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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룽지 Sep 09. 2023

T와 F의 동거

만두는 간장에 찍어먹거나 새우젓에 찍어먹거나 다 맛있다 

<비혼주의 동거커플 #17>



MBTI 검사를 한 지 2년 반이 흘렀다. 외근을 나갔다가 미팅과 미팅 사이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들어간 망원동의 한 카페에서 함께 있던 동료가 ‘젤라도 한번 해봐! 어떤 MBTI인지 궁금해!’라고 제안을 하길래 시간이나 때우자는 마음으로 해 본 거였다. 아마 본인이 추측한 내 MBTI와 실제 결과가 동일한지 궁금했지 싶다. 그때 나온 결과는 ENFP. 


전혀 동의하지는 않지만 타인이 보는 내 이미지와 꽤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반면 퇴사 후 다시 해 본 테스트에서는 INFJ가 나왔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그러니까 MBTI란 그다지 믿을 구석은 없다는 거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될 여지가 너무 많지 않나? 4가지 표본 밖에 제시하지 못하는 혈액형 놀이에 질린 인류가 발견한 16갈래의 보다 다층적인 심리 놀이일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MBTI에서 고개가 끄덕여질 만한 것이 있다. 여자와 남자, 문과와 이과, 둘째와 막내, 과정과 결과 외 다수의 부분에서 전혀 다른 면모를 가진 나와 동거인(이하 ‘가또’)이 한 집에서 큰 불화 없이 살 수 있는 이유가 MBTI 결과의 교집합인 부분 때문이지 않나 하는 의심 때문이다.   


가또는 INTP라고 한다. 내가 가진 두 개의 결과 ENFP, INFJ와 N과 P가 동일하다(상황에 따라 I도 동일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두 가지 알파벳은 상상력과 즉흥성(계획성)에 기반한다고 일컬어지는데 이 두 개의 동일한 알파벳이 다른 곳을 바라보는 우리 둘을 한 자리에 앉혀 놓는다고 짐작한다. 무슨 말인고 하면 예를 들어 이런 거다. 


나는 본질에 집착한다. 글을 쓸 때도 그렇다. 지금 이렇게 우리의 사소한 일상에 대해 쓰고 있지만 매번 글쓰기를 할 때 ‘그래서 하려는 말이 뭔데?’, ‘이게 이 문장에 꼭 필요한 단어야?’ 등의 생각에 지배당한다. 또한 문장을 풍부하게 만들어 주는 미사여구의 사용보다는 ‘A는 B이고 이를 합치면 AB가 된다’는 식의 직관적이고 사실 전달 목적의 글을 주로 쓴다. 이는 처음 글쓰기를 기자로서 배운 탓도 있을 테지만 전직 후 다니게 된 스타트업에서도 미팅을 할 때 소위 ‘밑밥’을 까는 ‘쿠션어’등이 길어지면 ‘그래서 오늘 우리가 논의해야 할 안건이 정확히 무엇인가요?’라고 말아버리는 걸 생각하면 성격이 급해서일 수도 있겠다. (협업자로서 꽤 유쾌하지 않은 사람이었을지도..)


글을 쓰지도 않고 스타트업을 다니지도 않아서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이런 예를 들어볼 수 있겠다. 내게는 소금이나 간장이나 그저 짠맛을 내는 조미료에 지나지 않았다. 군만두를 소금에 찍어먹든, 간장에 찍어먹든, 새우젓에 찍어먹든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거다. 


간장이 가진 풍미와 만두가 가장 잘 어울리니 '만두에는 간장'이라는 공식이 만들어진 것일 수 있지만 결국 만두만 먹기에 싱거워 짠맛을 더한 것이라면 짠맛이 나는 어떠한 조미료를 더해도 내게는 결국 같은 개념이라는 거다. 물론 가끔 괴식이란 소릴 들을 수도 있다. 조금 다른 맥락이긴 하나 한때 초고추장에 빠진 적이 있는데 그때는 음식 종류를 막론하고 어떤 음식이든 모두 초고추장을 뿌려먹었다. 다이어트를 심하게 할 때라 음식에 간을 일절 하지 않고 먹을 때였는데 한 번 맛본 초고추장의 달고 짜고 매운 복합적인 맛에 혀가 중독된 것이다. 그때는 초고추장을 먹기 위해 음식을 먹었다. 어떤 음식을 먹든 상관없었다. 나중에서야 초고추장의 상상이상의 칼로리를 알게 되고 기함을 토했지만. 


이런 사고방식의 좋은 점도 물론 있다. 공식을 따르지 않고 만두를 이것저것에 찍어먹다 보면 생각 외의 조합을 찾을 수 있다. 물론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군만두는 두말할 나위 없이 맛있고 바질페스토와 먹는 만두도 색다른 매력이 있다. 바질페스토와 먹겠다면 새우만두를 추천한다. 이렇게 가장 중요한 기본(짠맛)만을 지켜야 할 최소 기준으로 맞춘 후 시도해 보는 다양한 맛에서 의외의 맛의 재미를 발견할 수 있다. 


