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장지위스의 그림책 <소쉬르, 몽블랑에 오르다>를 보고
나는 이 그림책을 보다가 그만 딴 길로 새 버렸다. 몽블랑을 오르는 사람들을 보는가 했는데 어느새 우리나라 산수를 구경하는 깨알같이 작은 사람들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는 새로운 시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가만히 앉아서는 발견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무지를 인정하지 않으면 시작되지 않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일단 방문을 열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야 얻어지는 것이었다.
<소쉬르, 몽블랑에 오르다>에는 산수와 그곳을 등반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마치 우리의 산수화, 특히 진경산수화에 나온 사람들과 같은 이들을 풍경 속에서 발견한다고나 할까? 알프스에서 제일 높은 산, 몽블랑에 오른 사람들의 이야기이니까 말이다.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알게 되지만 꼭 사람들만이 아닐 수도 있다.
이 그림책에서 살펴본 사람들의 모습은 이렇다. 이들은 줄지어 간다. 경사진 곳을 오르기도 하고 빙하를 앞두고는 크게 쉬어가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그림도구로 풍경을 그린다. 18세기 복장이나 헤어스타일을 확인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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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진경산수화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금강산을 유람하기 위해 산을 오르며 쉬기도 한다. 임진강으로 뱃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강가에서 기다리기도 한다. 일단 몽블랑에 올랐던 사람들도, 우리 옛 그림에 나온 산수에 머물렀던 사람들도 모두 대자연 앞에서는 귀엽게 그려졌다는 것이다. 산에 오른 목적은 제각기 다르지만 이렇게 드넓은 풍광이 펼쳐진 곳에선 다들 사람들이 당연하게도 매우 작고 귀여워지는 것 같다.
이들은 왜 산에 올랐을까?
소쉬르는 왜 산에 올랐을까?
소쉬르는 실존인물로 오라스 드 베네딕트 소쉬르(1740-1799)이다. 17세기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산을 오른다고 하는 것은 수렵이나 채취 혹은 종교적인 이유나 군사적, 학문적인 목적이 컸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현생을 위한 뚜렷한 목적이 있어야 그 위험을 무릅썼던 것이다. 그리고 18세기의 알프스 같은 높고 험한 산에는 악마와 용이 산다고 믿었다고 한다. 눈에 덮인 험한 산이니 오르다 죽은 사람도, 눈사태에 행방불명된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 사람들의 무지와 두려움이 만들어낸 미신으로서의 악마와 용이었을 거다. 그저 순수하게 산이 거기 있으니 올랐다는 마음을 쉽게 품게 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소쉬르는 과학자였고 첫 등반은 학문적인 호기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알프스의 프레방 정상에 오른 소쉬르는 바로 눈앞의 우뚝 솟은 몽블랑을 보게 된다. 소쉬르는 처음에 몽블랑 정상에 오르는 사람에게 상금을 준다고 했다. 15년 뒤에야 수정을 채취하는 이들이 몽블랑 등반에 성공하였고, 결국 소쉬르 역시 그다음 해에 몽블랑을 오르게 된다. 그 이후 알프스에 푹 빠진 소쉬르는 <알프스 여행기>를 내며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의 산'인 알프스를 소개하게 된다. 과학자가 아닌 등반가로서 세계 산악인 명단에 이름을 등록하며. 지금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산이 거기 있으니 오른다'는 말은 소쉬르 이후에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한 인간의 호기심으로 시작한 알프스 등반은 우리의 무지몽매를 깨워주는 발걸음이 되었다. 그 걸음은 마침내 산 정상까지 도달하게 한다. 비록 눈과 바위를 볼 수 밖에 없었지만.
실제로 숨도 쉴 수 없는 그곳까지 가자 눈 덮인 둥근 지붕 같은 산꼭대기에 도착해 그들이 넋을 잃고 본 것은, 다름아닌 밤하늘이었다. 나는 비록 그림책 한쪽의 이미지이긴 했지만 그 단순한 밤하늘을 보니 설레었다. 18세기의 그들이 본 알프스 정상에서의 차가운 공기, 발이 얼고 그 고생을 하고 가서 보게 된 밤하늘의 기운이 나에게도 전해졌다. 우주의 한 모퉁이를 보고 온 느낌이 아니었을까? 알프스라는 거대한 무지의 산을 올라 꼭대기에서 인간의 이성이 다다른 곳은 용이 살지도 않고 악마도 없는 다름 아닌 청명하고 아름다운 밤하늘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진경산수화에 나온 사람들은 왜 산에 올랐을까?
이들은 모두 화가나 문인들이었다. '슬기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공자의 말처럼, 우리나라 역시 인간이 추구해야 할 덕목으로 산수와 연결하여 이야기하곤 했다. 아름다운 산수를 보면서 맑은 성정을 길러야 했기에 산수화의 개념은 일찌기 발달하였다. 그러나 그 산수화는 어디까지나 이상적인 산수화였다. 직접 가서 본 것이 아닌 관념 속에서의 그림이었다. 진경산수화가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화가나 문인들은 정신수양의 방법으로 풍경을 굳이 보지 않고도 방에서 산수를 그렸다. 그러나 17세기에 왜란과 호란을 겪게 된 지식인들은 성리학의 발달과 함께 우리 땅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재발견하게 된다. 관념 속의 산수가 아닌 실재하는 우리 산수를 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고려시대도 실경산수화의 전통은 있었으나 그 제작이 활발했던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였다. 또한 실경을 직접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돌아와 초본(현장에서 그린 그림)과 기억을 재구성하는 방법은 조선시대에 와서 자리 잡게 된다. 그렇게 경치를 재해석하여 오히려 실제 모습에서 자유로워지는 독창적인 화법이 바로 진경산수인 것이다. 그러니 진경산수화의 사람들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을 새롭게 관찰하려 하고 새롭게 느끼려 했던 그들의 감성도 함께 느껴진다. 그리고 그 감성은 소쉬르처럼 직접 '산을 오르기' 위해 발걸음을 떼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화가들은 화폭 위에 여러 실험을 하게 된다.
