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루 하루키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얼마 전, 저를 콕 집어 설명하는 단어를 만났습니다. 패션 취준생. 취직에 대한 의지는 없지만, 주변의 기대에 취업을 준비하는 척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데요, 제가 딱 그렇습니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어 일자리를 알아보기조차 싫은 거죠. 전염병을 핑계 댈 수 있는 현 상황을 은근히 즐기고 있달까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직업 정체성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저는 직업으로서의 ‘패션 취준생’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취준생은 직업이 아니라는 분들도 더러는 계시겠지만, 공부를 하지 않아도 학생이라 불렸던 시절을 떠올리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장편소설을 쓸 경우,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매를 쓰는 것을 규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좀 더 쓰고 싶더라도 20매 정도에서 딱 멈추고, 오늘은 뭔가 좀 안된다 싶어도 어떻든 노력해서 20매까지는 씁니다. 왜냐하면, 장기적인 일을 할 때는 그 기세를 몰아 많이 써버린다, 써지지 않을 때는 쉰다, 라는 것으로는 규칙성은 생기지 않습니다. “ ..........P150
취준생의 시간은 무한합니다. 채워 넣는 것도 낭비하는 것도 스스로의 몫이지요. 원치 않게 장기적인 일이 될 수 있는 취업 준비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루틴을 짜는 것이 중요합니다. 별것 아닌 일도 규칙적으로 해 버릇하면 없던 당위성도 생기게 됩니다. ‘딴짓’을 참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서, 딴짓을 루틴으로 만드시길 권합니다. 물론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릴 순 없으니 방문을 꼭 닫고 행하시길 바랍니다.
“모두를 즐겁게 해주려고 해봐도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오히려 나 자신이 별 의미도 없이 소모될 뿐입니다. 그러느니 모른 척하고 내가 가장 즐길 수 있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만일 평판이 좋지 않더라도, 책이 별로 팔리지 않더라도, ‘뭐, 어때, 최소한 나 자신이라도 즐거웠으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 ..........P270
패션 취준생의 목표는 취업이 아니라 딴짓할 시간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다만 죄책감에 주의하세요. 나를 즐겁게 해주는 딴짓을 시간 낭비라고 여기는 것은 자기기만입니다. ‘쓸모’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쓸모 있다는 것이, 수익을 낼 수 있는 것과 동의어인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그만둘 혹은 계속할 용기가 생길 것입니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것은 나 자신이지, 주변이 아닙니다. 내가 즐겁다면 주변도 즐거워할 것입니다. 물론 좋은 주변이라는 전제하에 말입니다.
“상상력과 대척점에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효율`입니다. 수만 명에 달하는 후쿠시마 사람들을 고향 땅에서 몰아낸 것도 애초의 원인을 따져보면 바로 그 `효율`입니다. (중략) 우리는 그런 `효율`이라는 성급하고 위험한 가치관에 대항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고와 발상의 축을 개개인 속에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P228
바야흐로 큐레이션의 시대입니다. 넷플릭스는 내 취향의 콘텐츠를 열심히 찾아주지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아도 시간이 모자란 세상입니다. 효율이란 실패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럴 시간에 이걸 하지.’ 성공이 보장된 행위만을 추구하게 됩니다. 패션 취준생의 유일한 장점이라고 한다면, 효율에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관심이 가는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다양한 경험이 삶에 입력된다면, 향후 일반 취준생이 되어서도 좋은 출력물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Not Only Books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그런거지 뭐' '그래서 뭐', 이 두 가지는 인생의 (특히 중년 이후의 인생의) 양대 키워드이다. 경험으로 말하는데, 이 두 가지만 머리에 잘 새기고 있으면 인생의 시련 대부분을 큰 탈 없이 이겨낼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또 다른 에세이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의 한 구절입니다. 작가는 재즈바를 운영하다 29살에 소설가로 등단했습니다. 독특한 문체로 일본 문단계의 이단아가 되었죠. 출간한 소설의 반응이 전작에 못 미칠 때마다 혹평을 들었다고 합니다. 국내에선 문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과대평가된 문인’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 기분이 나빴지만, ‘그래서 뭐’ 하며 계속 글을 썼습니다.
비전공자의 매력은 ‘근본 없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냥 해보는 것입니다. 작가에게 ‘그 정도의 소설이라면 나도 쓰겠다’고 말한 사람 중 실제로 소설을 썼다는 이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써야만 하는 이유가 그에겐 있었던 거겠죠. 근본은 없지만 해야 하는 이유가 누구보다 뚜렷하다면, 근본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럼에도 주눅이 든다면, ‘그래서 뭐’ 그런 거지 뭐’ 두 키워드에 의존해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