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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시간으로 아침 6시, 헬싱키 공항에 도착했다. 10시간 뒤인 오후 4시까지 헬싱키에 머물다가 밀라노 가는 비행기로 환승해야 한다.
지금은 헬싱키 시내로 가는 기차다. 내가 핀란드에 오다니. 그리고 한국에서 핀란드에 가는 게 이렇게나 별 게 아니라니... 비행기 티켓 사서 오면 끝이다. (친구한테 말했더니 “그래 쉽지 뭐. 돈이 문제지”라고 해서 “그러네” 했다.)
환승지에서 열시간이나 대기하는 바람에 생각지도 못한 핀란드 관광을 하게 됐다. 말만 하던 북유럽에 머물게 됐다니. 뭘 해야하지? 기차에서 폭풍 검색 시작. 딱 두 곳이 내 관심을 끌었다. 새하얀 헬싱키 대성당과 카이스마 국립현대미술관이다. 유럽에서 대성당이랑 현대미술관 봤으면 다 본 거 아닌가 싶다. 뿌-듯.
헬싱키 대성당은 정말 뽀얗고, 하얗고, 으리으리 했다. 높은 지대에 수십 개의 계단 위에 지어져 있었다. 평일 새벽녘에 도착한 탓에 당연히 관광객이 없었고 미사를 드리러 온 사람들도 없었다. 성당은 깜깜한 밤 하늘을 뒤로 하고 조명을 받으며 밝게 빛나고 있었다. 고요하고 조용한 관광지였다. 북유럽의 대성당은 이렇게 하얗구나, 하고 생각했다. 또 새하얗게 쌓인 눈 위에 있는 흰 건물이 더 신성하고 깨끗해 보였다. 커다란 건물을 빙- 둘러 살펴보고, 계단 아래에 빛나는 광장과 건물들도 내려다 봤다. 가끔 야경이나 망망대해를 내려다 볼 때 멍 때리고 바라보는 것처럼, 그렇게 한참을 하얀 눈 덮인 광장을 바라봤다. 오래 쳐다보진 못했다. 너무 추워서.
카이스마 현대미술관에 가려고 보니 오픈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태어나 처음 온 나라에서 의지할 곳 없는 나는 구글 지도 앱이 알려준 트램을 탔다. 아, 반대로 탔다. 기내용 캐리어를 끌고 다니면서 한 손에는 폰을 들고, 정말 손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데 트램에 간신히 기댄 몸을 다시 이끌고 엉뚱한 곳에서 내렸다. 그리고 다시 지도를 켰다. 다시 돌아가는 트램을 타고... 지도가 가르키는 정류장에 도착해서 내렸다. 미술관 앞은 다행히 번화가였다. 아직 9시도 안 된 시간... 미술관 오픈은 10시다. 큰 길가에 상가와 카페가 바로 보여서 그 앞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미술관 오픈을 기다릴 카페의 오픈 시간을 조금 기다려야 했지만, 다행히 몇 분 후 카페가 열렸다. 카페 점원이 입간판을 세우고 조명을 켜는 도중에 "들어가도 되나요?"라고 묻고 바로 들어갔다. 카페에 첫 손님으로 입장했다. 하아- 정말 따뜻했다. 언 몸을 녹이기에 딱이었다.
기내식으로 받은 샌드위치도 챙겨놨었지만, 가방에 그대로 두고 카페에서 파는 시나몬빵을 시켰다. 공항에서부터 카페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애물단지 같았던 캐리어에서 노트북도 꺼냈다. 처음 간 카페에 내 물건들을 꺼내 놓으니 조금은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 친구들한테 연락도 했다. 그런 다음에는 책도 읽고 노래도 들으며 여유를 즐겼다. 그 순간, 내가 직장과 일상을 떠나오긴 했구나, 새삼 실감났다. 눈 앞에는 백발의 할머니, 비즈니스로 만난 듯한 30~40대 정도의 두 남자, 남녀 커플들이 다녀갔다. 카페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것도 재밌었다. 몸을 좀 녹이고 배도 든든하게 채우다 보니 푸르스름하던 바깥이 쌓이인 눈에 반사돼 새하얀 세상이 됐다. 어느새 어둠이 걷혔지만 구름이 많고 흐린 풍경이었다. 딱히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빠르게 오전 10시가 됐다.
카이스마 현대미술관은 카페 건너편에 있었다. 횡단보도만 건너면 됐다. 오전 10시에 딱 입장했는데 묵직한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이미 관람객 몇명이 보였다. 난 끌고 온 캐리어부터 락커에 맡겼다. 옷이나 소지품을 맡기는 입구 정면에 딱 있어서 편했다. 미술관의 인테리어가 인상적이었다. 곡선으로 된 오르막 인테리어가 무척 부드럽고 다정하게 느껴졌다. 로비와 복도에 난 창은 무척 커서 내부가 환했다. 1층은 짐 보관소와 카페, 기념품샵이었고 2~5층이 전시관. 각 전시관은 자동문으로 닫혀있어서 작품들에 집중할 수 있는 구조였다. 티켓팅을 하는데 스태프분이 처음에 “학생이냐” 물었다. 난 “어른”이라고 대답했고 그 분이 다시 “25세 이하야?” 하길래 “서른둘이에요...”라고 말했다. 기분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ㅇㅋ하지 뭐 그렇게 굳이 솔직해?’ 하는 표정이셨던 것 같았다. 아닐 수도 있다.
전시에서는 동시대 북유럽 아티스트들의 관심사를 알 수 있었다. 너무 좋았다. 그들은 주로 북유럽의 자연을 예찬했고 훼손을 두려워했다. 또 시리아 내전이나 1994년에 일어난 에스토니아호 침몰 참사에서 온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다. 우리나라나 이곳이나 사람들 관심사가 비슷한 것 같아 동질감을 느꼈다. 참사의 공포는 마커스 차퍼(Markus Chopper)라는 아티스트의 투박하고 차가운 쇳조각 작품들에서 느껴졌다. 그는 “죽음과 썸 탄” 예술가로 불리다가 50세에 요절했다고 한다. 그의 드로잉, 설치작품들 모두 그로테스크한데 그런 것들을 만들어내면서 트라우마를 감당한 것 같다. 울창하고 거대한 자연과 왠지 모르게 넓게 깔려 있는 우울이 느껴졌다.
'자연주의 적이면서 우울한, 이런 게 북유럽 감성인가봐!'라고 생각하면서 공항으로 향했다. 여유롭게 도착해서 친구랑 매일 영상통화로 하는 영어회화 스터디를 했다. 암기한 영어 문장을 서로 말하는 방식인데, 왠지 재밌었다. 무언가 집에서 매번 하던 걸 낯선 곳까지 와서 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이제 친구 집으로 가면 아침 러닝도 할 생각인데, 괜히 그것까지 기대가 된달까. 이제 드디어 밀라노로 가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