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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룽지 May 23. 2023

우리집 욕실이 뉴스에 나왔다

그저 주황색 줄눈 시공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시작은 아르네 야콥센의 수전이었다. 덴마크 브랜드 VOLA의 제품으로 명망 높은 건축 디자이너 아르네 야콥센이 디자인한, 배관이 벽 속에 매입된 형태로 발표 당시에는 기술적으로나 디자인적으로나 센세이셔널했을 그 수전. 이런 대단한 제품에 붙는 가격엔 브랜드의 헤리티지도 포함되기에 이제는 모든 배관이 매입되어 있는 시대임에도, 형태적으로 더 이상 다른 브랜드와 별반 차이가 없음에도 이 수전의 가격은 1백만 원을 호가했다. 


 

가또와 나는 이 수전을 어느 디자이너 부부의 룸투어 영상에서 발견했다. 형태적으로 다른 수전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했나? 그러나 이 수전이 뿜어내는 오렌지빛은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 우리는 동시에 그 오렌지 수전에 마음을 빼앗겨버린 것이다.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장바구니의 모든 물건을 사지 않는 건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서민의 마음가짐이다. 수전의 가격을 확인한 우리는 좋아하기만 하기로 했다. 내겐 샤넬도 그렇고 에르메스도 그렇다. 좋아하지만 굳이 갖지 않는다. 빼앗겨버린 마음의 자리만큼 약간 허전하게 지낼 뿐이다. 그러니까 마음이 문제다. 


 

올 초 나와 가또는 욕실 셀프 인테리어를 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우리의 욕실로 말할 것 같으면 바닥은 짝이 맞지도 않는 타일이 마구잡이로 덧대어져 있고 문가에는 5cm에 가까운 실리콘이 덕지덕지 발라져 있었으며 거무튀튀한 플라스틱 선반에 실리콘도 발리지 않은 채 그저 얹어져 있던 세면대는 물이 빠져나오는 배관이 채 바닥에 묻히지 못한 채 욕실 바닥에 올려져 있었다. 그 배관이 세탁기용 호스였는 건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세면대 물을 쓸 때면 바닥으로 쏟아지는 물 때문에 양말이 젖고는 했다. 원래 이랬던 건 아니다.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오니 이런 욕실이 되어 있었다. 그날 오전, 집주인이 물이 새는 곳을 찾는다며 내가 없는 집에 들어갈 거라고 하더니 바닥을 깨부수고는 타일이며 실리콘이며 되는 대로 셀프 시공을 해놓은 것이다. 이사 온 후 이런저런 인테리어를 하며 답을 찾아가고 있던 욕실이 확실한 노답 욕실이 된 거다. 


그 욕실로 9년. 이대로 이사를 가도 상관없을 일이다. 그런데 자꾸 욕실이 눈이 밟혔다. 시간이 지나 이 집에 살았던 걸 생각하면 찜찜한 욕실이 가장 먼저 기억날 것 같았다. 좋았던 기억도 퇴색해 버릴 것 같은 느낌. ‘내가 그러게 형편없이 살았었지’라는 생각. 


방치했던 스스로를 가꾼다는 마음으로 욕실 셀프 인테리어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 우리는 움직였다. 적절한 예산을 정해서 나는 타일을 고르고 가또는 세면대를 골랐다. 민무늬의 회색 타일보다는 가격대가 높았지만 요즘 유행하는 테라조 타일이 예뻤다. 요즘은 다들 큰 타일을 붙이는 추세라는데 셀프 시공을 할 우리가 커다란 타일을 다루기는 무리였다. 200X200 사이즈의 파란빛(노란빛은 품절이었다)이 도는 테라조 타일을 붙이기로 했다. 세면대는 타일보다 디자인에 더 힘을 주는 제품이어서 그런지 고르기가 더 까다로웠다. 온갖 디자인의 세면대를 다 둘러본 후에 결국 우리가 장바구니에 넣은 건 가장 저렴한 기본 디자인의 세면대였다. 세상에 예쁜 세면대는 많지만 월세집에 인테리어에는 투자할 수 있는 적정 선이 존재했다. 가장 저렴한 것을 사야 하는 게 조금은 서러워 아주 조금 돈을 덧붙여 원형이 아닌 사각 형태의 제품을 골랐다.     


 

문제는 인테리어 아이디어가 있을까 싶어 핀터레스트에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모여있는 곳, 핀터레스트. 그곳에는 온갖 컬러의 욕실 인테리어가 있었고, 이미 야콥센의 오렌지 수전에 마음을 빼앗겼던 우리는 흰색 타일에 주황색 줄눈이 들어간 욕실 인테리어에까지 마음을 홀딱 빼앗겨버렸다. 아마 정해진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핀터레스트에 들어갔던 건 새로 사고 싶은 거울이 20만 원이 넘는, 유려한 라인을 그리는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누추한 우리 욕실에는 과분하다는 생각에 손쉽게 적용할 수 있는 거울 DIY 아이디어가 있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그러나 주황색 줄눈도 과분하기는 마찬가지. 하아. 그런데 어쩌지 이미 머릿속엔 주황색 줄눈 생각뿐인 걸.


