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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달 Aug 10. 2024

[위아영] 오늘은 어쨌든 내일보다 젊으니까

뉴욕의 어느 평범한 동네. 이곳엔 40대에 접어든 다큐멘터리 감독 조쉬와 제작자인 아내 코넬리아가 살고 있다. 아이 없는 자유로움을 나누고 있는 두사람. 현재 8년째 같은 작품을 붙잡고 씨름 중인 조쉬의 모습에 결혼생활은 왠지 적막하다. 어느 날, 이들 앞에 나타난 20대 힙스터 커플 제이미와 다비. 제약 없는 사고방식과 열정에 잊었던 시절이 떠올랐을까. 조쉬와 코넬리아는 혈기 왕성한 라이프 스타일에 빠져들어 간다. 그러나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법. 따라가기 벅찬 육체적 피로는 물론, 순간순간 제동이 걸리는 "힙한" 생활양식들이 조쉬를 당혹케 한다. 놀라우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제이미의 작품 활동. 그리고 어느새 멀어진 친구들과의 관계를 바라보며 혼란에 빠지는 조쉬. 그제야 스스로 질문하게 된다. 자신이 놓지 못하고 붙잡고 있는 건 무엇인지.



내가 먼저 너였는데 왜

현재 젊은이들을 통칭하는, 이른바 MZ세대를 향한 어르신들의 일갈이 있다. 물론 X세대였던 자신들도 윗세대에게서 수없이 들었던 말. 심지어 기원전 수메르인이 썼을 거라 추정되는 점토판에도 등장하는 이 말. 요새 젊은것들은 버릇이 없어.’ 


선배로서 길잡이가 되주고픈 노력을 봐주지 않아 절레절레하는 한탄일까. 공경의 흐름이 우리 대에서 끊긴 것에 억울함일까. 뭐가 됐든 심통이 난다. 그런데 참 희한하다. 멘트의 역사를 곱씹어보면, 나라 꼴을 해치는 어린놈들의 악행은 수천 년 전부터 발생한 셈. 이미 지구는 파탄났어야 했는데 이상하게도 세상은 별 탈 없이 돌아간다. 심지어 망치는 건 오히려 다음 세대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정신 똑바로 박힌 인류의 마지막 세대는 왜 자꾸 바톤터치 되며, 이들은 도대체 매번 무엇에 화딱지가 나 있는 걸까.


시작부터 꼴보기 싫진 않았을 것이다. 이 단어는 먼발치에서 감정으로만 기억해야 하는 우리에게 잊혔던 시간을 떠오르게 하는 자극제가 되기에. 새로운 세대가 뿜어내는 싱그러움이라면 일단은 나도 모르게 박수치며 반기게 되므로. 그리고 그 에너지는 자성이 있어서 현실의 의지를 뛰어넘어 스테이지로 빨려들어가게 하니까. 이처럼 젊음’은 듣기만 해도 벅차고 찬란한데, 앙심을 품을게 뭐가 있겠어.


영화 <위아영> 속 조쉬도 마찬가지다. 자유로운 신진 다큐멘터리 작가 제이미를 마주한 그는 신선한 충격에 빠진다. 대화하다 막히더라도 검색하지 말고 같이 생각해 보고기억이 나지 않으면 그대로 놓아주자는 여유로움. 뜻밖의 사건에서 배우겠다며 규칙을 파괴하는 작업방식.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엔 살아온 날들이 있어 이질감이 있지만, 조쉬의 눈동자엔 그동안 풀리지 않던 인생의 실마리가 스친다. 그렇게 혈 자리를 찾은 듯 폭발적으로 써내려가는 조쉬의 해방일지. 이는 다큐계의 거장인 장인의 평가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괴로움의 폭발일지도, 눈을 반짝이며 조언을 구하는 후배에 대한 기쁨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여기까진 참 좋다. 세월에 정체되는지도 모른 채 빠져있던 긍정 회로의 늪에서 벗어날 찬스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삶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지. 열정 가득한 마인드 셋은 뇌만 컨트롤할 뿐, 우리의 몸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불편한 진실. 신나서 출격 준비를 마쳤던 조쉬는 그렇게 인간의 최대 빌런, 노화를 만난다.



삶은 언제나 환상과 달라서

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공포가 존재하지만, 그중 단연 압도적인 두려움은 죽음이다. 초고층 높이의 흔들다리에서 느끼는 무서움도, 귀신이 나올까 으스스한 떨림도 모두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오는 것일 테다. 진시황이 그렇게도 불로초를 찾아다녔듯, 불사의 영웅담이 동서양 곳곳에 존재하듯, 죽음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길 바라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물론 목숨 줄을 잡는 공포가 우리 삶에서 자주 일어나진 않는다. 그랬다면 정신이 나가던가, 오히려 둔감해질 수도 있겠지. 그러다 보니 뜬금없이 마주한 노화 증상에 덜컥 마음이 복잡해진다. 사소하지만 어쨌든 데드라인에 한 발짝 더 다가갔단 신호니까.


