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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난 부자(富者)인 듯

책 포쇄(曝曬)하면서 알았다

by 박길숙

연일 비가 오다가 그쳤다.

햇볕도, 바람도 책 말리기에 좋다.

어렸을 때, 까마득한 1950년 대 중반

한량인 아버지는 밖으로 쏘다니셨고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친정 더부살이를 했다.

그림 그릴 줄 몰라서 한지에 색종이를 오려 붙였다

외갓집은 조선종이로 묶은 한서(漢書)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계절이 여름에서 가을로 이사를 가면 방문짝을 모두 떼어내 말끔히 씻고 말려서 새 창호지로 새 옷을 입혔고 책이란 책은 모두 꺼내 바람을 쐬어주는 포쇄(曝曬)를 했다. 그 과정이 참 좋았다. 책을 귀히 여기는 외할아버지 손길, 외할머니가 내오신 유과(油菓)는 지금도 아슴아슴 눈에 선하다. 그립기도 하거니와 그 덕분에 옳은 길을 가려고 노력하는 내가 좋다.

김수영 시선집 - 민음사

외갓집처럼 마당이 넓고 대청마루가 있으면 좋으련만 지금 내가 사는 곳은 누추하다. 그래도 책 덕분에 남부럽지 않은 부자다. 이 고운 주홍빛 비단으로 몸치장을 한 이 책은 민음사에 나온 '김수영 시선집'이다. 1981년 9월, 이 책이 나오자마자 득달같이 서점으로 달려가 샀다. 앞표지에 글자 하나 없어 외려 수없이 많은 글이 어룽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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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펴면 김수영 보다 부자인 내가 부끄럽다. 타자기가 없어 미농지에 시를 쓰고, 금성라디오 A504를 일수로 사들인 후 타락했다고 자책하는 맑은 시인 김수영, 유난히 크고 맑은 눈을 가진 김수영의 흑백 사진이 보면 볼수록 새로운 이유다. 시(詩)여, 침을 뱉어라! 말 할 수 있는 유일한 시인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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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KakaoTalk_20250813_094306514_06.jpg 순창 섬진강 장구목 엄마 산소 가는 길

나도 머지 않은 날, 이런 풀잎이 되리라.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빨리 울고 먼저 훌훌 털고 일어나는 참다운 풀로 엄마 곁에 누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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