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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룽지 Apr 28. 2023

나는 지옥에 산다

'퀸메이커'에 우리 동네가 나왔다

<비혼주의 동거커플, 동거집>


나와 동거인 가또는 넷플릭스 아이디를 공유하는 사이다. 가또는 완결까지 올라온 작품을 한 번에 정주행 하는 걸 좋아하고 나는 약 3달 동안 방영되는 작품을 보며 긴 호흡으로 작품에 빠져있는 걸 좋아한다. 거기다 좋아하는 장르도 달라 우리가 한 작품을 동시에 보는 건 사실 흔치 않은 일인데 최근 한 작품을 함께 정주행 하게 됐다. 바로 <퀸메이커>.


재벌가의 사건사고를 뒷수습해 주며 전략기획실 실장자리까지 올라간 황도희(김희애 분)가 어떠한 사건으로 해고를 당한 후 노동 운동과 여성 운동의 선봉에 선 오경숙(문소리 분)을 서울 시장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 <퀸메이커>가 묘사하는 정치는 현실성이 부족했고 다소 설명적인 연출 방식이 딱히 우리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대화 거리가 없는 4년 차 동거 커플의 식사 시간에 떠들(욕하)면서 보기에는 딱 좋은 드라마였다. 


그중 우리를 가장 분노케 한 건 은성 그룹 회장 손영심(서이숙 분)의 한 마디였다. 


은성 그룹에서 해고당하며 회사가 준 집에서도 나가야 했던 김희애가 이사를 선택한 집은 허름한 건물의 옥탑방이다. 십수 년을 대기업, 그것도 오너 일가와 긴밀하게 교류하던 기획 실장이 제대로 살 집을 얻을 만큼의 재력도 없다는 것에 현실성이 떨어졌음은 물론 만약 그것이 바닥부터 시작하겠다는 그의 의지라면 촌스러운 설정이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분노했던 건 이런 이유가 아니었다. 김희애가 이사 간 허름한 건물은 바로 우리가 사는 골목의 끝에 있는 건물이기 때문이다. 그 건물의 옥상에서는 서울 전망이 내려다 보이기 때문에 종종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로 쓰였다. 그곳에 사는 인물들은 대부분 돈이 없는 젊은 세대였다. 현실에는 없는 포장마차가 K-드라마에서는 직장인의 단골 술집이듯 옥탑방도 돈이 없는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한 현실성 없는 장치라고 여겼기에 퇴근길 골목에 방송 스텝들이 즐비한 날이면 ‘또 옥탑방 설정인가 보네’하며 내 갈 길을 갈 뿐이었다. 


이번엔 달랐다. 황도희가 살게 된 허름한 옥탑방의 내부는 드라마에 노출된 적이 없다. 그저 옥탑방에 산다는 설정과 그 집으로 가기 위해 험한 오르막길을 하이힐을 신고서 힘겹게 올라가는 모습이 나왔다. 그 골목의 다른 쪽 끝엔 우리 집이 있기 때문에 김희애가 올라간 골목은 내가 매일 오르내리는 골목이기도 하다. 초행인 사람들은 놀라지만 남산 일대에는 이 정도의 오르막은 흔하기 때문에 대리석 깔린 빌딩을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걸어 다니던 황도희의 추락 정도를 표현하고 싶었나 보다 싶었다. 졸지에 추락의 상징이 되어버린 내 집 앞 골목에 서글프긴 했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오르막과 함께 드라마에서는 옥탑방에서 보이는 동네의 전경이 상징적으로 노출됐다. 은성그룹 회장 손영심은 그곳에 서서 황도희에게 이곳을 ‘지옥’이라 칭했다. 내가 사랑하는 내 동네는 누군가에게는 잘못을 저질러 죗값을 받기 위해 죄인이 떨어진 형벌의 장소가 됐다. 내가 매일 느끼는 해방촌과 후암동의 따뜻함과 달리 세상은 이 동네를 가난의 상징 혹은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사는 곳 정도로만 생각한다는 게 화가 났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2년마다 월세방을 전전했던 20대 시절, 나는 옥탑방으로 시작해 다세대 주택과 방 3개짜리 빌라를 거쳐 오피스텔 그리고 3평짜리 원룸에서도 살았다. 지금의 집으로 오기 바로 전에 살던 집은 반지하였다. 내게는 일종의 주거 실험과도 같았다. 가장 살기 힘들었던 건 원룸이었다. 고시원보다 조금 컸던 방의 크기 때문에 답답한 건 둘째치고 세탁기가 바로 옆에서 돌아가는 소리를 견디기가 힘들었다. 반지하였지만 볕이 잘 들었던 마지막 집은 방 2개에 주방 겸 거실이 있는 집이었지만 거실의 크기가 작아 거의 주방으로만 사용했다. 그래서 밥도 방에서 먹고, 과제도 방에서 하고, 잠도 방에서 자서 원룸에서의 생활방식과 딱히 다르다고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삶의 방식이 내게는 삶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월세 13만 원이란 금액은 지갑을 온전하게 해 주었기에 삶의 완전성 같은 건 사치와도 같은 시절이었다.)


