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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소 Aug 14. 2023

#2 핀란드 헬싱키에서 보낸 10시간

1/4 06:00

핀란드 시간으로 아침 6시, 헬싱키 공항에 도착했다. 10시간 뒤인 오후 4시까지 헬싱키에 머물다가 밀라노 가는 비행기로 환승해야 한다. 


지금은 헬싱키 시내로 가는 기차다. 내가 핀란드에 오다니. 그리고 한국에서 핀란드에 가는 게 이렇게나 별 게 아니라니... 비행기 티켓 사서 오면 끝이다. (친구한테 말했더니 “그래 쉽지 뭐. 돈이 문제지”라고 해서 “그러네” 했다.)


기차역 앞 광장

환승지에서 열시간이나 대기하는 바람에 생각지도 못한 핀란드 관광을 하게 됐다. 말만 하던 북유럽에  머물게 됐다니. 뭘 해야하지? 기차에서 폭풍 검색 시작. 딱 두 곳이 내 관심을 끌었다. 새하얀 헬싱키 대성당과 카이스마 국립현대미술관이다. 유럽에서 대성당이랑 현대미술관 봤으면 다 본 거 아닌가 싶다. 뿌-듯.


계단을 힙겹게 올라가 서 마주한 헬싱키 대성당

헬싱키 대성당은 정말 뽀얗고, 하얗고, 으리으리 했다. 높은 지대에 수십 개의 계단 위에 지어져 있었다. 평일 새벽녘에 도착한 탓에 당연히 관광객이 없었고 미사를 드리러 온 사람들도 없었다. 성당은 깜깜한 밤 하늘을 뒤로 하고 조명을 받으며 밝게 빛나고 있었다. 고요하고 조용한 관광지였다. 북유럽의 대성당은 이렇게 하얗구나, 하고 생각했다. 또 새하얗게 쌓인 눈 위에 있는 흰 건물이 더 신성하고 깨끗해 보였다. 커다란 건물을 빙- 둘러 살펴보고, 계단 아래에 빛나는 광장과 건물들도 내려다 봤다. 가끔 야경이나 망망대해를 내려다 볼 때 멍 때리고 바라보는 것처럼, 그렇게 한참을 하얀 눈 덮인 광장을 바라봤다. 오래 쳐다보진 못했다. 너무 추워서. 

아침 8:44, 트램 반대편으로 가는 걸 타서 잘못 내린 곳... 더 가면 항구가 있는 듯

카이스마 현대미술관에 가려고 보니 오픈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태어나 처음 온 나라에서 의지할 곳 없는 나는 구글 지도 앱이 알려준 트램을 탔다. 아, 반대로 탔다. 기내용 캐리어를 끌고 다니면서 한 손에는 폰을 들고, 정말 손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데 트램에 간신히 기댄 몸을 다시 이끌고 엉뚱한 곳에서 내렸다. 그리고 다시 지도를 켰다. 다시 돌아가는 트램을 타고... 지도가 가르키는 정류장에 도착해서 내렸다. 미술관 앞은 다행히 번화가였다. 아직 9시도 안 된 시간... 미술관 오픈은 10시다. 큰 길가에 상가와 카페가 바로 보여서 그 앞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미술관 오픈을 기다릴 카페의 오픈 시간을 조금 기다려야 했지만, 다행히 몇 분 후 카페가 열렸다. 카페 점원이 입간판을 세우고 조명을 켜는 도중에 "들어가도 되나요?"라고 묻고 바로 들어갔다. 카페에 첫 손님으로 입장했다. 하아- 정말 따뜻했다. 언 몸을 녹이기에 딱이었다.


하얀 덩어리가 설탕인데 무척 달았지만 빵이 정말 

기내식으로 받은 샌드위치도 챙겨놨었지만, 가방에 그대로 두고 카페에서 파는 시나몬빵을 시켰다. 공항에서부터 카페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애물단지 같았던 캐리어에서 노트북도 꺼냈다. 처음 간 카페에 내 물건들을 꺼내 놓으니 조금은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 친구들한테 연락도 했다. 그런 다음에는 책도 읽고 노래도 들으며 여유를 즐겼다. 그 순간, 내가 직장과 일상을 떠나오긴 했구나, 새삼 실감났다. 눈 앞에는 백발의 할머니, 비즈니스로 만난 듯한 30~40대 정도의 두 남자, 남녀 커플들이 다녀갔다. 카페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것도 재밌었다. 몸을 좀 녹이고 배도 든든하게 채우다 보니 푸르스름하던 바깥이 쌓이인 눈에 반사돼 새하얀 세상이 됐다. 어느새 어둠이 걷혔지만 구름이 많고 흐린 풍경이었다. 딱히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빠르게 오전 10시가 됐다.


표 사고 전시관 들어가는 입구

카이스마 현대미술관은 카페 건너편에 있었다. 횡단보도만 건너면 됐다. 오전 10시에 딱 입장했는데 묵직한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이미 관람객 몇명이 보였다. 난 끌고 온 캐리어부터 락커에 맡겼다. 옷이나 소지품을 맡기는 입구 정면에 딱 있어서 편했다. 미술관의 인테리어가 인상적이었다. 곡선으로 된 오르막 인테리어가 무척 부드럽고 다정하게 느껴졌다. 로비와 복도에 난 창은 무척 커서 내부가 환했다. 1층은 짐 보관소와 카페, 기념품샵이었고 2~5층이 전시관. 각 전시관은 자동문으로 닫혀있어서 작품들에 집중할 수 있는 구조였다. 티켓팅을 하는데 스태프분이 처음에 “학생이냐” 물었다. 난 “어른”이라고 대답했고 그 분이 다시 “25세 이하야?” 하길래 “서른둘이에요...”라고 말했다. 기분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ㅇㅋ하지 뭐 그렇게 굳이 솔직해?’ 하는 표정이셨던 것 같았다. 아닐 수도 있다.

전시에서는 동시대 북유럽 아티스트들의 관심사를 알 수 있었다. 너무 좋았다. 그들은 주로 북유럽의 자연을 예찬했고 훼손을 두려워했다. 또 시리아 내전이나 1994년에 일어난 에스토니아호 침몰 참사에서 온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다. 우리나라나 이곳이나 사람들 관심사가 비슷한 것 같아 동질감을 느꼈다. 참사의 공포는 마커스 차퍼(Markus Chopper)라는 아티스트의 투박하고 차가운 쇳조각 작품들에서 느껴졌다. 그는 “죽음과 썸 탄” 예술가로 불리다가 50세에 요절했다고 한다. 그의 드로잉, 설치작품들 모두 그로테스크한데 그런 것들을 만들어내면서 트라우마를 감당한 것 같다. 울창하고 거대한 자연과 왠지 모르게 넓게 깔려 있는 우울이 느껴졌다.


'자연주의 적이면서 우울한, 이런 게 북유럽 감성인가봐!'라고 생각하면서 공항으로 향했다. 여유롭게 도착해서 친구랑 매일 영상통화로 하는 영어회화 스터디를 했다. 암기한 영어 문장을 서로 말하는 방식인데, 왠지 재밌었다. 무언가 집에서 매번 하던 걸 낯선 곳까지 와서 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이제 친구 집으로 가면 아침 러닝도 할 생각인데, 괜히 그것까지 기대가 된달까. 이제 드디어 밀라노로 가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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