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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gui Oct 18. 2023

닮고 싶은 도시, 베오그라드 2

3.


사람 없는 한적한 공원에서 책을 읽는다. 베오그라드 현대미술관이 기역 자 형태로 흐르는 사바 강 중간에 있고, 우쉬체 파크(Park Ušće)가 나머지를 감싸고 있다. 현대미술관의 모더니즘적 흰색 외관은 아침 햇살을 맞아 기분 좋게 빛나고 있고, 간간이 조깅을 하는 이들의 활력이 이 넓은 녹지를 더욱 활기차게 만든다.


데이터가 여전히 터지지 않는다. 혼자 묵고 있는 숙소에서 캡처한 여행 관련 정보들에 의존해 베오그라드 시내 곳곳을 걷고 있다.


기분 좋음을 약간 넘어 조금은 쌀쌀하게 느껴지는 바람이 새로 산 파타고니아 윈드브레이커를 위협한다. 두고 보자는 듯이, 아마 며칠이 더 지나면 귀가 시린 바람이 불 것이다. 옷을 조금 더 여매고, 가져온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을 아껴 읽는다.


현대미술관에 들려 검은색 바탕에 초록색 오이가 그려진 노트를 구매한다. 현대미술관 자체는 볼 게 없다. 시설 정비를 하는지 1층만 관람이 허용돼 있었는데, 그마저도 작품 개수가 10개를 넘지 않는 실로 조잡한 전시다. 이럴 거면 무료로 개방을 하던가,라는 생각이 몰려왔지만 기존 가격의 반값으로 봤으니 그걸로 만족하기로 한다.


"지금까지 알던 것과 성분이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신선한 감촉이 느껴졌다. 어찌 됐건 내 인생의 자리가 바뀐 것이다. 바뀐 환경이 앞으로 나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지 당장은 확실하지 않을지언정." -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p.330, 무라카미 하루키


짧은 미술관 관람을 마친 후 다시 공원 벤치에 앉아 책을 핀다. 우연히 절실했던 문장을 발견해 새로 산 노트에 기록한다. 확실히 몇 주 전 나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마치 같은 화가가 완전히 새로운 재질의 도화지를 처음 사용하는 것처럼. 나는 바뀌지 않았으나 나를 둘러싼 세계가 바뀌었다. 여행 전, 새로운 세계 속에서 내가 겪는 사소한 변화도 감지할 수 있는 예민함을 가지리라 다짐했다. 그때와 지금의 나는 어떻게 얼마만큼 바뀌었을까.


아무튼간에 여러모로 완벽한 아침이다. 조잘조잘 지저귀는 새, 기분 좋은 녹색이 충만한 곳, 딱 알맞은 온도와 세기의 바람. 묘사하기 식상한 종류의 싱그러움들이 내 주변을 채우고 있다.

 



4.


NATO군의 폭격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건물들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베오그라드 시내 곳곳에 보란 듯이 남아 있다. 앙상하게 뼈대를 드러낸, 마치 괴담 속 해부 모형의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 건물들은 그때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절대 잊지 않겠다고, 항상 기억하겠다고 말하는 듯한 시내 속 작은 폐허들.


그 당당함이 부러웠다. 자신의 상처, 트라우마, 부끄러운 기억과 과오를 모두 내 것으로 인정하고 포용하는 세르비아인들. 사람은 도시를 만들고 도시는 사람을 키운다. 철거와 개발이 익숙한 큰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내 마음속 트라우마와 상처를 지우는 데에 급급했다. 나도 언젠가 베오그라드를 닮을 수 있을까.



5.


베오그라드의 마지막 밤. 숙박은 따로 하지 않고 야간버스를 통해 류블랴나로 되돌아갈 계획이다. 첫날 들렸던 베오그라드 요새에서 일몰을 기다린다. 일몰과 함께 강변 산책로로 내려와 한참을 느릿하게 걷는다. 시간은 충분하므로. 도나우 강변을 한참 동안 걸으며 들었던 검정치마의 <TEEN TROUBLES> 앨범 속 음악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아껴두었던 마지막 트랙인 our own summer를 버스 창가 쪽에 기댄 채 가만히 집중해서 듣는다. 도시를 수놓았던 불빛이 차츰 사그라드는 야심한 밤, 색소폰 연주가 캄캄한 밤 배경과 묘하게 어울린다.


몇 마디 문장에 이끌려 충동적으로 베오그라드에 왔고, 몇 가지 절실했던 문장을 찾으며 여행을 끝마친다. 베오그라드여, 항상 당당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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