20대 내내 밥을 책상에서 먹던 내게 ‘사람답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밥을 식탁에서 먹는 것과도 같았다. 잠은 침실에서 자고 세탁기는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그런 의미다. 지금 사는 해방촌의 집이 마음에 들었던 건 주방 겸 거실 공간의 크기다. 이 정도 크기면 거실에 식탁을 두고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50만 원이라는 당시 적지 않은 월세에도 이곳으로 이사 왔던 건 이 정도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사회인이 되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뜻한 바와 달리 거실에 식탁을 뒀음에도 혼자 먹는 밥은 팍팍해 TV가 있는 침실에서 밥을 먹기 일쑤였지만 지독한 고용불안 속에서도 월세를 밀리지 않고 6년째 살고 있을 때였다. 가또가 우리 집으로 왔다. 


가또는 청주의 원룸에서 살았다. 번화가 사이에 있었던 원룸은 매일 시끄러운 소음이 침입하고 주변 골목은 더러웠다고 한다. 가파른 오르막길로 인해 오토바이는 물론 통행하는 이들도 드문 덕에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낮이든 밤이든 고요하다. 건넛집의 은행나무와 감나무에서 노는 새들의 소리만이 정적을 깬다. 


가또와 함께 살기 시작한 후로 식탁은 본연의 역할을 찾았다. 우리는 거실의 식탁에서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맛있는 것에 집착하는 가또 덕에 매일 메뉴는 새로웠고 함께 먹는 술도 맛있었다. 죽어있던 집안 곳곳이 제 역할을 찾으며 살아 숨쉬기 시작했다. 가장 달라진 건 이 집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인 테라스였다. 


이 집은 베란다를 거쳐 나가면 화단이 있는 5평 정도의 테라스가 있는데 처음 이사 왔을 땐 화단에 모종도 심고 테라스에서 고기도 구워 먹는 상상을 했었다. 테라스에는 나가보지도 못하는 바쁜 생활 속에서 방치됐던 테라스는 가또가 온 후 평상을 들이고 캠핑의자를 두고서는 서서히 제 역할을 찾았다. 몇 년 전부터는 각종 모종을 심어 보고 있는데 점차 그 규모가 커져서 올해는 애플 수박을 심고 납작 복숭아 묘목을 심기도 했다. 높은 지대에 있는 집임에도 창이 서쪽으로 나있어 빛이 좀체 들어오지 않는 집이지만 날마다 모종이 얼마만큼 자랐는지 확인하려고 날마다 테라스를 나가는 덕에 충분히 햇빛을 받고 있다.  


산책은 우리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집에서 조금만 걸으면 서쪽으로는 남산 도서관이, 동쪽으로는 남산 공원이 있어 그날그날 마음이 가는 대로 발길을 옮긴다. 이태원에서부터 한남동, 해방촌, 후암동으로 이어지는 남산 일대는 이 작은 지역구 안에 어쩜 이렇게 각양각색의 사람이 사나 싶을 정도로 다채롭다. 이 안에는 부자가 모여 사는 동네도 있고, 외국인이 모여사는 동네도 있고, 힙스터가 사는 동네도 있으며 실향민이 모여 사는 동네도 있다. 아, 용산구는 전국에서 반려견이 살기 가장 좋은 동네이기도 하다. 아아, 농구 명문 용산고가 있기도 하다.


아무튼 산책을 하다 보면 조깅을 하는 외국인, 경보를 하는 어르신, 강아지와 산책하는 동물 가족을 만나게 되는 데 그러다 보면 가또와 나,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우리도 그저 세상의 다양한 구성원 중 한 명이라는 감각이 든다. 당연한 듯 존재하지만 어느 순간 세상에 밀려있는 우리가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는 곳이다. 그리하여 부자와 빈한 자를 나누기 위한 도구로 소모되는 것을 그저 지켜보기에는 이곳에 애정이 많다. 그러니 타인의 삶의 터를 함부로 재단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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