 않을 정도로만 강도를 조절한다.
그러던 어느 날 초인종이 울렸다. 찾아올 이 없는 저녁 시간이라 경계심을 갖추고 현관문으로 향했다. 비스듬히 연 현관문 사이에는 뜻밖에도 또래의 여성이 서있었다. 그녀가 밝히기로 벽을 맞댄 옆집 이웃이었다. 예기치 않은 첫 만남에 그녀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혹시 평소에 소리 지르고 그러시나요? 욕도 하세요?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아서요. 정황 상 새로 이사 온 사람 같지는 않았다. 이삿짐 트럭이 오고 간 기억도 없다. 그렇다면 오랜 기간 옆집에 거주한 이웃사촌일 터. 바깥에서 표출하지 못했던 온갖 고성과 욕설이 내내 생중계되고 있던 것 아닌가.
얼굴이 화끈했다. 나는 빌런이었다.
"당신 정신병이야."
또 다른 친구는 매번 총구를 관자놀이에 겨누는 나의 행태를 보고는 취기를 빌려 어슴푸레 일갈했다. 파격적 발언에 놀랐지만 상처받지는 않았다. 정신병일 수 있다. 아니 정신병 같다. 다만 의사를 찾을 정도는 아닌 수준. 보통 그런 상태가 되면 집안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물건과 쓰레기들이 산을 이룬다. 나의 경우 적어도 사람을 초대 못할 수준은 아니라 자부한다. 눈부시게 정리 정돈이 잘 된 집은 분명 아니어도 차 한 잔 대접하는데 무리는 없다. 무엇보다 정신병의 스펙트럼은 넓다. 예컨대 누군가가 암 환자라면 누군가는 만성 비염이나 급성 장염을 앓는 것이다.
천생 나약한 인간이다. 약한 티를 내고 싶지 않아 필명에 우발적으로 '독'자를 박아넣었다. 보잘것 없는 컴플렉스의 발현이기 때문에 간판 바꾸기만으로는 유약한 본성을 온전히 바꾸어내지 못했다. 그렇게 매일 같이 쉽게 분노하고, 오해하고, 재단하고, 멸시하고, 종국에는 후회하며 다시 분노한다. 참으로 후지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런 내가 싫어 글쓰기가 두려워졌고, 이별, 작별, 배신과 같은 일련의 사건들을 겪은 뒤 눈에 닿는 모든 것들에 다시 한번 환멸을 느꼈다. 다시금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한층 더 매력 없고 볼품없는 인간이 되길 자처했고, 거울과의 난투는 연투의 증식으로 이어졌다. 바뀐 점이라면 이제는 속죄와 상생의 무소음 연투라는 점이다. 더불어 사는 삶은 얼마나 코미디인가.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본다. 나는 삶을 교란으로 정의한다. 영화는 삶을 교란시켜 준다. 그것도 아주 효과적으로 말이다. 부작용이라면 지나치게 혼선을 주는 나머지 당장 닥쳐서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까지 앗아가곤 한다. 하지만 적어도 내일 침대에서 일어나야 할 작은 이유를 손에 쥐여 준다. 그 영화 아직 못 봤는데. 아, 그 감독 필모 깨고 싶은데. 그런 심미적 인간으로서 생존하고 연명한다. 어쩌면 이런 태도는 <매트릭스> (1999) 속 파란 약을 복용한 그림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진실을 마주하지 않고 눈을 감고 도망치는 모습 말이다. 하지만 삶의 열쇠를 교란에서 찾는다면 세계관은 달라진다. 여기에서만큼은 파란 약도 진실이다.
어떤 철학자들은 콧방귀를 낄 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근래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그렇게나 눈싸움을 걸어대며 인상 쓰고 있는 쇼펜하우어를 들 수 있겠다. 삶의 목적이 고통이라 주장한 그에 따르면 삶은 끊임없는 욕망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존재하는 한 욕망하며, 욕망은 또한 부재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결코 충족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의 일시적인 유예 상태인 ‘행복’을 추구하나, 끝에는 항상 수문장 역할인 ‘권태’를 맞이하게 된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삶의 답은 욕망이 아닌 고통이며, - 비약이 매우 심하지만 - 네오의 입을 벌려 빨간약을 입에 털어 넣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권태가 두려워 영화를 끊을 수는 없다. 애초에 나는 쇼펜하우어 아저씨가 흥미로울지언정 그가 제시한 답안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말한 대로 의지를 부정해 무의 존재를 성취한다는 건 지나치게 극단적이며 이상적으로 다가온다. 마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인류보완계획이 정답이 아닌 것처럼, 고통을 통한 절멸은 실현 가능성 없는 해법일 뿐이다. 의지의 부정은 인간에겐 거짓과 다를 바 없다. 쇼펜하우어의 거짓말은 무미건조하고 푸석푸석하다. 그보다는 영화가 속삭이는 달콤쌉싸름한 거짓말이 훨씬 풍미가 가득하며, 공허한 내면을 제한적으로 벌충해 준다. ‘제한적? 거 봐, 내가 권태에 빠진다고 했지?’ 아저씨가 꼬투리를 잡고 비웃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어차피 죽을 때까지 지구상에 존재하는 영화를 다 보지 못한다. 이래도 권태로울까보냐? 눈싸움은 내가 이겼다.
