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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소 Aug 07. 2023

#0 떠나는 마음

2023년 1월 3일부터 1월 31일까지 한 달 정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2023년 1월 3일부터 1월 31일까지 한 달 정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지내기로 했다.


밀라노에는 유학 중인 고등학교 친구가 살고 있다. 타향살이를 하는 친구네에 한 번 가봐야지 하는 오지랖도 있었고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도 컸다. 학교 졸업한 후에 친구랑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어 아쉽기도 했고, 관광도 놓칠 수 없단 생각에 이탈리아에서 한 달 살이를 해보자고 결심했다. 


이상하게도 그냥 한 번 해볼까도 아니었다. 회사에서 허락을 안 해주면 퇴사라도 하겠다는 엄청난 의지였다. 무언가 이대로 살기에는 답답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 같다. 다행히 한 달이나 휴가를 보내줘서 무모하게 퇴사하지 않고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됐다. 무급이지만 실직이 아닌 휴직 상태로 떠나는 마음은 훨씬 안정적이다.


별 일 없이 보낸 올해 하반기는 '떠날 사람'인 상태로 지냈다. 항공권 티켓팅은 올해(2022) 8월에 했는데 티켓팅한 날부터 여행을 떠나기 전날까지, 즉 떠나기 전까지의 시간이 꼭 공짜로 주어진 별책부록 같았다. 임시인 상태, 따로인 시간. 본격적인 인생은 여행 후에나 이어질 것 같달까. 그래서 올가을은 아주 아주 은근~히 들뜨고 어떻게 살든 조금은 마음이 가벼웠다.

이른 아침 카페에서, 들뜬 마음으로 끄적끄적(이런 거 적어놓고 체크해가며 짐 챙기는 스타일도 아님 주의)

심지어 실패를 해도 괜찮았다. 사실 지난 여름 내내, 목표 900점을 걸고 토익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직 준비 겸 전 남친과 이별 직후의 빈 시간 활용하기가 목적이었다. 그런데 떠나는 날까지 목표 점수를 얻지 못했다. 하반기 내내 토익만 공부하다 끝난 것 같아 억울했지만, 곧 떠날 사람이니까 ‘어차피 여행갈 건데 뭐’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었다. 만약 여행 계획이 없었더라면 기약 없이 고작 토익에나 매진하는 스스로에게 ‘왜 빨리 점수를 내지 못해!’ 하고 날 다그쳤을 것이다.


이런 들뜨고 가벼운 마음을 평소에도 가질 수 있을까? 떠나기 전인 여행자의 특권일까? 인생을 책에 비유한다면, 첫 장(탄생)과 마지막장(죽음) 사이에 다양한 챕터를 만든다고 생각하면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인생이란 여행 같은 시기별 이벤트를 기준 삼아 챕터를 만들고, 하나의 장이 일단락 되는 것의 반복인 거지. 연애, 취업, 이직, 여행... 나만의 이벤트들은 매 순간 중요하겠지만, 그것들 각각이 마음에 드는 결말로 마무리 되지 않더라도 각 챕터를 끝맺을 때는 '떠날 마음'을 갖는 거다. 그러다 보면 각각이 중요한 기능을 하는 기, 승, 전, 결 같은 시기도 있겠지만 또 번외편처럼 가볍게 읽고 끝낼 파트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끝날지 몰라 막막한 인생을 그렇게 나눠 생각한다면 '이번 생은 망했어'라는 막연한 불안감 대신 '이번 챕터는 노잼이었어' 하고 조금 더 가벼운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선택이 맞을까?’, ‘실패하면 어떡하지?’, ‘영원히 준비기간만 거치면 어떡하지?’라는 답 없는 걱정은 줄어들고 해당 챕터에 집중한 구체적인 선택도 가능해진다.




이런 떠나는 마음을 평소에도 잘 활용해 봐야겠다. 인생이 길다고 해서 언제가 될 지도 모를 시점에 줄 영향까지 걱정하면, 최선의 선택을 하기 어려울 테니까. 그동안 난 인생을 너무 통째로 생각하고 산 것 같다. '인생 길게 봐야 한다'는 말에 얽매여 오늘의 즐거움을 못 즐기는 건 싫어서 매 순간 즉흥적은 선택에 날 맡기는 날이 많았다. 그런데 기간을 정해두고 제목을 붙인다면 조금 더 내가 키를 쥐고 가는 인생을 만들 수 있을 것만 같다. 물론 즉흥적인 내 성향이 싫은 건 아니지만 가끔 내 의지가 아닌 무언가에 휘둘리는 느낌이 드는 날도 있다는 건 문제으니까.


12월 29일, 한 해가 저무는 오늘 2022년라는 챕터에는 어떤 제목을 붙일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불안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가은데 하루하루는 의외로 안정기였다. 직장 생활도 안정적이었고 운동하는 습관도 잡혔다. 으쌰으쌰라는 이름의 작은 습관 모임을 운영하는 사이드프로젝트도 제법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인간 관계를 넓히진 못하고 지내서인지 우물 안 개구리 같기도 했다. 돌아보기 전에는 그걸 몰라, 그저 무언가 배우는 데에 돈고 시간을 많이 써봤다. 언론고시를 위한 논술작문 학원, 독서모임, 한달이지만 영어회화 등... 생활이 안정되니 오히려 더 큰 세계로 나아가고 싶어했구나. 성장을 갈구하고 있었구나. 그래서인지 자꾸만 틈이 나는대로 무언가를 배웠다. 5월에 연애가 끝나 덩그러니 혼자 남았다는 생각이 이런 목마름에 한몫했다.


2023년은 어떨까. 무언가 배운 것에 대한 성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닮기 싫은 사람은 멀리하고 닮고 싶은 사람들과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가끔은  내 마음의 안식처가 되는 친구들에게 위로와 에너지를 받고 싶다. 난 에너지를 바깥으로 방출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나를 채워줄 내향인 남자친구도 만나고 싶다. 그리고 활동이 왕성한 나를 곁에 둬도, 불안해하거나 서운해하지 않는 충만한 사람이면 더 좋겠다. 난 아무리 바쁘게 살아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고독과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 사람이니까, 그런 나를 잘 알아봐주기를... 하하. 세부 계획은 조금 더 곰곰이 짜보는 걸로 하고, 일단 2023년이라는 큰 챕터의 제목은 '용기 있는 변화'로 정해본다.(바뀔 수도 있다. 내 별명은 변덕소라다.)


이탈리아 여행을 앞두니 불안과 안정, 떠날 생각과 정착할 시기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2022.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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