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소 Oct 09. 2023

#6 단단하면 부러지게 되어 있다

곤란한 일이 생겼다. 이태리는 열쇠를 막 한 방향으로 여러 번을 돌려야 열린다. 카드키나 번호키는 없다. 몇백 년 된 건물을 여전히 쓰는 만큼 문짝에 난 열쇠구멍도 무척 오래된 것 같다. 역시 유럽이다. 편리함이 최우선인 건 우리나라뿐인가.


곤란한 아침은 이태리에서 맞이하는 첫 토요일부터 시작이었다. 친구는 약속이 있어서 나가고 마침 혼자 있다가 외출을 하려던 참이었다. 이 집은 안에서 나갈 때도 열쇠를 돌려야 잠긴 문이 열리는데, 열쇠가 구멍에 박힌 채로 찢어졌다. 스틸로 된 열쇠가 부러진 건데 무슨 젤리 잘라지듯이 스륵- 찢어졌다. 친구가 맡기고 간 열쇠 꾸러미에는 4개의 열쇠가 있었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올 때 쓰는 철문, 아파트 건물 현관문, 그리고 집 열쇠와 용도 기억이 안 나는 거 하나까지. 친구가 문을 열 때마다 눈여겨본 적은 없었고 나에게 열쇠를 주며 설명할 때 딱 한 번 어떤 열쇠가 어떤 문을 여는 건지 설명을 들었을 뿐이다. 표라도 해달라고 하거나 메모를 해주었으면 참 좋았겠지만, 나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으므로 들어가는 열쇠가 그 문짝에 맞는 거겠니 생각했다. 그러고 아무 열쇠를 넣었는데 한 번에 들어가길래 돌려보았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한 번은 돌아갔고 이제 세 번 더 돌려야 문이 열릴 텐데, 자꾸 걸리적거리면서 열쇠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다 주르륵. 열쇠가 찢어졌다.


한숨이 나오고 눈물도 날 것 같았다. 그래도 일단 상황을 해결해야 하니 바로 외출한 친구에게 전화해서 상황을 알렸다.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역시나 당황한 친구. 내 말을 듣더니 아마 문짝을 바꿔야 할 것 같단다. 일단 건드리지 말고 있으라는 말과 함께 지금 들어가겠다고 했다.


사실 아침에도 일이 있었다. 화장실과 주방을 깨끗하게 써야 한다며 주의를 받았다. 화장실은 욕조를 잘 닦아야 한다고, 싱크대에는 전날 먹은 라면국물이 있다고. 친구방 건너편에도 룸메이트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와 쓰는 공용공간이니 주의해 달라는 거였다. 난 설거지도 깨끗하게 하는 편이고 싱크대도 잘 정돈하고 설거지를 마치는 편인데... '쓴 흔적이 없어야 한다'며 강하게 말하길래 티는 안 냈지만 그 순간에는 잔소리처럼 느껴지고 기분이 별로였다. 그리고 더욱더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격렬하게 생각하던 중이었다. 신세 지는 게 싫어서 친구한테 한달살이를 이야기할 때 제일 먼저 꺼낸 말이 한 달 집세를 정식으로 내겠다는 의사를 밝혔던 나다. 경고를 받은 날 문짝을 바꾸게 될지도 모른다니 마음에 부담감이 컸다. 작은 실수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고 사고뭉치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그래도 겉으로는 계속 미안하다고 했다. 내가 온 뒤로는 오랜만에 혼자 편하게 외출을 했을 텐데 내 호출에 신경이 쓰일 테니... 거듭 미안하다고 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부담과 놀라움에 휩싸여서 소파에 힘을 풀고 앉으니 눈물이 흘렀다. 전날, 전전날에도 어색한 기류가 채 가시지 않았는데…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친구도 당황스러울 거고 당황한 그녀의 모습을 볼 걱정에 나도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한참을 멍하니 ‘이게 다 뭔 일이야 나 어떡해~’ 하다가 가만히 있음 안 되겠다 싶어서 부엌을 뒤졌다. 젓가락, 숟가락 패스, 국자랑 가위도 너무 굵고... 그러다가 칼을 찾았다. 작은 과도였다. 될까? 싶고 이러다 칼까지 부러뜨리는 거 아닌지 걱정은 됐지만 그래도 빼보자. 다시 열쇠가 박힌 구멍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 칼로 살짝 열쇠를 건드렸다. ‘어랏?’ 열쇠가 생각보다 헐렁하게 끼어있었다! 맙소사! 이래서 뭐든 시도를 해봐야 한다니까. 용기가 생겨 칼로 살살 열쇠구멍의 틈을 비집고 조각을 건드렸다. 1분도 안 돼서 잘린 열쇠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아... 문짝 안 바꿔도 된다... 태산 같던 문제가 열쇠 하나 복사하면 끝나는 작은 일이 됐다. 난 이제 갇히지도 않았고 나갈 수도 있게 됐다. 이렇게 큰 부담감이 다소 허무하게 사라진 듯했다.


