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박자 빠른 판단을 요하는 하루가 되겠습니다.
‘한 박자 빠른 판단을 요하는 하루가 되겠습니다. 망설임은 당신으로부터 기회를 앗아갈 수도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아침에 본 별자리 운세가 나에게 경고했다. 왜일까? 이런 날에는 불안한 예감이 적중하고 만다. 이상하게도 이런 날에는 평소엔 오지 않던 시간에 엄마로부터 전화가 오고, 아빠와 연락이 안 된다는 불안한 목소리가 내게도 불안을 지핀다. 잠시 못 받아도 이내 다시 걸려오곤 했던 전화가 없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앞으로는 응급실에 가야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어요.” 두 달 전 병원에서 들은 의사의 목소리가 생생히 떠올랐다. 온갖 생각이 밀려와 오히려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집에 가보자.” 옆에서 통화를 듣고 있던 동료의 단단한 목소리가 나를 붙들었다. 4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차를 타고 가면서 동료와의 대화가 끊기지 않았다. 분명 중요한 얘기들을 나누었는데. 정말 미안하게도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에 종이컵이 씌워진 것처럼. 불안한 나를 붙들어주던 동료의 눈빛과 목소리의 온기만 남았다.
계단을 뛰어 올라가 번호를 누르고 현관문 손잡이를 돌리는 순간에도 ‘당황하지 말고. 바로 119, 119야.’ 몇 번을 되새겼다.
문을 열고 거실 한 켠에 앉아있는 얼굴을 마주하자 든 그 안도감이란...
“아빠, 왜 전화를 안 받아! 엄마가 너무 걱정이 돼서 나한테 연락했잖아. 나도 놀라서 일하다 달려왔어.”
“에이, 뭐 그런 것 때문에 집엘 와. 좀 전까지 다른 방에서 잤어. 전화 온 줄 몰랐네.”
대수롭지 않은 것 같은 태도에 올라온 화도 잠시. 몇 마디를 하면서도 울리는 쇳소리 가득한 기침 소리가 속을 긁었다. 울먹거리는 내 얼굴을 보는 아빠는 어떤 심정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괜찮은 척 말하지만 암에 걸린 뒤 달라진 몸을 느끼며 어떤 불안을 안고 있을지. 이전 같으면 하지 않아도 되었을 걱정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참 속상했다. 마음을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잘 알아서. 서로를 바라보는 걱정 가득한 눈빛이 그저 서로 속상한 것이다.
회사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안도의 한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는 이럴 수 없겠구나. 그런 순간은 예고 없이 오는 거구나. 다음 순간엔 망설이지 않고 달려갈 수 있을까? 모르고만 싶은 감정과 생각들을 알게 되는 요즘이다. 잘 지내냐는 안부 인사에 ‘오늘은 불안한 하루였어요. 그치만 큰일이라고 하기에는 꽤 견딜만한 날이에요.’라고 길게 말하기가 어려워서 ‘그럭저럭 지내요.’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 날들. ‘저야 잘 지내죠.’라고 당연하게 대답하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까마득해졌다.
“어떻게 지내? 가 더 맞지 않아? 잘 지내냐고 묻는 건 별로인 것 같아. 잘 못 지내는 사람은 어떻게 대답하라고.”
친구가 했던 말이 자주 떠오른다. 무신경한 말투로 뱉는 섬세함에 놀란 뒤로 나도 안부를 물을 때에는 ‘어떻게 지내?’라고 묻게 되었다. ‘그럭저럭 지내.’라고 대답하는 사람에게는 한 번 더 ‘그럭저럭 어떻게?’되물어본다. ‘요즘 그럭저럭이 아니라 널뛰기하듯 힘든 날을 보내고 있구나.’ 다시 돌아보며 한숨이라도 한 번 내뱉을 수 있도록. 혹시 잘 못 지내더라도 그게 스스로의 잘못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사람의 섬세한 마음과 다정함에는 무너진 하늘도 다시 메우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별자리 운세보다 든든한 힘이. 한숨 한 번 길게 내뱉고, ‘오늘 정말 고생했다.’ 토닥이고서 글을 쓴다. 어떻게 지내시나요? 당신도 그럭저럭 지내시나요?
2024년 7월 5일 쓰고 난 뒤, 8월 다시 고쳐 씀.
이 글을 올리고 난 뒤에는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잘 수 있기를 바라며.
진진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