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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gui Oct 18. 2023

충동이란 삶의 균열, 베오그라드 1

0. 프롤로그


어떤 행위를 '충동적으로' 한다는 건 개인의 역사에서 꽤나 놀라운 사건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정형화된 패턴으로 삶을 살아가고, 이러한 규칙적인 패턴 속에서 안정과 권태를 동시에 느낀다. 충동이라는 삶의 작은 균열은 권태를 이겨내는 힘이자 규칙적으로 직조한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건강한 일탈이다.

 

이 삶의 규칙성을 깨트리는 '충동성'은 특정 어휘 앞에서 자주 쓰이곤 한다. 소유적 삶의 양식에서 무언가를 '충동적으로 구매'하거나, 존재적 삶의 양식에서 '충동적으로 떠나'거나—프롬은 삶의 양식을 소유적 삶과 존재적 삶으로 양분해 설명했다—


애석하게도 난 무언가를 구매하고 소유하는데 서투른 사람이라서, 물건을 충동적으로 구매하는 일은 결코 많지 않다. 반면 충동적으로 떠나거나 목적지를 정하는 경우는 꽤 많은 편인데, 이번 2박 3일의 베오그라드 여행이 그랬다.


당분간 여행을 가지 않기로 결심한 참이었다. 류블랴나로 교환학생을 오기 직전, 2주 동안 30kg가 넘는 짐을 끌고 호스텔에서 묵으며 극한으로 유럽 여행을 마치고 온 탓에 여행에 완전히 질려버린 탓이다. 류블랴나 대학교 기숙사에 입주하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입주를 하고 나흘 정도 지났을까, 행동반경이 안정돼 가던 참에 충동적으로 베오그라드 행 버스 티켓을 예매했다.



1. 계기


"이 책은 그 문장, 그 느낌, 그 장소의 기록이다. 무언가를 읽었던 유럽의 어딘가, 그 어딘가를 같이 걸었던 문장들을 여기에 공유한다. …(중략)… 더 바라는 바는 여행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여행법을 찾는 것이다. 또 책 읽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자신만의 독서법을 찾는 것이다." - <도시를 걷는 문장들>, 강병융


신형철 평론가는 <인생의 역사>의 서두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문장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모른다. 어느 날 어떤 문장을 읽고 내가 기다려온 문장이 바로 이것임을 깨닫는다." 강병융 작가의 짧은 문단은 당시에 내게 가장 필요했던 문장이었던 것 같다.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두 가지, 책과 여행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하나의 콘텐츠로 연결하는 그의 자신감이 좋았고, 여행을 인생의 메타포로 여기는 내게 "자, 다시 떠나 봐. 네가 좋아하는 책과 함께, 가벼운 발걸음으로. 겁낼 필요 없어."라고 조언해 주는 것 같았다. 이 메시지는 곧, 여행에 대한 조언이자 인생에 대한 조언으로 느껴졌다.



2. 강제 아날로그 여행


여행 전 날 절실히 필요한 문장을 만나게 됐고, 그날 바로 베오그라드행 버스 티켓과 숙소를 예매했다. 배낭에 좋아하는 책 한 권과 옷 두 벌, 속옷, 양말, 디지털카메라를 챙긴다. 교통편과 숙소만 예매하고, 현지에서 때에 맞게 정보를 찾아다니는 게 내 여행 습관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사전 준비는 하지 않았다. 심지어 SIM 칩조차도.


그게 화근이었다. 내가 사용하는 슬로베니아 SIM 칩에는 EU 국가에 한해 5GB의 데이터를 제공하는 옵션이 있었다. 슬로베니아에서 크로아티아를 거쳐, 세르비아 국경에 다가서는 순간 갑자기 버스가 정차하더니 버스 기사가 모든 승객들에게 여권을 들고 내리라고 말했다. 처음 경험하는 국경 심사에 신기해하는 것도 잠시, 아뿔싸, 스마트폰의 데이터가 먹통이다. 아닌 게 아니라 세르비아는 EU 국가가 아니다. 항상 EU 국가 내에서만 여행했던 나는 당연하게 '유럽=EU'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착까지 30분, 다행히 Flix 버스 내에서는 와이파이가 잘 터졌고 30분 동안 급하게 세르비아의 여행 정보를 뒤져봤다. 불행하게도 세르비아는 한국어 정보가 별로 없는 나라였고, 숙소의 위치와 대중교통 정보만 대충 수집한 뒤 베오그라드 버스 터미널에 내렸다.


처음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해 주던 스마트폰의 기능이 상실되고, 간간이 잡히는 와이파이에 의존해 여행을 해야 한다니. 새삼 선배 여행가들이 존경스럽게 느껴졌고, 처음 겪는 정보의 상실 속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두려움도 잠시, 극심한 허기가 몰려왔다. 9시간의 이동 탓에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다행이다. 두려움을 이기는 생존 본능이 강렬하다는 건. 와이파이가 잡히는 베오그라드 대학교 앞 광장 벤치에 앉아 식당을 찾아냈다. pljeskavica(플레스카비차)라는 세르비아식 햄버거를 판매하는 현지 식당이었다. 소문대로 정말 맛있었다. 짭짤하고 후추의 거친 향이 강조된 패티에 불맛 가득한 빵, 그리고 다양한 소스의 조화가 일품이었다. 말 그대로 맥주를 부르는 맛이었다. 세르비아에서 먹은 음식들은 정말 최고였다!


베오그라드의 대중교통 또한 세르비아 여행의 난이도를 올리는 데 일조한다고 생각한다. 베오그라드의 대중교통은 말하자면 '구글맵의 스텔스기'다. 구글 맵에서 안 보인다는 말이다. BeogradPlus 라는 전용 어플을 설치해야 버스와 트램 노선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런 정보는 한국어로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데이터도 안 통하니 숙소로 가기 위한 트램 정보를 찾고, 일일권을 앱으로 구매하고, 정류장에서 트램을 타는 데만 거진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숙소는 시내 관광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숙소에 가기 전에 베오그라드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인 베오그라드 요새에 들렀다. 수많은 냉병기가 전시된 요새 외곽을 지나 끝에 도달하니 베오그라드 시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원하게 펼쳐진 사바 강과 도나우 강, 강을 따라 우거진 이국적인 나무들. 이런 멋진 자연과 함께 사는 세르비아 인들이 잠깐 부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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