어떤 장면은 교란을 넘어 각인된다. <택시 드라이버> (1976)의 트래비스 비클 (로버트 드 니로)도 거울과 싸운다. 아무도 그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으며 혼자 있는 방에서 그럴 수 있을 리도 만무하다. 허나 그는 지금 자신에게 말을 건 거냐며 거울을 향해 총구를 겨눈다. 삶이라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트래비스가 얼마나 저열하며 동시에 외롭기 짝이 없는 인간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거울 속 자신에게 총구를 겨누는 건 <증오> (1995)의 빈츠 (뱅상 카셀)도 마찬가지다. 파리 외곽 지역 방리유의 유대계 이민자 청년인 그는 주류와는 지극히 요원한 일상을 보낸다. 양치 후 손가락 총을 만들어 거울을 향해 발포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영락없는 프랑스판 트래비스 비클이 엿보인다. ‘미러 신’하면 순위권에 놓이는 두 장면은 뚜렷한 목적지를 상실한 분노가 아로새기는 곳은 곧 자기자신일 수밖에 없음을 방증한다.
거울과의 접전이 없어도 갈등마저 없는 건 아니다. <애프터썬> (2022)에서도 캘럼 (폴 메스칼)은 딸과 외출하기 직전 급작스레 세면대의 거울에 침을 뱉는다. 딸 앞에서는 거울을 상대로 말다툼을 벌일 수도, 소모적인 역정을 낼 수도 없다. 제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만이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의 분풀이였다. 그런 캘럼을 보며 잠시간 근육이 경직되는 듯했다. 한편, 영화의 중반부 카메라는 한번 캘럼을 비껴간다. 그렇게 그는 프레임 바깥으로 모습을 감춘다. 그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였을까. 무엇 때문에 프레임 속에 자리 잡지 못했을까. 어떻게든 다시 카메라를 돌려놓고 싶었다.
동질감이 드는 또 다른 장면은 <아이, 토냐> (2017) 속에 있다. 피겨 스케이팅 무대에 오르기 전 토냐 하딩 (마고 로비)은 거울 앞에서 화장을 고친다. 터지려는 울음을 간신히 참아내며 웃어 보이지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다. 장면만 놓고 보면 토냐 하딩이 가엾어 보이겠지만 그녀의 사정은 꽤나 복잡다단하다. 영화 속 모호한 내막이 뒤섞인 만큼 가끔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토냐처럼 예정된 무대로 향해야 하니 대개는 억지로 웃어야 한다. 울면서 웃는 건 생각만큼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영화에는 정신병자들이 이렇게나 많다. 거울이 넘쳐난다. 신난다. 끊을 수가 없다.
솔직함은 상처를 동반하곤 한다. 누군가에겐 진솔한 위로가 되겠지만, 누군가에겐 살갗을 긁는 칼날이 된다. 내세울 거라곤 솔직함뿐인 이 글이 읽는 이들에게 어떤 효용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알 것 같다. 대체로 혀를 끌끌 차거나,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니 모른 척 고개를 돌리며 외면하게 될 거다. 그렇다. 여기까지 써 내려간 글은 지독한 이기주의로 점철된 점과 선의 집합일 뿐이다. 내가 살려고 썼다. 죽고 싶다는 말은 사실 생략된 괄호가 쳐져 있는 법이다. 죽고 싶다는 건 죽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괄호를 지우고 싶어서 썼다. 생략을 무화하고 싶어서 썼다. 죽고 싶어서. 죽(지 않)고 싶어서. 죽지 않고 싶어서. 그래서 썼다.
서두에 언급한 글 ‘(못)쓰니까 (못) 쓰죠’ 역시 괄호를 활용한 말장난이 깃들어있다. 지금의 나는 어째서인지 괄호와 괄호 속의 글자가 모두 지워져 쓰니까 쓰는 상황에 놓여있다. 시발점은 계획에도, 상상에도 없었던 B와의 우연한 재회였다. 만약 B가 이 글을 읽는다면 왜 글을 안 쓰냐는 질문에 보다 적절한 답이 됐으려나. 너무 어두운 글만 쓰는 게 두렵다는 이유로 떠난 그가 그립다. 항상 어둡자는 건 아니지만 당장은 밝은 게 싫은 사람도 분명 있다. 의식적으로 밝은 티를 내는 건 대낮 길 한복판에서 상향등을 키는 것만큼 무용하지 않겠나. 알량한 위선은 실상 욕지기만 유발할 뿐이다.
그런데 다 쓰고 나니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되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아니, 이것 역시 알 것도 같다. 거울만 보면 정신 못 차리는 빌런이니까, 알 것도 같다.
2025.02.18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