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ugui Dec 13. 2023

맑은 날이 귀해서, 블레드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의 근교, 블레드

 10월 중순부터 시작된 슬로베니아의 우기는 예상보다 더 거칠었다. 강한 비바람에 분리수거함이 휘청이고, 천둥번개가 수시로 번쩍이는 날이 지속됐다. 한여름에 적당한 시원함이라도 가져다주는 한국의 장마와는 다른 추위였다. 그런 고로 날씨가 개는 날이면 어디든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졌다.

그날은 일주일 중 단 하루 비가 오지 않는 날이었다. 흐리지도 않고, 완벽하게 푸른 하늘을 기숙사 창밖으로 보고만 있자니 좀이 쑤셨다. 그날 아침에도 어김없이 공복 러닝을 하러 나갔다. 적당하게 조성된 산책길을 뛰면서 푸른 하늘과 싱그러운 풀을 보고 있자니 운동을 하고 있는데도 되려 여행을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어디든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던 찰나, 마침 아시안 교환학생 단체 톡방에서 류블랴나 근처 블레드로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올 사람을 구하는 메시지가 올라왔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원하는 버스가 온 듯한 기분이었다. 완벽한 날씨에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만나기로 한 류블랴나 버스 터미널에는 단 한 명(의 아시안)만 서 있었다. 여러 명이 같이 가는 시끌벅적한 여행을 예상한 건 아니지만, 가는 버스 안에서 책을 읽고 싶었기 때문에 적어도 인원이 홀수이길 바랐다. 오랜만에 환담 실컷 하며 가겠구나, 속을 가다듬고 블레드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같이 동행하게 된 친구의 이름은 Jed였다. 대만 타이베이의 의대에서 공부를 하던 그는 약 한 달간의 해외 인턴십을 위해 류블랴나에 잠시 체류하던 상태였다. 매일 근무를 하기 때문에 좀처럼 장기여행을 갈 수 없던 그는 다른 유럽 국가 대신 슬로베니아의 여러 지역을 구석구석 여행하는 것을 택했다. 반면 나는 슬로베니아 여행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처음 왔을 때부터 이상하게 그런 마음이었다. 나는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인천의 유명한 관광지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일생 동안 신포시장이나 월미도, 송도, 강화도 등 인천의 유명한 관광지를 한 두 번 방문한 게 고작이었다. 마찬가지로 슬로베니아는 내게 여행의 대상이 아닌 '6개월 동안 살아야 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두근거림보단 시니컬함이 컸다. 내가 사는 곳을 여행한다는 표현이 어색하듯이.


Jed는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데 능한 사람이었다. 끊임없이 나에 대해 물어보고, 자신의 생각을 얘기한다. 부모님이 모두 대만 원주민인 그는 구릿빛에 가까운 피부와 밝은 웃음이 매력적인 친구였다. 나와는 다르게 본인이 머물고 있는 국가를 구석구석 여행하는 데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그가 건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남짓 달려 블레드에 도착했다. 돌아가는 버스의 시간을 확인하고, 본격적인 관광에 나섰다. 그는 아마 MBTI로 따지면 J에 가까운 사람이었던 것 같다. 대만에서도 MBTI가 유행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짧은 당일치기 여행, 호수를 둘러보고 언덕에 있는 블레드 성을 바라보는 게 관광의 전부인 블레드에서조차 모든 계획을 세워놨던 것이다. 나는 그다지 계획적인 사람은 못되지만 계획적인 이들의 계획을 따라가는 건 상당히 즐긴다. 그날 역시 순조롭게 그의 계획을 따라갔다.




블레드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호수 쪽으로 조금 걸어가자 곧바로 탁 트인 호수의 전경과 언덕 위 블레드 성이 나타났다. 이렇게 대단한 풍경을 정류장에서 겨우 몇 발자국 안 걸리는 거리에서 봐도 되는 걸까, 괜히 미안함이 들었다. 우기로 어두운 10월이지만, Earth, Wind and Fire가 딱 이 날씨에 노래를 지었다면 노래 제목이 <September>가 아닌 October일수도 있지 않았을까, 쓸데없는 상상도 해본다.


호수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걸었다. 호수 한 바퀴를 걷는데 한 시간 정도 소요됐다. 걸을 때마다 새로운 빛의 각도에서 마주치는 호수가 마음에 들었다. 블레드 호 중앙엔 작은 섬이 있고, 그 위에 마리아 승천 성당이 지어졌다. 수변을 걷는 내내 시선은 그 소박한 성당에 고정된다.


걷는 도중 낚시에 열중하고 있는 중년의 남자와 그 아내를 발견했다. 평화로운 호숫가에 구경거리라도 난 듯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낚시꾼 뒤에서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낚시꾼은 한창 물고기와 씨름하고 있었다. 낚싯대가 격하게 휘었다. 기껏해야 3짜 되는 크기겠지, 하고 지켜보는 그 순간 팔 두 뼘만 한 엄청난 크기의 물고기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내는 뜰채로 낚시꾼의 수확물을 조심스럽게 건져냈고, 물고기가 지면에 도달하자 아내는 낚시꾼에게 진하고도 달콤한 키스를 퍼부었다. 구경꾼들은 둘의 수확에 큰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나의 흔쾌한 동의와 함께, 우리는 그대로 블레드 호수의 전망을 잘 조망할 수 있는 산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경사가 꽤 만만치 않은 코스였다. 입고 있던 윈드브레이커를 벗어야 했다. 약 30분 간의 산행 끝에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항상 나보다 앞서 있던 Jed.

그의 말대로 정상에서 본 블레드 호수의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전망이 좋다는 건 경사가 높다는 것이고, 경사가 높다는 건 힘들다는 걸 잘 알아서 예전에는 이런 곳을 굳이 오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유럽에 오기 전 잠깐이나마 건강을 잃어본 뒤 이런 곳에 오를 수 있는 것 또한 축복이라는 걸 느꼈고, 기회만 된다면 이런 트래킹 코스를 오른 뒤 전망을 꽤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보다 먼저 정상에 올라왔던 중년의 독일 부부가 나무 밑에 난 딱 봐도 위험하게 생긴 버섯을 따서 가방에 넣어 갔다. 괜찮은 걸까. 의대생인 Jed의 표정은 복잡 미묘했다.




블레드 여행은 '블레드 케이크'를 먹어야 진정으로 끝이 난다. 슈가파우더, 바삭한 페이스트리, 달콤한 바닐라 크림의 달콤함이 일품인 케이크다. 마끼아또와 함께, 트래킹에 지친 몸을 달콤하게 충전한다. Jed가 대만 과자 하나를 건네준다. 대만인이라면 이 과자에 대한 추억이 하나씩쯤은 있을 테니 이 과자로 스몰톡을 시작하라고 조언해 준다. 내가 만난 대만인들은 하나같이 다 친절하고 귀엽다.


이름을 몰라도 "Yellow and blue one"이라고 하면 모든 대만인들이 알아듣더라. 요긴하게 사용했다. 


저녁 일곱 시쯤 되자 주변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류블랴나로 돌아가는 버스에 늦지 않게 탑승했다. 피곤한 탓인지 둘 모두 아무 말 없이 각자의 사색에 잠기며 돌아갔다. 

작가의 이전글 류블랴나에 온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