어쨌든 다행이었지만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나와 친구 사이에 생긴 마음의 문제였다. 당혹스럽고 어려운 상황을 한 마음으로 헤쳐나가지 않은 것, 민폐 손님과 당황스럽기만 한 집주인 밖에 되지 못한 우리 사이. 이전에도 잔잔바리로 마음이 잘 맞지 않는 걸 느꼈지만 이번 열쇠 사건으로 나는 심경의 변화가 컸다.


아직 한 번의 사건이 있었을 뿐이지만 가장 크게 느낀 점은 불편함이었다. 친구와 여행 계획 중 일정이 크게 틀어져서 “너랑은 그냥 안 맞아. 이해를 할 수가 없어”라는 말을 듣게 됐는데, 그저 웃자고 한 말이었지만 웃고 넘길 농담이 아니었다. 솔직히 그 순간 나라는 사람 자체가 그 친구에게 차단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너라는 사람은 받아들이기가 어렵겠다는 의도가 느껴졌다. 이런 감정은 너무나 별거 아닌 일로 옮겨가 더 큰 문제로 악화됐다. 예를 들면 라면 국물을 못 보고 안 닦은 내 잘못에 친구는 “이걸 못 봤다고? 이게 안 보여? (난 그런 니가) 이해가 안 가”라며 큰 소리를 냈고 난 거기에 감정이 상해 심각해지는 식이다. 그 순간 기분 나쁘다는 표현도 부담스러워서 솔직하지 못한 것도 문제였지만, 우리 사이에 ‘그럴 수도 있겠다’ 하는 너그러움이 없어서 모든 사소한 일이 큰 문제가 되어버렸다. 친구도 자신과 너무 다른 생활습관을 가진 나에게 한 마디 하는 게 어려웠을지 몰라도, 나 또한 모든 게 당황스러웠다.


열쇠 조각을 꺼내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나만큼 많이 놀란 친구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왜 그 열쇠를 현관문에 넣었냐, 모르면 물어보라고 하지 않았냐”며 길길이 큰 소리로 화를 냈다. 나는 “그래 열쇠가 4개나 달린 꾸러미를 받고 이게 무슨 문의 열쇠인지 하나하나 물어봤으면 제일 좋았겠지. 그런데 하나 넣어본 열쇠가 쑥 잘도 들어간 건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단다”라고 대응했다. 그러면 또 “왜 안 물어봤냐”라고 말하고 우리의 대화는 아무 생산적인 결론으로 닿지 않고 무한반복되었다. 답답했다. 왜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때로 돌아가 자꾸 나를 탓하는 건지, 그러면서 나한테 “됐다, 말을 말자” 하며 날 한심스럽게 치부하고 상황을 종료하는 건지. 최근 몇 년 간 받은 취급 중에 가장 하찮은 취급이었다.


너무 기분이 안 좋고 서러웠다. ‘내가 그렇게 잘못했나? 이렇게까지 윽박지를 일인가? 나에게 왜 이러지? 나를 부정당하는 기분으로는 더 이상 지낼 수 없다. 이런 취급을 받을 수는 없다. 잘못을 하면 친구한테 이렇게 해도 돼?‘ 당혹스러운 친구의 반응이 나에게 닿았을 때 내 머리에는 끊임없는 물음이 퐁퐁퐁 떠올랐다. 그리고 하루종일 내내 내 주변에 둥둥 떠다녔다. 그것들은 분노와 서러움으로 이어졌다. 다시 대화를 해보면 바뀌게 될까? 아니. 지금은 너무 속상해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만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5 교통사고처럼 불쑥 찾아온 불편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