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이 불편해지는 Ep. 01
요즘 노들장애인야학의 신입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노들야학은 1993년 설립돼 장애인에게 다양한 교육을 하는 곳이다. 많은 장애인이 제대로 학교를 다니지 못해서다. 비장애인에게 이곳은 불편하다. 내 안의 편견을 자꾸 발견하게 된다. 당황스럽고 이따금 부끄럽다. 나름 좋은 사람이라고 자부해왔는데 아니었다.
장애인, 그들의 세상에 걸어 들어가 ‘나 자신이 변화하는 과정’을 기록하기로 했다.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테니까.
노들장애인야학에는 인기 가수가 있다. 여러 행사에 초청돼 전국을 누빈다. 바로 ‘노들 음악대’ 이야기다. 노들음악대는 뇌병변장애인 등 중증장애인들로 구성된 악단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아이돌이랄까. 트와이스나 BTS처럼 큰돈을 벌지는 못하겠지만, 스타는 스타다. 노들음악대는 노들장애인야학의 자부심이다.
오늘은 노들음악대의 연습 시간에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 공기가 비장했다. 당장 내일이 장애인인권영화제 오프닝 공연이었다. 선생님의 지휘에 맞춰 레퍼토리를 두 번 반복했다. 저마다 열심이었다. 비록 음정 박자는 다 달랐고 가사를 정확히 발음하는 사람도 드물었지만! 표준적인 노래로 친다면 음악보다 소음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래’는 애초에 ‘표준’이란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
정작 마음이 쓰였던 건 곡조가 아니라 가사였다.
이 세상의 차별 없는 우리들 세상
모든 사람 차별 없이 행복하라고
마음으로 함께 하는 우리들인데
장애인도 사람이다 욕하지 마라
우리에겐 언제라도 투쟁이 있다(헤이)
레퍼토리 모두 투쟁가(鬪爭歌)였다. 가슴이 답답했다. 무언가 석연찮았다. 불편한 이유가 무엇인지 따져보았다. ‘투쟁’이라는 단어 자체가 갖는 공격성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냥, ‘장애인’과 ‘투쟁’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몇 년 전 읽었던 기사가 떠올랐다. 2017년, 대통령 선거 유세에 장애인을 동원해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자유한국당의 유진의 의원은 제19대 대통령 선거유세에 장애인을 동원했다. 제주도 내 모 장애인시설 원장인 윤모 씨는 유 의원의 부탁을 받고 장애인과 시설 직원 20여 명을 현장에 동원했다. 유진의 의원은 “장애인 동원이 선거법에 저촉되는지 미처 생각을 못했다”라고, 윤모 씨는 “교육 차원이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유진의 의원과 윤모 씨는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각각 9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장애인과 시위를 잇는 것이 어째서 불편한지 비로소 알았다. 투쟁가(鬪爭歌)를 부르는 장애인들이 노랫말의 의미에 진짜로 동의하는지 알 수 없어서다. 장애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선거 유세에 동원하는 행태와 무엇이 다른가. 장애인은 이용당하는 것이다.
“신곡을 가져와봤어요.”
2017년의 기억을 끄집어내며 홀로 괴로워하는 동안, 음악대는 연습을 끝냈고 선생님은 신곡을 발표했다. MR이 재생됐다. 신나는 리듬의 테크노였다. 선생님은 이 곡에 탈시설에 대한 가사를 붙이자고 했다. 학생들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의견을 내놓았다. 뇌병변 장애가 있어 말하는 게 힘든 이들도 목소리를 냈다. “감옥 같은 시설” “나아가자 우리, 시설 밖으로” “나가 살자 우리” “투쟁하자 우리” “차별하지 말고 우리에게”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장애인과 투쟁은 어울리지 않는다’니. 장애인은 장애인 인권운동의 당사자다. 장애인이 장애인 권리 투쟁을 부르짖는 것은 바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행위다. ‘그들은 사고할 수 없다’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없다’는 통념이 내게도 깊이 박혀 있었다. 이러한 오해는 뻗어나가 ‘장애인은 시위나 투쟁, 정치를 할 수 없다’고 믿게 만든다.
이 세상의 차별 없는 우리들 세상
모든 사람 차별 없이 행복하라고
마음으로 함께 하는 우리들인데
장애인도 사람이다 욕하지 마라
우리에겐 언제라도 투쟁이 있다(헤이)
다음번엔 함께 노래나 불러야겠다. 얼굴 대신 목울대가 뜨거워지도록.
우리에겐 언제라도 투쟁이 있다, 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