같은 시대인 18세기 강세황(1713-1791) 역시 금강산을 비롯한 명승지를 여러 차례 유람하였다. 그중 송도를 여행한 뒤 <송도기행첩>을 내게 되는데 대표작 <영통동구>에서는 관찰한 풍경에 그 당시 들어온 서양의 명암법을 응용하여 집채만 한 바위를 표현하게 된다. 이렇게 실제 그대로를 표현하기 위한 고민하고 새로운 기법도 적용해 보는 시도는 당시에 습관적으로 그리던 문인화풍과 달리 새로운 실험이었다. 이런 고민이 묻어있는 그림을 어찌 새롭다 아니할 수 있을까? 그림 속의 말을 타고 가는 사람에 마음을 실린다.
정선의 <우화등선> 역시 18세기에 그려진 진경산수화다. 정선과 동행한 일행이 임진강에서 뱃놀이를 하는 모습으로 우화정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는 모습과 도착하여 닻을 내리는 모습이 한 화면에 펼쳐진다. 겸재 정선은 현장에서의 사생을 중요시했지만 곧바로 닮게만 그리지는 않았다. 기억 속에 담아와 다시 새롭게 재구성하여 그림과 실제 경관이 차이가 있을지라도 생생한 기록에 그 의미를 뒀다. 이는 '의취를 살리며 외형 닮기에 소홀히 했다'(이하곤1677-1724)는 지적을 받기도 하지만 우리 실경을 소홀히 다루지 않고 산수의 느낌을 그대로 전하려 했다는 시도에서 그 의미가 크다. 역시 '실제로 가봐야' 그곳의 생생함을 어떻게라도 전달하게 되니 말이다.
정선의 <백천교>, <단발령망금강산>은 금강산과 그 일대를 직접 유람한 난 뒤 화첩으로 제작한 <신묘년풍악도첩>에 나오는 그림이다. 이 작품들에서도 정선은 오히려 현장을 사생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기억에 의존하여 독창적인 화풍을 완성하게 된다. 직접 가 본 사람의 눈에 보인 풍광이 화면안에서 조화롭고 생생하게 그려질 때 오히려 사진처럼 묘사된 그림보다 더 깊이 풍경을 이해하게 되기도 한다. 이는 실제로 관찰한 산수의 개성적인 모습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이렇게 새로운 산수화의 방법을 모색한 것이 바로 진경산수이며 이 또한 '직접 가서' 느껴 봐야 시도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래서인지 산수에 나온 이들은 모두 그 느낌이 생생하다. 힘든 사람은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고 바위 절벽에서 절경을 보는 이들은 따로 있다.
진경산수의 미덕은 그 당시 관념산수의 전통에만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시각을 탐색했다는 것에 있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든 서양이든 새로운 흐름으로 기존의 것을 새롭게 보려는 시도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 시도의 한 자락에 '산을 오르는' 이들이 있었으니 소쉬르와 조선의 진경산수를 그리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소쉬르의 발걸음이 산의 정상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 장면은 눈앞에 운무가 펼쳐지며 다른 공간의 느낌을 선사한다. 두 그림의 맥락과 느낌은 다르나 비슷한 구도를 지니고 있어 둘을 함께 모았다.
오른쪽은 김윤겸의 지리산 전경을 그린 <지리전면도>에 나온 <극락암>이다. 왼쪽 소쉬르의 그림도 한쪽으로 산과 소쉬르가 몰려 있고, 김윤겸의 그림에서도 큰 바위 위에 암자가 한쪽으로 몰려 있다. 때문에 둘 다 화면 오른쪽 풍경에서 시야가 트이며 김윤겸의 <극락암>은 하늘까지 닿은 여백으로 시선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소쉬르의 이 장면은 '어이!!'하고 소쉬르가 운무에 가득 찬 눈앞의 풍경에 소리치는 장면이다. 나는 이 장면에서 소쉬르가 소리친 대상은 그동안 안갯속에 싸여 우리가 몰랐던 그 어떤 대상이 아니었을까 싶어 뭉클했다. 항상 첫걸음을 떼는 사람들은 앞에 닥쳐올 것들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힘을 내어 한 발짝 내딛는다. 아마 소쉬르도 힘들고 지치고 무엇보다 눈앞의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이 그를 곤란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미지, 무지를 향해 한 발자국 간다는 것, 그 과정에서 아름다운 알프스를 볼 수 있다는 것이 가슴 뛰게 했을 것 같다. 결국 그는 정상에 오른다. 그 풍경은 온갖 시끄러운 무지의 아우성을 잠재워주는 것이었다.
우리도 이처럼 밤하늘을 조우하자. 조선시대 진경산수를 그리러 직접 떠났고 돌아와 화폭 안에 자기만의 우주를 구성한 화가들처럼, 운무 가득했던 무지의 세계를 열고 들어가 자연의 모습 그대로를 볼 수 있게 길을 떠난 소쉬르처럼.
참고문헌과 참고사이트
1.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 국립중앙박물관 2019 전시도록
2. 심산스쿨의 심산님의 글 <과학적 근대 등반의 아버지 오라스 드 베네딕트 소쉬르>
http://www.simsanschool.com/board_mqza83/656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