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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누를 살찌게 하는 법

영화 <중경삼림>에서

by 시sy

영화 <중경삼림>을 봤다고?

좋은 영화니까 지금 봐도 괜찮겠네. 어땠어? 다 좋았다는 말만 하지 말고, 제일 마음에 들었던 장면을 말해봐.

하긴, 다 제각각 일 테니 내 느낌과 같을 수는 없겠지. 당연해.

워낙 오래돼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난 그 장면이 좋았어. 그 왕페이가 양조위 방에 몰래 들어가서 제 맘대로 청소하는 장면 말이야. 자기 집처럼 아무렇게나 물건 배치를 바꾸고, 커튼도 바꾸고, 금붕어 어항도 손질하고, 별 난리를 치잖아. 그런데 방에 돌아온 양조위는 전혀 눈치를 못 채.

자기는 매일 정해진 일상의 루틴을 반복하면서, 조금도 변하지 않으면서, 방의 물건들이 변하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거야. 그중에 압권은 이거야. 비누한테 말을 걸지.

"야, 너 좀 야위었다."

왕페이가 비누 청소를 많이 해서 닳은 것인데. 그것도 모자라 이렇게 덧붙이지.

"걱정 마. 내가 다시 살찌워 줄게."

좀 어이없지? 기억 안 나? 영화를 좀 뜯어봐야지. 알았어. 다시 보면 되지. 그런데 말이 되냐? 비누를 어떻게 살찌게 하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모르겠지? 나도 몰라.

그런데도 난 마음에 꼭 들었어. 처음 볼 때는 정말 몰랐는데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추천하더라고. 그래서 흘려 보다가 그 장면만 다시 유심히 봤지. 왜 내 마음에 들었을까 생각하면서.

그런데 왕페이가 영화에서 직접 부른 '몽중인'이라는 노래를 들으니 번쩍 생각나는 거 있지?

사실 비누가 여위는 것은 당연해. 난 내 삶을 소진하고 있으니 가만히 둬도 속도는 늦출 수 있겠지만 여윌 수밖에 없지. 물만 마셔도 살찐다고?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더구나 양조위는 여자친구와 헤어졌어. 그 상실감으로 존재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았을 거야. 유일하게 자신을 지구상에 붙들어 주던 존재가 떠났으니 점점 가벼워지다가 공중으로 떠버리는 게 아닐까 불안한 거지. 그래서 무심코 말하는 거야. 다시 살찌게 해 주겠다고. 그건 말이야. 스스로의 다짐이 외면화 된 거야. 내가 어떻게든 살아가 보겠다고. 땅에서 떨어지지 않게 몸부림치면서. 존재의 무게를 더해 보겠다고.

안타까운 장면이야. 공감도 되고. 나야말로 시계처럼 매일 똑같이 살잖아.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다 비슷해. 그냥 반복적으로 습관처럼 살지. 그러면서 주변의 변화를 주시해. 나는 변하지 않으니 세상이 변하길 바라는 거지.

최근에 혼잣말이 늘었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넋두리 같은 거. 남에게 말하면 약해 보일까 싫어서 감춰둔 속마음 같은 거 있잖아. 그런 걸 혼자 말하는 거지. 그냥 삼켜도 되지만 왠지 흘러나오는 거야. 자꾸 이러다 보면 아무거에나 말을 걸게 돼. 나도 비누한테 말 거는 건 시간문제라고 봐야지.

에이, 말이 길었네. 길게 말하면 꼭 쓸데없는 말을 하게 돼. 가뜩이나 우울한 시절인데.

그냥 잘 살아. 오늘도 힘내고. 뻔한 응원이고 영혼도 담겨 있지 않지만, 그래도 이 말밖에 없더라.

힘내! 잘 살고. 좋은 날 오겠지. 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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