 

그때부터 우리의 목적은 주황색 줄눈이 됐다. 요즘은 주황색 제품을 오렌지라고 하지도 않더라. 오렌지보다는 당근이 더 귀엽게 느껴지나? 캐롯 컬러라고도 불리는 이 컬러. 우리는 욕실의 모든 것을 주황으로 물들일 생각으로 가득 찼다. 걱정이 없었던 건 아니다. 막 이사 온 후 했던 페인트 시공이 실패해 아직 타일에는 덕지덕지 흰색 페인트가 붙어 있었고 이걸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 이상 주황색 시멘트가 페인트에 착색될 것은 뻔했다. 시공 전 타일에 붙어있는 페인트를 최대한 벗겨내고 시공 후에 못한 부분은 더 벗기자. 가볍게 결론을 냈다. 이전부터 조금씩 벗겨내고 있던 페인트였지만 40년 전 감성의 소나무가 군데군데 새겨진 이 누런 색의 타일엔 물결무늬 같은 요철이 있었다. 그러니까 스크래퍼로 긁어도 물결 사이사이의 페인트는 벗겨지지 않고 남아있다는 말이다. 뭐 어쩔 수 있나 물결 하나하나 꼼꼼히 수세미를 사용해 닦아낼 수밖에.


 

타일 위의 페인트는 비교적 쉽게 벗겨졌지만 줄눈에 붙은 페인트는 옴짝달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구매한 타일과 세면대가 배송완료 상태로 집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지도 3주가 되어갔다. 시멘트를 벗기겠다고 더 이상 시간을 쓸 수 없었다. 우리는 일단 시공을 시작했다. 
 

문제는 또 있었다. 아무리 완성도 있게 시공을 한다고 해도 주황색 줄눈은 한국인들이 봤을 때 거부감이 생길 게 뻔했다. 우리는 예쁘다고 생각한 주황색을 집주인도 예쁘다고 생각할까? 다행히 이 집은 처음 계약할 때 집주인과 시공에 대한 협의를 했었고 덕분에 우리는 주방 타일이나 선반 등을 우리의 기호에 맞게 시공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욕실의 주황색 줄눈에는 우려의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그러나 어차피 지금의 욕실이나 주황색 줄눈의 욕실이나 최악인 건 다름없었다. 다만 각자의 최악이 있을 뿐. 우리는 우리의 최악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의 예산에는 혹시 지불하게 될 원상복구비까지 예비비로 추가됐다. 이사를 할 때는 목돈이 들게 마련이고 거기에 예비비를 슬쩍 끼운 들 심리적으로 크게 티가 나지 않을 거라는 계산도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욕실 셀프 인테리어 시공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바닥 타일 덧방부터 문제였다. 타일은 붙인 후 24시간 동안 굳혀야 하는데 그 시간 동안 욕실을 못쓴다는 거다. 마르기 전 밟게 되면 무게로 인해 수평이 틀어지게 되는 참사가 생긴다. 욕실은 중심부의 하수구로 물이 흘러가야 하기 때문에 특히 바닥 수평이 중요하다. 


변기로 가는 길을 사이로 이쪽과 저쪽에 한 번, 그라인더로 타일을 재단해야 하는 가장 모서리에 한 번 총 세 번에 걸쳐 바닥 타일을 붙였다. 바닥 타일 붙이는 데만 2주가 흘렀지만 사실 문제는 바닥보다는 벽이었다. 원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보다 유에서 다른 유를 만드는 게 더 어렵다고 하지 않나. 기존의 타일을 다 덮어버린 바닥은 깔끔해졌지만 줄눈만 덧바르기로 한 벽타일은 뭘 어떻게 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기다 체력도 문제였다. 바닥 타일 시공을 마치고 생각보다 힘에 부친 가또는 벽은 그대로 두자고 테세전환을 시전 했지만 나는 일단 시작한 건 마무리를 해야 했다. 


 

‘닦아낼 때 힘드니까 가급적 줄눈에만 시멘트를 묻히고 타일에는 최대한 안 묻히는 게 좋아’라고, 말한 사람이 나였나?