반면 가또는 나와 정반대의 지점에 있다. 다양한 맛의 재미보다 최적의 맛을 즐긴다. 간장 대신 소금을 찍어먹는 나와 달리 가또는 기존에 있는 간장에 맛을 더해 간장의 맛을 최상으로 끌어올린다. 여기에는 레몬이나 다진 양파, 후추와 약간의 설탕 등이 필요하다. 그런 가또를 설명하자면 형식이 주는 디테일을 즐긴다고 할 수 있겠다. 잠깐 우리의 일상 대화를 엿보면 이런 식이다. 


‘간장에 레몬즙 넣어야 하는데 다 떨어졌네. 빨리 가서 사 올까?’

‘레몬즙 대신에 식초를 넣으면 되잖아? 어차피 신맛이니까’

‘식초랑 레몬즙은 다르지…’

‘어째서...?’


이러한 가또의 성향은 물건에도 반영된다. 가또는 우동을 먹을 때는 꼭 전골냄비에 끓어야 하고, 삼겹살은 그리들에 구워야 하며 밥은 돌솥에 안쳐야 한다. 그렇게 해야 가장 맛있으니까. 유튜브에 넘쳐나는 ‘간편하게 요리하는 가성비 비법’은 가또에게 통하지 않는다. 정성과 시간을 들여 최고의 맛을 내는 게 가또 요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엊그제는 택배가 몇 박스나 와서 보니 채칼 세트와 밤 가위 그리고 꽃게 가위세트가 담겨 있었다. 집에 가위도 있고, 칼도 있는데 이게 왜 다 필요하지 싶으면서도 그저 ‘아 이 사람 먹고 싶은 게 생겼나 보다’ 했다.  


우리의 다른 성향은 가끔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이상적인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호텔 예약과 장식 풍선, 조명에 예쁜 케이크까지 준비한 가또(P인 만큼 이 준비도 계획에 기반한 것이 아닌 갑자기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에게 ‘오늘 같은 날 밖에 나가면 사람에 치이지 않아? 그냥 집에서 치킨에 맥주 마시는 게 더 좋지 않을까?’라고 초를 치는 것이다. 내게는 우리 둘이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낸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설레며 준비한 몇 번의 기념일이 매번 이런 식으로 좌절된 후 가또가 더 이상 기념을 챙기지 않게 됐다는 건 참 아쉽다. ‘외롭지만 혼자 있고 싶은’, '이벤트는 싫지만 안 챙겨주면 서운한' 그런 아이러니한 마음일 수도 있겠다.   


이렇게 우리의 맞은 듯 다른, N과 P가 맞는 것만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차이가, MBTI를 이루는 다른 4개의 알파벳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은 우리의 일상에 크고 작은 균열을 만든다.



다른 방향을 향해 있는 우리의 이런 성향이 결국 우리가 지금의 형태로 살게 한 건지도 모르겠다. 내게 결혼이란 가족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삶의 동반자가 되어 공동체를 이루기로 한 약속이다.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변함에 따라 깨질 수도 있는 약속인 거다. 여기에는 존중과 성애를 포함한 애정이 기반이 되어야 하므로 만약 서로에 대한 사랑이 식는다면 언제든 멈출 수도 있는 것이다. 만두를 간장에 찍어먹든 소금에 찍어먹든 상관없는 것처럼 결혼은 하지만 아이는 갖지 않을 수도 있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결혼식 대신 혼인 신고만 해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우리가 삶을 함께 하기로 했다는 게 중요하니까. 가또는 달랐다. 


가또에게 결혼이란 평생을 함께 하겠다는 당사자간의 계약이자 가족 간의 결합이며 이 최적의 결합을 위한 부가적인 조건들이 필요했다. 거기에는 꽃이 예쁘게 세팅된 웨딩홀에서의 결혼식이라든가 귀여운 아이, 그 아이를 키울 넓은 집과 부모님들과의 교류 등 가정을 위한 많은 조건들이 필요하다. 충족되지 않을 조건들. 가또에게는 가정을 이루는 디테일한 요소들이 중요했다.  가또는 이 조건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결혼 자체를 거부하게 됐다. 결혼을 담기에 가또는 맞지 않는 냄비였다. 그럴 바엔 결혼을 하지 않는 게 나았다. 최적의 결혼이 아니라면 굳이 결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나 다른 우리가 만나 함께 삶을 지속하는 방법으로 찾은 게 바로 동거다. N과 P가 만든 결과다. 각자 다른 이유로 결혼은 하지 않지만 상상력이 풍부한 우리는 결혼이 아닌 다른 형태를 함께 꿈꾸게 됐다. 계획적으로 단계를 밟아가는 삶보다는 우리의 선택이 만든,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주어진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삶. 그 안에서 도전의 재미를 느끼며 정해진 답보다는 우리만의 답을 찾는 것. 우리가 꿈꾸는 삶이다. 


나와 가또는 일상을 함께 하며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는 미래를 그리며 강제적이 않은 방식으로 서로의 반려가 되어주고 있다. 동거를 하며 동반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난 지 5년이 되어가면서 나는 이 동반의 중심인 애정의 성질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관찰하고 가또는 우리의 동거를 최적화하는데 각자 힘을 쓴다. 오늘은 가또가 퇴근하는 목요일이다. 저녁에는 가또가 최근에 새로 산 찜기에 새우만두를 쪄서 맛간장을 찍어먹어야겠다.     





우리의 더 많은 동거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유튜브에서 '젤라가또'를 검색해주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77mSNSUr6rA&t=409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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