조쉬와 코넬리아도 노화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자전거를 타다 발견한 관절염이 퇴행성이라는 진단. 더 이상 임신의 기회가 없다고 받아들여야 하는 나이. 삶의 곳곳에서 생물학적 소멸이 비치며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한다. 부상으로 생긴 관절염일거란 마음과, 아이 없는 삶을 오히려 긍정하는 다독임에 속상함이 왠지 더 묻어난다. 친구 부부와 달리 자유롭게 살고 있단 자부심과, 전성기의 열정을 다시 채웠다는 희망 때문일까. 시간의 흐름앞에서 힘 한번 못써보고 기권해야 하는 슬픔은 곱절이 되고만다. 



그래도 신체적 노화는 놀란 가슴이 차분해지면 자연의 섭리라며 슬프지만 받아들이기도 한다. 과학적으로 확실하게 진단이 나오니까 반박할게 없지. 그러나 이와 달리 쉽사리 인정하기 어려운, 혹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노화 증상이 있다. 바로 정체성의 노화다. 특히 이는 자존심의 영역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틈을 꽁꽁 싸매고 있기도 하다. 8년이나 한 작품을 붙잡고 있던 조쉬도 마찬가지다. 빼고 걸러야 할 내용엔 고집을 부리고, 작품 설명은 고루 해졌으며, 설득의 양식은 변할 줄 모른다. 피드백은 비난이 되고, 근본 없는 것들에 환호하는 세상이 역겹다. 아이디어 넘친다고 칭찬했던 후배의 작품은 쳐다보기도 싫어진다. 2보 전진을 위한 숨고르기를 왜 아무도 몰라주는 건가. 나는 여전히 건재한데 왜 자꾸 밀어내는가.


아집에 가까운 그의 분노. 소통불가의 꼰대로움에 한심하고 답답하다. 헌데 그저 무뎌진 자기객관화의 산물이라 손가락질 하기엔, 사나운 목소리 너머 속상함이 스친다.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한 채 새로운 바람을 맞아야 하는 무력감도 담겨있다. 생의 길목을 딱 쥐고있는 생물학적 노화를 떠올리면 이런 자아성찰이 무슨 공포인가 싶지만, 나를 잃어버린 육체야 말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암흑과도 같은 것. 내 사망선고를 내가 듣는다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손을 놓으면 나도 사라지는가 싶어 한계를 실감해도 작업 완성을 미루고 있었던 조쉬. 결국 그 시간은 변명이었다는 걸 인정하기란 그에게 공포 그 자체였을 테다. 그래서 끝까지 부정하고 거부했는지 모른다. 숨 쉬며 느끼는 죽음의 한 형태, 육체는 살아있지만 켜켜히 쌓아온 뿌리를 잘라내는 고통, 도태야 말로 정말 두려운 일이니까.



나이는 나이 들어감이다

세상의 주도권을 잡은 세대는 갱신되기에, 필드의 트렌드는 당연히 변한다. 유한한 인생 속에서 바톤은 언젠간 넘어간다. 신체 노화에 굴복하고 슬퍼했던 것처럼, 새해가 될때마다 머리에 도태라는 총알이 박히지 않도록 덜덜 떨고 있어야 하는 걸까. 나이를 먹는 다는 건 오직 퇴장만을 가리키는 걸까.


이에 영화 <위아영>은 당연한 섭리를 현명하게 받아들일 힌트를 제공한다. 영화 중반, 조쉬의 장인이자 레전드 영화감독인 아이라는 8년 만에 조쉬의 영화 가편집본을 감상한다. 그리고는 써먹을 부분이 꽤 많더군제대로 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장인과 사위 사이에 건조하게 던져진 피드백. 선배 감독으로서 영화적 완성도를 위한 한마디 조언이기도 하지만, 오랜 시간 공을 들인 덕에 네 영화에 활용할 부분이 상당히 남았다는 격려가 더욱 들린다. 견고하게 깎아낼 마침표는 앞으로 남은 인생으로 해결하라는 응원이기도 하다. 허술한 연출이었을지 몰라도 겪어낸 시간만큼 조쉬의 손엔 풍부한 촬영본이 남아있었던 것. 우리의 나이 듦은 도태의 전조가 아니다. 다음 세대를 쪼아대는 질투의 원인도 아니다. 그래서 영화 <위아영>은 속상한 순간은 생기더라도 훌훌 털어내길 독려한다. 최종 그림을 향해 '써먹을' 포인트를 차곡차곡 쌓는 과정이기에.


흔히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얘기한다. 나이에 구애받지 말고 언제나 자신의 열정을 태우라는 메시지. 보통 연배가 있는 분들을 향한 멘트란 걸 생각해 보면, 나이 듦의 불리함이 은연중에 담겨있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생물학적 컨디션 차이는 무시할 수 없다 해도, 에너지 총량을 어찌 근육에서만 찾을 수 있겠는가. 켜켜이 누적된 경험치야말로 내딛는 발걸음에 묵직하게 힘을 실어주는 뒷배가 되는걸. 그러고 나니 영화의 원제가 다시 보인다. <While we are young> 노아 바움백 감독은 국내 개봉 제목처럼 ‘우리는 젊다(we are young)’고 선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허황된 환상들을 우리의 젊은 시절 동안(while we are young)’ 하나씩 마주하며 나이 들길 권한다. 노화의 끝에서 정말 숫자에 불과한 나이로 남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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