 

나는 벽 줄눈을 시작한 지 10분도 되지 않아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벽에 마구 시멘트를 비벼댔다. 지금까지 거쳐온 과정이 너무 지난했고, 타일은 밑바탕일 뿐 이 위에 설치해야 할 세면대며 선반들을 생각하면 앞이 까마득했다. 뭐 닦으면 닦이기야 하겠지란 마음으로 일단 이 과정을 마치기로 했다. 그렇게 벽 줄눈을 전부 바르고? 욕실에서 나오려는데 그 모양새가 내가 봐도 너무 기가 찼다. 온 타일에 붙어있는 주황색 시멘트가 흡사 스릴러 영화의 살인 현장처럼 보이기도 했다. 기록용으로 사진을 찍고 막 시작해 재미를 느끼던 트위터에 사진을 올렸다. 


재미로 올렸던 사진이 바이럴 돼서 하루아침에 일약 스타가 되었다는 사례는 인플루언서 강의에서나 나오는 건 줄 알았다. 다음 날 일어나 보니 스마트폰에는 무수히 많은 알람이 쌓여 있고 그걸 확인하는 와중에도 계속 진동이 울려댔다. 하루아침에 일약스타가 된 것이다. 우리 집 욕실이.


 

하루종일 알람이 울리더니 결국 욕실 사진의 조회수는 200만이 넘었고 바이럴이 되면서 인스타그램이고 커뮤니티도 퍼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오후에는 인스타그램으로 메시지가 하나 왔다. 우리 집 욕실 사진을 써도 되는지 묻는 공중파 방송국의 아침 뉴스 담당자의 메시지였다. 그렇게 우리 욕실은 공중파 뉴스에까지 나오는 기염을 토했다. 이때인가 싶어 급하게 편집해 올린 유튜브 영상도 높은 조회수를 기록해 유튜브를 시작하고 줄곧 수익이 없던 우리 채널은 드디어 광고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됐고 고질적인 ‘무플’난은 해갈됐다. 물론 좋은 댓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주황색 줄눈을 넣은 연유로, 월세집을 마음대로 뜯어고쳤다는 연유로, 줄눈을 벗겨내며 시멘트가 하수구로 들어갔다는 연유로 우리는 비난의 댓글을 받았다. 시공에 있어 우리의 무지함으로 인해 생긴 불상사는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지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맞다. 그리고 그렇게 하리라 명기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공간에 대한 무분별한 비난은 받아들이기가 조금 힘들었다. 


무플보다는 악플이라더니 무플과 악플엔 경중이 없었다. 악플을 마주할 때면 응원의 댓글과 늘어난 구독자 수는 머리에서 잊히며 그저 세상 사람 모두가 나를 비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행히 타인의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 가또가 그럴 때마다 중심을 잡아주어 한 고비를 넘겼다. 비난의 한 마디보다는 응원의 한 마디를 하는 게 더 어려운 것임을 알기에 응원의 댓글이 내 안에서 훨씬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다. 결혼하지 않고 사는 우리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의 응원 또한 더 소중해졌다. 사실 나는 아무도 없는 곳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감성 브이로그처럼 진실은 프레임 밖으로 밀어놓은 채 보기 좋은 것만 영상에 담아 편집해 놓고 있는 것인지도. 조금 더 우리의 진짜 속내를 보여줘야 할지도 모르겠다.우리는 함께 살지만 결혼하지 않을 것이며 아이도 낳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그 이유는 사실 대단한 이유는 아니라고. 우리는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할때 받을 다양한 연유의 비난을 받아들이기 위해 굳은 살을 만들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엊그제 칠이 벗겨진 문에 새롭게 페인트를 칠해주는 것으로 욕실 셀프 인테리어는 드디어 끝이 났다. 모든 과정이 우당탕탕이었고 남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우리에게 지금의 욕실은 그저 ‘홈 스윗 홈’이다. 욕실에 들어설 때면 환해진 바닥 타일에 기분이 좋아지고 깨끗한 세면대에서 세수를 할 때면 자꾸 한 번씩 닦아주게 된다. 아끼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지금까지는 조금 물때가 껴도 ‘아유 더러워. 이놈의 욕실’. 이런 마음이었다. 지금은 우리가 가꾼 욕실이 더러워질세라 욕실을 사용할 때마다 여기저기를 닦는다. 이 집에서 이사를 가면 아마 이 욕실이 가장 기억에 강하게 남을 것이다. 방치해 뒀던 더러운 욕실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고친 욕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색으로 꾸민 욕실. ‘떡상’이라는 영화 같은 추억을 준 욕실.


이제 더 이상 욕실 브이로그에 새로운 댓글이 달리지 않는다. 악플도, 선플도. 빠르게 잊히는 온라인 생태계에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이제 우리의 욕실은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인테리어의 완성은 사용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지금 허술해보이는 부분은 우리가 사용하며 완성해나갈 것이다.   



주황색 줄눈 시공 영상이 궁금하다면 -> 

https://www.youtube.com/watch?v=W4SQNSjr-Qg&t=1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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