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내 안에 있던 것들
IFS(Internal Family Systems, 내면가족체계) 이론을 바탕으로 한 Einat A. Bronstein의 내면 구조도를 참고해 상담을 진행한 날이 있었다. 우선 내 안에 있는 마음들을 검열 없이 종이 위에 쏟아냈다. 그리고 그것들을 위의 그림처럼 네 가지 영역—관리자, 소방대원, 유배자(추방자), 그리고 Self(참자아)—으로 분류해 보았다.
상처받은 마음인 '유배자'와 그를 통제하려는 '관리자', '소방대원'의 영역이 클수록, 'Self'는 가려지고 면적이 줄어든다. 내 안의 유배자가 비대해지면 이를 통제하기 위해 관리자가 강하게 전면에 나선다. 하지만 억압할 감정들이 너무 많으면 관리자는 결국 지치고, 그 때부터 소방대원이 활성화되어 충동적이거나 건강하지 않은 방식으로 감정을 막으려 한다. 우리가 겉으로 보는 문제행동은 사실 오랜 시간 쌓인 유배자 부분을 관리자가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해 생긴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심리 치료를 할 때는 문제 행동 그 자체, 즉 표면만 다루지 말고, 긴 시간에 걸친 이면의 과정들을 이해해야 한다.
반대로 상처가 치유되어 유배자 영역이 줄어들면, 관리자와 소방대원도 굳이 애써 출동할 일이 없어진다. 자연스럽게 가려져 있던 Self의 영역이 넓어진다.
놀라운 건 이 Self가 품고 있는 8가지 속성, 8C였다. 호기심(Curiosity), 평온함(Calm), 자신감(Confidence), 유대감(Connectedness), 명료성(Clarity), 창조성(Creativity), 용기(Courage), 연민(Compassion).
나는 그동안 이 8C가 내가 뼈를 깎는 노력으로 포장하고 만들어내야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무가치함, 수치심, 절망, 공포, 무기력 같은 유배자의 감정들을 'Self'라고 착각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이미 내가 가진 Self가 잘 발현되게 하기 위해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데 집중해야 하는데, Self라고 믿었던 그 부정적인 감정들을 억압하고 겉으로 8C를 흉내내느라 그토록 에너지를 소진했던 것이다. 전제부터 잘못되어 있었으니, 아무리 애를 써도 마음이 건강해지기 어려울 수밖에 없는 구조로 살고 있었다.
선생님은 내게 Self가 몸 어디에 위치해 있는 것 같은지 물으셨다. 사람마다 Self가 있다고 체감하는 감각적 위치가 다르다고 하셨는데, 나는 주저 없이 이마 앞부분을 가리켰다. 그러자 선생님은, 나의 Self가 머리에 있으니 앞으로는 고개를 숙이지 말고 당당히 들고 다니라고, 자세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Self가 발현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 날 이후로 생각날 때마다 굽었던 등과 어깨를 펴고 고개를 당당히 드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정말 그럴 때마다 8C가 좀 더 발현되는 느낌이 든다.
유배자 부분은 자기를 알아봐 달라고 아우성치는 속성이 있어서, 억누를수록 엉뚱한 곳에서 사고를 친다고 한다. 그래서 상담실이라는 안전한 기지에서 꺼내보고, 알아봐주고, 다뤄주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지하 감옥에 갇혀 호시탐탐 나를 끌어내리는 유배자의 구멍을 메우고, 내 안의 가려진 Self 영역이 점점 넓어지도록 하는 것, 그것이 앞으로 진행될 상담의 목표다.
집에 돌아오니 아이가 학교에서 만든 '내 마음의 색깔'이라는 작품을 보여주었다. 색깔 찰흙으로 만든 알록달록한 마음들이었다. 아이는 이미 자기 안에 다양한 마음들이 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 중 대부분이 행복하게 웃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이의 Self 영역이 얼마나 넓게 퍼져있는지 확인한 순간이었다.
아이가 자라면서 심술궂고, 슬프고, 미운 복잡한 마음들도 만나게 되겠지만, 그 모든 감정들 속에서도 Self가 가장 큰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엄마로 바로 서고 싶다. 그러기 위해 구름을 걷어내고, 항상 그 자리에 있던 Self가 빛날 수 있도록 내 마음을 회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